Inverted spiritual discipleship training from the Holy Spirit perspective relationship
Before we go in
The world has changed hard since Corona. In this world where everyone is struggling, church is no exception. It is now the time for many churches to conduct worship through non-face-to-face. Now that the daily life of people has collapsed, many churches are also struggling with non-face-to-face worship. After Corona, it changed everything in the world at once. However, there is one thing that should not change even if everything changes. It is worship. Worship should not stop, regardless of whether it is face-to-face or face-to-face. This is because Christian spirituality is formed through worship, and people live as witnesses who show distinct evidence to the world. evangelism and worship did not stop even in the era of the first church, when the situation was more difficult than now. Rather, it took place in an era where more revival was difficult. Now, the church community must think about how to worship and evangelize after the non-face-to-face Corona era, and think about with God's mind whether to change it or not. In particular, the church community that houses the next generation should preach the gospel of the Bible to adolescents and young people. The gospel is to accept Jesus, who came through the light. The era of darkness such as post-COVID-19 cannot change the gospel of the Bible. Among the media methods of the world that deliver the gospel,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cannot also change the light of the gospel. Perhaps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can be changed from evil dark tools to tools to become disciples of Jesus who came to light. You can see from the fact that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are now prepared by God in the same era of contact after COVID-19 and prepared as tools for worship to preach the gospel. In the post-COVID era, many churches worship on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are also God's grace, considering what would have happened without this.
We need to let these God-given communication channels overflow with gospel content. However, in today's Internet and smartphones, a lot of evil content is sickening young people and adolescents with addiction. God-given treatment solution is simple. We need to remove the hidden snake religion of the next generation with a spiritual vaccine called "Spiritual vaccine elimate hidden snacks decision from the next generation." To do this, all the saints can do is get rid of the evil Satan things hidden in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Satan's evil snake-like religion is more strongly deceiving the next generation and causing death in the world of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The gospel that saves lives should be given to adolescents like a vaccine. Even after the congregation, countless teenagers who have heard the gospel are living a life away from the gospel of the Bible because of the countless evil contents of the world. Satan is also a spirit of falsehood that deceives normal cells as viruses deceive normal cells. We must get rid of the Satan snake religion by giving spiritual vaccines to the youth. Father God's plan history throughout all times. In particular, God the Father is planning how to deliver the gospel, a spiritual vaccine, to the youth. God the saint obeyed this plan and made the way for Christians from the death of the cross to resurrection. Through God the Holy Spirit, he makes Jesus testify and guides him along the way. And Christians are applying the formation of Christian spirituality through the words and prayers of the Bible in their lives. The Trinity, which triumphs over evil through good, makes it clear that all evil will eventually succumb to the good.
First of all, this book was written from Jesus' perspective on how to preach the gospel to them in the world of the Internet and smartphones, which is full of evil content. In this era, we wrote how to beat smartphone and internet addiction to youth. The way to beat this is to make you see the world from Jesus' perspective. This is called upside down spiritual discipleship training. To do this, we need to let young people and adolescents know the perspective of the Holy Spirit God through the words of the Bi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Holy Spirit, Jesus reminds us of the military ghosts in the Bible, but smartphone addiction is like a military ghost. The youth addicted to this military ghost can meet the good Jesus. Specifically, you can pass on God's righteousness in the Bible to the youth and meet Jesus, who beat evil by good. We need to create youth and young people from the values that God sees, not from the values that people see. We need to interpret and apply today's situation through upside-down spiritual training, which is the principl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erspective of God, that is, the perspective of the Holy Spirit. To do this, parents and adults should convey the words of the Bible at home in church. Even in situations like COVID-19, church communities and families through face-to-face and online should create a wall of faith. All older generations of saints must trust and follow Jesus, who won the war against Satan.
Therefore, this book aims for parents to become Bible teachers for adolescents and young people. First, along with the Bible teacher in the church community, we deal with the Internet and smartphone addiction problems that the next generation should know. We must protect against evil content through the walls of God's kingdom. Parents will be connected to the church community through the Internet to help them teach the Bible directly. Parents should be trained with the Bible from the perspective of Jesus and help shape the spirituality of Christ. I wrote down how to train upside down spiritual disciples that lead to the perspective of Jesus and the Holy Spirit through the Bible. It is a way to make it possible to gain more freedom in truth by changing i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rinity God rather than the perspective of man. In addition, how to teach the Bible to adolescents and young people, I have made direct coaching and upside down spiritual discipleship training textbooks so that parents, teenagers, and young people can study.
Conversely, parents want to train their disciples' spirituality through the spiritual student training curriculum. This coaching textbook will be effective if conducted at home with parents and adolescents.
교회중심 영적 성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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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Assessment 1 Essay
단어 수: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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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CONTENTS)
초록 ii
1들어가는 말 1
2 칼빈의 구원론과 그리스도와 연합 2
2.1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중심으로 본 칼빈의 구원론 2
2.2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과 구원론간의 역사 신학적 연관성 3
3 역사 신학 관점으로 본 워필드가 이해한 칼빈의 구원론 5
3.1 워필드의 구원론 5
3.2 기독론적 구원론에 관한 워필드의 입장 6
4 그리스도와의 연합 중심의 구원론 재정립과 실천론적 제안 7
5 나가는 말 8
참고문헌 10
초록 (Abstract)
21 세기 뉴질랜드 사회 안에서 바람직한 교회 사역의 구조와 형태에 대해 연구해 보십시오. 한인교회든 다민족교회든 관계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다문화 사회 안에서의 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기술해 보십시오. (예: 교회의 형태-가정교회, 선교중심의교회, 교육중심의 교회, 팀사역중심의 교회 등. 교회의 구조-목회자 중심의 구조, 장로중심의 구조, 평신도 중심의 구조 등) 이 외에도 현대사회의 사고나 구조의 틀에 맞는 교회의 구조와 형태를 기술하시면 됩니다. 신학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으로 정의할 때, 신학의 방법은 항상 그리스도와 연합 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존재로서 더욱 신중히 고찰해야 할 구원론이 왜곡되어 퍼지면서, 현재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영혼의 구원 이라는 측면이 과도하게 강조되어 그리스도와 연합 한 교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균형이 무너지기도 한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오늘날 개혁교회의 기둥인 칼빈과 그의 교리를 계승한 칼빈주의자인 워필드의 구원론에 대해, 역사신학 관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였다. 칼빈신학은 루터의 성경 중심적 신학의 토대 위에서 구원론의 본질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이며,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 핵심가치, 또는 중요한 신앙 원리이다. 또한 점진적으로 무너져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와 연합 한 공동체인 교회와 신자에게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과 워필드가 주장하는 구원론은 우리를 죄로 부터의 용서 뿐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점진적이며 평생에 걸친 사역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 한 구원론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사변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와 연합 교회와 신자는 세상 가운데 작은 그리스도 라는 정체성을 회복하고 깊이 있는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 구원의 삶을 감당하는 데 큰 공헌을 할 것이라 기대 된다.
교육과 선교 중심 교회로
1 들어가는 말 2000
선교는 교회가 가지는 가장 위대한 이유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고 치유하고 전파하시면서 마지막에 당부하신 말씀이 세상 끝까지 가서 제자를 가르치라고 하시었다. 그러면서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그리스도인이 되서 안주하고 있다면 우리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안타까워 하신다. 한마디로 가르치고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으면 전파하는 것이 힘들다. 이 두가지는 어쩌면 같이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만 하는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모르는 것이다.
교회의 형태가 선교 중심의 교회로 가는 것은 이런 면에서 당연히 먼저 나와야 한다. 가정교회, 교육중심 교회, 팀 사역 교회는 어쩌면 그 선교 중심의 교회가 되기 위한 준비라고 봐도 된다. 교회의 목적은 구원에 있다. 교회가 구원의 선교를 진행하지 않으면 사회속 단체와 같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다문화 사회속 단체처럼 변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 에세이는 선교 중심의 교회가 좀 더 사회속에서 다문화 가정을 통해 선교를 하는 방법과 그것으로 인한 효과가 어느 정도되는 지를 알아 보겠다. 교회의 형태가 선교 중심이 왜 되는 지를 알아보고 교회의 구조를 선교 중심으로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지도 제안을 해보 곘다.
. 공동체가 가진 것은 신앙을 지키고 공동체 안에서 천국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청소년이 교회를 나온 이유를 말하는 데 하나님을 떠나기 싦어서 교회를 떠났다고 하는 말이 우리의 마음이 아프다. 교회는 구조는 이런 아픔을 예수님의 몸으로 써 움직임이 빨리 치료를 해주어야 된다. 그런 움직임을 만들려면 모이고 흩어져야 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휼을 반영할려면 평신도 중심의 회중 지역교회와 가정교회를 추천해본다.
본 글은 그런 선교 중심의 지역교회가 어떻게 교회로써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하여 논해 보겠다. 삶 속에서 평신도는 일요일에만 예배를 한다. 평신도가 삶속에서 산예배와 영적 예배가 되는 교회가 가정교회와 회중교회가 만나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이 교회가 머리이신 예수님을 지체들이 다 같이 하나의 규범속에 묶으면 거기서 나오는 불협화음은 상상이상이 될 수있다. 모든 지체는 누구나 같을 수는 없다. 회중교회와 가정교회가 같이 연합이 되면 이런 지체간에 소통이 서로 다른 은사를 나누며 평신도 중심의 가정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를 어떻게 만드는 지 이제부터 논하겠다.
2 평생 제자화를 교회의 교육중심
예수님의 대위임 선교 명령의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제자를 만들지 않고 선교를 진행하는 것이 문제이다. 모든 것이 설 익은 과일을 먼저 따먹고 맛이 없게 되어 버리는 꼴이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회심한 사람이 열정에 선교를 하지만 열정이 성숙의 단계를 가지 않고 그 열정이 식으면서 결국 제자의 삶은 힘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형성과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제자화가 완전하게 되는 전체 과정은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까지 각 단계별로 정의 된다. 처음 단계부터 구도자, 듣는자, 기도자, 충성 스러운 자로 연결된다. 단순한 회심이 아니라 한 사람을 구도자로부터 말씀을 듣는 과정, 제자가 되는 과정, 더 깊은 영성 형성의 과정, 교회의 삶에 완전히 동화 되는 과정에 전체에서 제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1] 이런 영성 형성의 단계가 없이 제자로써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신병훈련을 끝내지 않은 병사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과 같다.
이 같은 현상은 제자의 삶이 영성 형성의 단계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된다. 베드로의 삶을 보면 그가 제자가 가진 열정으로 예수님앞에서 떠나지 않게다고 확신 하였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을 예수님 보는 앞에서 세번 부인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교회가 제자를 교육하지만 예수님을 말로만 따르겠다고 하는 제자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변화된 것은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은 후부터 였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 성령의 이른비는 공동체에게 임재하는 영이며 공동체가 뿌리를 잘 내리게 해야 한다. 공동체가 가지는 이런 가르치는 영성 형성은 늦은비까지 맞아야 한다. 요앨 2:24 에 나온 늦은 비까지 맞고 영성 형성이 성령의 은혜를 가지고 영성 형성이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현재의 영성이 옛 날의 영성보다 커지고 좀 더 자라고 있는 산예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산 예배는 생명을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느냐는 삶의 척도를 우리가 느끼게 된다. 성령의 역사가 결국 충만함으로 이루어져 삶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영성 형성이 된다. 어제 보다 오늘이 성숙한 영성이 자라도록 제자들이 산 예배를 만들어햐 한다.
평생 제자인 정체성으로 산 예배의 역사를 교회가 만들어야 한다. 남은 자가 바로 영성 형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다. 재난과 심판을 면한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는 그 너머 남은자가 가진 구원의 영광을 봐야 된다.
사실 구원이란 단어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령 하나님이 영성 형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죽어 있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폭 넓은 의미를 가지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란 뜻을 좀 더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인간의 모든 곤경과 신의 심판 자체로부터 구출할 때 이루어지는 영성 형성의 총제적인 축복을 의미한다.[2]
그런데 영성을 잘 못해석하는 일이 있다. 기독교인의 기초와 법위안에서 성취된 참 경험으로 해석하여 경험적인 탐색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부담되어 제자들이 육체적 공로로 경험적인 것을 만들어 지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성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삶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3] 그렇다면 영성 형성은 결국 예수님의 모든 것에 닮는 모습이 삶속에서 드러나고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말씀과 예배 기도를 통틀어서 공동체적 요소가 포함 되어 만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는 영성형성의 체계를 만들지 못한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교로 변신하고 있다. 기독교의 중심은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님이시다. 이런 것은 재래 종교인 하늘님 숭배사상에서 나와 육적인 정욕의 경험과 표적에 이끌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교회가 가진 예수님의 중보자 사상과 영성형성을 많이 오해하게 만들었다.[4]
중요한 것은 회심한 사람이 영성형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제자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주의 얼굴에 나오는 영광을 회심한 성도들에게 영성 형성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 영성 형성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다. 창세기의 창조의 빛이 예수님 얼굴에 하나님의 나타난 영광의 재창조의 빛을 보게 된다. 회심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죽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 연합된 상태가 영성 형성이 제자가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평생 제자로 가는 사람은 영성형성이 있어야 한댜는 것이다.
3 영성 형성이 이루어지는 지역 교회의 구조와 형태
그렇게 할려면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따라 예수님의 대위임 명령에 순종하고 모든 영성 형성이 제대로 된 제자가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악을 선으로 갚은 공동체가 된다. 원래 기독교 공동체는 악을 선으로 갚는 공동체였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었고 초대교회도 마찬가지로 악을 선으로 갚는 교회의 모습을 가기고 있었다. 성경 말씀으로 서로 간의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핍박이 있어도 보복하지 않는 악을 이기고 선으로 갚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 공동체는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는 공동체가 되기 시작하였다. 종교 개혁이 권력과 물질에 썩어가는 것이었다면 그 이후에는 거의 선과 선 악과 선의 대결로 종교 전쟁이 일어나고 신앙이 하나의 정치적인 이슈처럼 사상이 되어 사람을 단죄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기류가 현대에는 정치적 성향과 물질적 기복주의 사상이 혼합되어 더 많은 부패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심지어 교회는 세상의 사법적 기관에서 판단해주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용서하는 문화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
모든 교단은 헌법이 있고 모든 종교는 치리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가 운영이 안되는 그런 지경이 되었다. 모든 교단마다 나름의 헌법이 있고 거기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죄인들을 만나서 식사하시고 사회에서 좀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찾아 떠나시는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벽과 담을 만들고 사회속에서 공동체의 벽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는 지를 생각하여 보라는 것이다. 이런 개교회와 교단 중심은 모두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단 지 생각으로 만 받아 들인 교회 공동체의 경향으로 인한 것이다. 실질적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진수가 회개와 용서에 있다는 것을 적용하지 못하고 생각이나 사상이 다르다고 용서와 화해를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교단이 이단이 아니면 천국에서는 하나님 나라 같은 백성이다. 같은 천국 시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남남처럼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마음 아파 하시고 계실 것이다.
또 한 지금의 개교주의와 교단 중심이 가지는 피해는 선교에서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옛날 1937년대 한국긔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중화권에 속하는 중화 기독교회 산동대회에 속하는 래양노회에 속하였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한국 교파의 이식이 아니라 파송된 지역교회에 속하여 협렵하는 선교사였다. 그 때 상당한 선교의 힘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그의 국가 권력이나 경제력에 의지 하지 않고 교회가 자기 교파이식이라는 유혹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자기 부인으로 선교를 했기 때문이다.[5] .그런데 그 이후 한국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 선교를 개교회의 이름으로 교단의 이름으로 선교 후원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였다. 심지아 다른 교단이 들어 오면 막는 현상 까지 있었다.
현재는 코로나 상황에서 보면 모든 교파와 교단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힘들게 되고 있다. 좀 더 확장된 개념의 교회가 필요하다. 교회가 이단이 아니면 하나의 교회라는 개념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모든 성도가 형제요 자매라는 개념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맞는다. 누가 장로이고 누가 목사이고 누가 총회장이고 하는 그런 계급적 사상은 내려놓고 확장된 개념의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회중교회 즉 지역교회를 표방하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지역교회가 가지는 확장된 개념이 지역의 선교를 같이 도와 가는 교회로서 역할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지역의 이슈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제자로써 기독교인의 영성 형성에 대한 훈련을 같이 공유하는 것도 장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4 흩어지는 가정교회의 선교
`
중요한 것은 목회적인 이슈에서 점차 많은 상황들이 변하고 있다. 그 상황을 21세기에는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변하고 있다. 거기에 코로나 상황과 교회 공동체의 변화는 당연하게 있어야 한다. 21세기의 교회는 이렇듯 변화의 시기에 와 있다. 교회의 목회적 이슈는 더 많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일수록 교회는 기초가 중요하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근원으로 들어 가야 한다. 이런 구호가 종교 개혁에서도 있었지만 지금 21세기 교회가 가장 민감하게 다루어야 과제중에 근본적인 문제의 제기를 통해 다루어지는 것이 바로 교회의 기초이다. 교회의 기초는 바로 건축자가 버린돌 예수닙이 기초석이 되어 쌓아가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다 안다. 그러나 머리의 지시를 받기만 하고 성장 하지 않는 다면 몸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교회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이 교회가 되게 하여 구원을 이루고 영적 성장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영적 성장을 통하여 전도와 선교는 교회가 가진 선택이 아니다.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이 바로 영적 성장을 통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전도하는 데 있다. 그래서 교회가 가진 비전을 보게 해야 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성령 하나님의 간섭으로 몸의 각 부분이 균형있게 성장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런 영적 성장 중요한 것들이 왜 중요한지를 이 번 에세이에서 논하고 지금의 교회가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알아 보겠다.
2 비전을 통한 영적 성장
교회공동체는 회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데 회심하는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헤서 방황을 하고 있다.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일 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기초석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기초석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영성을 바위처럼 단단해야 한다. 교회의 기초석이 튼튼하면 교회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교회가 몸이라면 팔이 거대하게 커져서 발의 역할을 한다면 문제가 된다. 영적 성장이 필요한 이유가 교회가 균형의 몸을 가지지 않고 불균형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손만 성장하고 발은 성장하지 않으면 손으로 걸어가는 역할을 할 수 도 있다. 교회의 모든 지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고 올바른 성장이 있어야 한다. 몸과 다리는 서로가 조화를 이루도록 성장하고 몸의 각 부분도 성장하도록 영성은 훈련이 필요하다. 움직이지 많으면서 성장하지 않는 것은 마치 지식만 가지면서 적용하지 않고 세상을 해석하지 않는 영성이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의지로 적용하는 영성이 중요하다. 기초는 교회가 가진 영성이며 그 위에서 비전을 가져야 된다. 교회는 지식과 마음과 뜻이 균형있는 영성이 비전을 가지도록 훈련이 필요 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복음 6;46 예수님이 주라는 지식은 있는 데 알기만 하면 안된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안된다. 야고보서 2;19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을 귀신도 안다. 고백은 있는데 아무것도 안한다. 귀신 같은 신앙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을 말한다. 믿고 떠는 것은 귀신도 안다. 정적인 반응이 있다. 주여주여 하는자는 귀신 같은 신앙이다. 그러나 귀신은 비전이 없다. 비전을 가진 영적 성장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의 기본이 균형이 있는 성장이 아주 중요하다. 사람의 몸은 태어나태부터 균형있게 성장다도록 되어 있다. 교회도 살이 있는 유기체처럼 균형있게 영적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그 균형의 성장이 기형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 균형있는 성장을 담당하는 것이 영성이다. 영성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영성이 중요한데 사람의 감정으로 영성을 조정하려는 시도가 이런 기형적인 성장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영성은 비전이 있어야 영성이 된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영성의 시작이다. 사람이 지정의가 균형있게 발전하는 것 처럼 영성 또한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균형있게 발전되어야 한다. 영성에서 지식은 하나님을 앎이요 영성에서 감정은 하나님과 함께 울고 함께 우는 마음이요 영성에서 뜻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 분의 길로 가는 의지를 말한다. 많은 회심한 사람들을 보면 영적인 씨가 마음의 밭에 부려진 것과 같다. 성령 하나님이 말씀을 듣게하고 읽게 하고 쓰게 하면서 이해를 시키시면서 비전을 주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비전을 주시는 것은 사람마다 아주 다르며 각각 아주 독특하게 하신다. 각자의 개성이나 성격이 다른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각각의 특별한 목적과 비전을 갖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틀리듯이 사람들의 비전 또한 작은 것이 있고 어떤 것은 큰 비전이 있다. 비전이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중요하다.어쩐 사람들은 비전이 아주 잘 보이지 않아서 희미하고 어떤 사람들은 선명하게 보여진다.[6]
이 비전을 얻어가는 방법은 영성에 있으며 영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의지가 아주 중요하다. 문제는 지식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식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안에서 감동을 주시고 그 감동을 행동으로 옳기게하는 비전의 의지를 주신다. 그것은 전적으로 소망하는 비전이 되고 우리가 의지를 보여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영적 성장은 결국 어린아이 같은 믿음에서 어른 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것은 지식이며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람들의 감정을 공유하고 같이 울면서 같이 웃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안다. 그리고 사회적 필요하 있음을 아는 분야에서 비전을 가지고 뜻을 가지고 의지를 통하여 자신의 배운 것을 적용하고 함께 다른 사람들과 꿈을 향해 같이 나가는 의지가 발동하게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ㄹ 지식만을 추구하는 영성은 잘 못된 지식으로 잘 못된 영성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죄가 더안 곳에 은혜가 넘챴디 는 말을 지식으로 알고 일부러 죄를 지어서 은혜를 넘치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잘못된 지식의 영성을 가지게 된다. 죄를 많이 져서 은혜가 넘친 것이 아니라 죄 의식이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었다는 것을 말한다. 성령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빛추어질 때 우리는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더 큰 은혜를 얻는 것은 하나닙이 우리를 좀 더 가까히 많이 비추어지는 상태에 있을 때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을 보면 알 수 있다.[7]
2.1 말씀으로 인도하는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무엇 보다 강한 구원의 능력을 가진 것이 성경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성품에 대하여 성경은 계속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산의 풍경을 이야기 할 수없다. 사람들이 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산의 주변을 관찰하고 멀리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본다. 그리고 산을 올라가서 산 정상에서 세상의 모든 경치를 본다. 밑에서 본 산의 모습 만 본사람은 이제 산으로 여행하는 여행자의 관점이 되어 산을 여행하기 시작한다.[8] 이렇듯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우둔한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게 되는 계기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하는 중매자가 되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논쟁할 필요 없이 설득할 필요 없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9]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만나게 한 후부터 그 사람이 변하고 복음으로 회심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사람을 변화 시키고 회심시키며 비전을 갖게 한다. 교회가 말씀을 어떻게 읽는 지를 알려 주고 성도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이런 영성을 주어야 한다. 단순하게 아는 지식이 아닌 영적 성장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고 연합되는 마음으로 영성 훈련을 시켜야 한다. 예수님과 연합되는 영성은 관점이 바꾸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회심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은 후에 어떻게 할 지 모른다. 교회는 그 때부터 하나님의 관점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는 영성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산에 올라가서 산을 여행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하는 영성은 회심의 경험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마음을 비치게 하며 우리가 죄인임을 통회하게 하고 울며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로 들어서는 여행자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삶은 여행이며 길이다. 즐거운 여행의 길이 있고 험악한 길이 있으며 단조롭지 않은 길이 있다. 모든 여행에서 마주치는 풍경이 다음에은 어떤 풍경이 올지 아무도 예상 못한다. 그런데 제자의 영성을 사는 여행자의 길에는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신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같이 가시면서 따르라고 안내하고 제자의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관점이 아닌 예수님의 관점으로 여행하게 하신다[10]. 이것이 에수님과 같이 여행하는 제자의 길이다. 거꾸로 관점의 영성 제자훈련을 통해서 진정한 제자의 영성을 주어야 한다.
2.2 비전의 해석 사명 단계
교회가 영정 성장의 비전으로 길을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을 읽을 때 사명으로 가는 길을 조그씩 여신다. 메일 성경책을 읽고 암기하면서 점점 비전의 사명과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신다. 이런 삶에서 어느 날 극적인 하나님이 말씀을 임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되는 구절이 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말씀으로 사명을 받았을 때 사명의 성경 구절이 있음을 이야기 한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18절의 말씀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는 구절으로 회심한 것은 아주 유명하다. 루터는 이 구절로 구원을 돈으로 파는 카톨릭의 권세에 반박문을 만들었다. 루터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란 것을 알았다. 이런 사명을 주신것은 성령 하나님이 성경을 성령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 해석해주는 작업이다. 나에게 맞는 사명을 주시고 재해석해주는 과정이다. 마치 매일 읽는 어느 성경 구절이 어느 날에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재해석되어 읽혀지게 된다. 이것이 비전의 사명으로 받게 되고 해석하며 적용하게 되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관점을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의 관점이 되어 보는 것이 바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다.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은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주인이 되게 하는 훈련이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거하실 때 그 분이 거하시기 합당하록 모델링하면서 하나씩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이있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영원히 주인이 되시어 거하시며 다스리신다. 이 마음을 가지는 은혜는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11] 우리의 정체성은 제자로써 이런 마음을 가지는 훈련이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으로 말씀에서 영원히 거하도록 사명을 받고 주인의 마음을 재해석해주는 것이 된다. 한번 예수님의 제자는 영원한 제자가 된다. 교회공동체는 영적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제자의 정체성을 알려주어야 한다. 제자 훈련 중에 비전은 아직 세상에 해석된 비전이 아니다. 그러나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의 영적 성장후에 세상에 해석된 비전은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사명을 받은 것인데 모든 사람의 은사가 다르듯이 그 은사를 활용하셔서 사명을 받은자가 된다.
3 적용의 단계의 전도와 선교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뜻을 전하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면 그분의 뜻이 그분의 사명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온다. 그분의 마음으로 세상에 해석된 복음을 선포하고 공유하기 시작한다. 예배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성도가 받은 사명은 예수님이 마태 복음 마지막에 적은 대사명인 세상에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사람은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조금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을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람의 원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일하시도록 우리를 드리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이 비전을 해석해주고 적용 해주면서 세상에서 부족한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한다. 거꾸로 영성제자 훈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제자를 통해 사명을 주시고 영광을 받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영광을 돌리신다. 우리의 비전이 성경 말씀을 통해 해석이 되고 적용되면서 제자들의 전도와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소통된다. 말씀의 해석으로 사명을 받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도구로 삼아 전도와 선교를 통해 모든 세상에서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4 나가는 말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교회가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은 인식을 해야 한다. 영적 성장은 그 유기체가 살아 있으며 세상에서 움직이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한다. 영적 성장을 바타으로 움지는 것 선교와 전도이다. 선교는 교회가 21세기 목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거이 되어야한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중요한 21세기 교회의 중요한 이슈가 청소년 사역이다. 구약의 성경을 보면 세대가 지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해서 묵상하고 더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리스도와 연합 한 신자의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와 연합 한 신자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께 묻고 싶은 답을 구하고, 앞으로 삶에서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찾는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구원에 대한 신학적 고찰 일 것이다. 구원론은 다른 모든 신학 연구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연합 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함에도 왜곡되어 퍼지는 경우가 많다. 구원이라는 키워드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밀접하게 닿아 있는 만큼 개인 영혼의 구원 이라는 측면만이 과도하게 강조되어 그리스도와 연합 한 교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균형이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12] 이렇게 왜곡되고 그릇된 구원론은 기독교의 핵심과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비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주기문 기도 사역
마태복음 6장
주기도문에 대한 새로운
일용할 양식 현재 지향적인 기도ㅈ
죄에 용서 과거 지양
시험과 악에 대한 이중구도
기도은 예방 기도- 현재 과거 미래에 대한 미리 예방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송영 나라와 권세 아버지께 영원히 감사하
우리라고
어바지의 뜻대로
페루의 주기도문
먼저 하나님 나라
3.1 성경 교사의 자질
구체적으로 본 에세이에서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루터를 뒤이어 철저하게 성경을 바탕으로[13] 구원이 무엇인지를 고찰한 칼빈과 그보다 300여년 후에 칼빈주의 학자인 워필드의 구원론에 있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의 유사성과 차이성을 연구하려 한다. 역사 신학 관점 안에서 두 신학에 대한 비평 연구는 그리스도와 연합 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을 새롭게 정립하는 신학적 가치를 부여해줄 것을 기대한다.
(John Calvin, 1509-1564)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모든 이해의 토대에 하나님이 중심에 서는 신본주의 라는 신학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러한 사실은 칼빈이 무엇보다도 죄의 구원 을 중심 주제로 삼고 그의 개혁주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4] 본 장에서는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인 구원론 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관점에서 연구해 보고자 한다.
칼빈은 근대성서신학자로 불리었던 성서중심적 신학자이었다. 동시에 그는 구원론에 관하여 성서에 입각한 개혁을 선도한 개혁신학자이다.[15]칼빈에게 있어 기독론은 구원론의 기초이지만 대속의 신학적 출발점은 아니다. 칼빈의 기독론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 하나님의 사랑이 칼빈의 대속의 교리의 출발점이다.[16] 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보다 선행하는 것이다.[17] 칼빈은 에베소서 네 번째 설교에서 구원의 과학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원을 죄들을 용서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풂 으로써 저주와 심판이 아니라 자비하고 따뜻한 하나님을 얻는 것으로 정의했다.[18]
칼빈에 따르면 타락과 부패, 죽음과 심판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고통을 겪고있는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다.[19] 구원과 거룩한 삶에 있어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는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20]이러한 이유로 칼빈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서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일차적인 것이다.[21] 칼빈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죄의 용서를 중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죄 사함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의(칭의) , 하나님과의 화해 , 하늘의 상속을 받는 것(입양)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피조물 또는 새로운 창조 됨 이 구속과 입양이라는 은혜를 통해서 얻는다는 관점으로 설명한다.[22]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 강요 안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교리 중에 하나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한국개혁 신학안에서 축소 수용된 것을 볼 수 있다.[23] 이러한 원인은 그 당시 보수적인 미국 칼빈주의 신학이 한국개혁신학 안에 유입될 때 축소된 채로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24]이러한 신학적 한계 부분을 보안하여 우리에게 재 적용할 필요와 함께 칼빈의 그리스도와 연합 한 구원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라는 신학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루터가 세운 신학의 토대위에서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그 시대에 만연했던 도덕 폐기론 성향을 타파하고자 실천적 구원론을 발전시켰다. 또한 단순히 지식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도덕적[25]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지에서 비롯한다.
칼빈의 전체 신학 안에서 하나의 핵심사상 처럼 다루어 지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26]은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로서 그의 전체 신학 안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또한 그 비유적 표현들은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과 다양한 성서적 본문 들과의 상관성을 가지고 언급하고 있다.[27]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 칼빈의 구원론의 기초이자 칭의와 성화의 근원이다.[28]칼빈의 구원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확보하신 유일한 유익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 이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29] 칼빈은 우리의 최종적 복락이 하나님과의 연합 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연합 으로 이어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통해서라고 말한다.[30] 칼빈에 따르면 신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체적인 연합 [31]이자 신비한 연합 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다.[32]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띠 [33]이시며 우리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 되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이중 은혜를 받게 된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와 칼빈 신학의 핵심 사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한국 개혁신학 안에서 구원론의 한 교리로만 다루어지도록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국 개혁 신학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칼빈 신학계에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35] 결론적으로 칼빈의 구원론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1851-1921)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미국 개혁주의 장로교를 수성한 칼빈 학자이며, 칼빈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이고 더 깊이 전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36]워필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교리들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 삼위일체, 창조로 구분하면서 칼빈에 대한 자신의 반응의 본질을 보여주었다.[37] 본 장에서는 개혁주의적 성경관을 가진 워필드의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의미와 역할에 관하여 연구해 보고자 한다.
구원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역들을 보편 구원론적으로 생각하려는 시도들, 즉 하나님의 사역들을 집단으로서 인류에게 향한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며, 워필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들이 모든 경우에 구원받는 개인들을 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8]
워필드는 초자연적 사실(즉, 하나님)에 대한 강력하고 순수한 믿음은 초자연적 행위(즉, 기적)에 직면할 때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준다고 주장한다.[39] 워필드의 구원론은 구원 과정이 시작될 때 피조물의 역할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확대하는 데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40]그래서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를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완벽하게 의존한다는 관념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41]
또한 워필드는 하나님이 그 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 함에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의 활동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로 인정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사실 앞에 죄인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동기나 도움을 얻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이 필요하다. [42]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다른 사람들과 관계없이 그 자신 안에서 전체 로서의 사람들 각자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 한 사람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인류를 구하러 오신 것이다. [43]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하러 오셨다고 집요하게 말씀하며, 세상의 구주라는 위대한 칭호를 그에게 돌린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필요한 충고를 하거나 유도하거나 돕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 한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것이 칼빈주의자인 워필드의 구원론의 핵심이다.[44]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신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구원 과정이 하나님의 이러한 선택으로부터 기인한다.[45]
하지만 칼빈주의가 단지 구원론 뿐만 아니라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님은 왜 죄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죄의 결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대답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함이다.[46]워필드는 은혜의 교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질서를 하나의 합리적인 통일성으로 묶을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체계다.[47]
3.2 청소년 가정 교회의 시작
워필드는 인류의 단일성이 구원론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철저히 성경적 관점을 유지했다. 모든 사람이 아담이 죄를 공유하고 있고 그의 죄와 함께 심판에 함께 놓이기 때문이다. 한사람에게 적절하고 가능한 구원은 동일하게 적절하고 가능하다. [48]그는 기독론의 변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올바른 구원론의 토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고서는 하실 수 없는 것들을 제시한다.[49]
워필드는 구원의 다룸에 있어 칼빈과 같이 칭의와 성화를 구분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된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한다.[50]또한 칭의와 성화가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 연합 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얻게 되는 유익임을 알 수 있다.[51]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에 분명하다.[52]
워필드는 칭의와 성화의 수동성과 능동성을 제시하면서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한다.[53]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칭의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수동성을 강조하고 성화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간섭과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 한 오늘날의 교회에도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준다.[54]
칼빈과 워필드의 구원론은 모두 변증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이 구원론에 관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방식이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과 신학적 도전 그리고 청중들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55] 칼빈은 그릇된 개념을 가진 신자들을 향해서 성경의 권위를 변증했고, 워필드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학자들 특히 신비주의자나 합리주의자를 향해서 성경의 권위를 변증했다. [56]필자는 칼빈과 워필드가 설명방식과 강조점에만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성경에 나타나 구원에 대한 권위와 이해를 세우려는 시도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칼빈과 워필드의 구원론에 대한 정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라는 이중 구조 관점으로 볼 때, 우리를 죄로부터의 용서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가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점진적이며 평생에 걸친 사역임을 알 수 있다.[57]
4 선교 사역
칼빈은 구원론이 그리스도와 연합 의 결과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이를 일상의 삶 속에 다시금 확증하는 실천적 영역으로 전개한다.[58]칼빈과 그의 신학을 계승한 개혁신학자들은 그의 교리가 실천적 삶에 대한 강조가 약하다는 오해를 받아왔다. 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의 거룩을 중요시하며, 지적인 내용 만이 아니라 영적이고 실천적인 부분까지 아우르고 있었다.[59]
그리스도인의 전 삶은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 동안 십자가를 짊어진 모범을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 을 통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60] 십자가를 지는 삶은 신자의 육을 죽이고 신자를 훈련시켜서 그리스도와 연합 하는 것이다.[61] 우리는 십자가를 인내의 태도로 짊어지되, 그러한 십자가를 짊어짐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의 과정이 촉진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강건 해져야 한다.[62]그리고 그 확신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국경이 점점 무너지고 다문화가 공존하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민사회라는 공동체는 다문화 형태로 다사상, 다언어, 다종교와 신학, 다문화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로 형성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현재 호주의 이민 교회가 바로 이러한 다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다문화 속에 있는 우리에게 십자기를 지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 해답의 열쇠는 그리스도와 연합 한 공동체인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이국 땅 다문화 사역의 현장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 의지해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을 통한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게 되는 것이 완전한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63]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줄 알게 될 때야 그의 빛나는 부활에 참여할 준비가 된다(빌3:10-11) 고 역설했다.[64]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된 존재로서 작은 예수 요, 작은 그리스도 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게 한다.[65]
5 나가는 말
서두에서 거듭 살폈듯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함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릇된 구원론을 논하는 교회와 공동체가 적지 않다. 그 해결책으로 성서적 기반과 실천성을 담보한 칼빈과 워필드의 구원론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칼빈과 워필드는 구원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여 구원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죄는 살면서 완전히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칼빈과 워필드에게 완전한 구원은 불가능하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 한 공동체인 교회와 신자는 시대적 도전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와 연합 한 우리의 신앙을 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하 것은 이러한 변증적 시도가 학문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 을 변증하는 신학은 삶과 살천으로 이어져야만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의 체계적 연구와 올바른 적용을 위해 그 사상을 연구하는 포괄적인 신학적 작업이 필요하다.[66]
칼빈과 워필드의 주장은 오늘날의 영적 도전과 위협에 맞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보존자,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을 변증하고,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비롯되는 정의와 사랑을 옹호할 때 충분히 깊고 광범위하며 신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67]
이러한 결론은 한국개혁교회가 추구하는 구원의 뿌리를 찾아 그리스도와 연합 한 교회와 성도의 생산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 깊은 신학적 깨달음을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자각하게 될 것이다.[68]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라는 이중 구조 관점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선언되며 구원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덧입어 새롭게 창조되는 것으로 우리를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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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유정우, 칼빈의 구원론에 있어서 성화의 위치, 복음과 신학 1 (1996년2월): 47. 이 하나님의 사랑이 칼빈 신학 전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7] Ibid, 이 사랑에 의하여 성부 하나님은 더 앞서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화목을 예기하신다.
[18] 이오갑, 깔뱅의 구원론, 신학논단 62 (2010년 12월):181. 구원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그 (예수)가 가까이 와 있다고 가르친 그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죄의 용서요, 구원이요,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얻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기독교강요,3.3.19).
[19] 이오갑, 신학논단 ,181.
[20] 유정우, 복음과 신학, 25.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관계를 맺을 때 구원에 이른다. 우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타락하였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기독교강요,2.6.1).
[21] 기독교강요, 4.11.1. 죄와 사망의 종들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해방되고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속자요 구원자로 인정하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고 영원한 결박에 가둠을 당하는 것이 아니면 복음의 총체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22] 나용화, 칼빈과 개혁신학, 48.
[23] 최성렬, 교회사내 독자적 연구: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 간의 역사신학적 비평 연구 제5강, 6.
[24] Ibid. 그러한 신학적 한계는 거의 여과과정 없이 그 초기 조직신학자들에 의해 구대로 초기 한국개혁신학 안으로 유입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사상이 미국칼빈주의신학 안에서보다 한국개혁신학 안에서 더 축소된 상태로 수용되았음이 자명한 사실이다.
[25] 윤종훈, 존 칼빈의 구원 확신론에 관한 고찰, 성경과 신학 80 (2016년):169.
[26] 최성렬, 칼빈신학 다시 읽기: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관점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45 (2016년 9월):218.
[27] 최성렬, 한국조직신학논총, 221.
[28] 이남규, 칼빈의 이중은혜론:칼빈의 선행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신학정론 34 (2016년 5월):86.
[29] 윤형철, 개신논집,111.
[30] Ibid, 113.
[31] 알프레드 필러, 칼빈의 성화론, 유정우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부,2002),30-31.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그러한 실체적 인 신비한 연합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어떤 본질의 혼합 혹은 존재론적 혼합 을 말함이 결코 아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에 있어 결단코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섞이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 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강력하게 논박한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 신성과 인성이 서로 혼합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진리였기 때문이다.
[32] 유태주, 칼빈의 이중 은혜론의 의미와 적용, 한국기독교신학논총 77 (2011년10월): 60.
[33] 기독교강요, 3.1.1. 우리가 그리스도 바깥에 있고 그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당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전혀 유익이 되지를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또한 우리 속에 거 하셔야만 비로서 그가 아버지께로 부터 받으신 축복들을 우리와 함께 나누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자신과 효과적으로 연합시키는 띠 이시라는 것이다.
[34] 나용화, 칼빈과 개혁신학, 96.
[35] 최성렬, 교회사 내 독자적 연구: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 간의 역사신학적 비평 연구, 제1강 (강의안, 알파크루시스대학 시드니, 2018년 8월), 1.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개혁신학이 미국의 칼빈주의 (또는 미국개혁주의)신학으로부터 강하게 그 역사 초기부터 신학적인 영향을 받아왔고, 심지어 그 칼빈주의 신학을 가감이 없이 전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 칼빈주의와 미국개혁신학 안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의 범위적 한계와 중요성의 빈약성이 다름아닌 한국개혁신학이 하나의 결점 있는 유산 아닌 유산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36] 셀더하위스, 칼빈핸드북,955.
[37] Ibid.
[38] 벤자민 B. 워필드, 구원의 계획, 모수환 옮김 (고양시: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0년),95.
[39] 피영민,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서울: 검과 흙손, 2004년),129.
[40] 벤자민 B. 워필드, 칼뱅:하나님,성경,삼위일체교리 해설, 이경직, 김상엽 옮김 (서울:새물결플러스,2015년),365.
[41] 피영민,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42] 워필드, 칼뱅:하나님,성경,삼위일체교리 해설. 366.
[43] 워필드, 구원의 계획, 109.
[44] 워필드, 칼뱅: 하나님, 성경, 삼위일체교리 해설, 393.
[45] Ibid,366.
[46] 워필드, 칼뱅: 하나님, 성경, 삼위일체교리 해설, 394.
[47] Ibid.
[48] 김상엽, 벤자민 워필드의 성경관과 과학관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 조직신학연구 28 (2018년):143.
[49] 김상엽,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워필드의 변증과 실천적 함의 연구, 신학저널 40(2019년):163. 워필드에 따르면 요한 일서 2장2절은 온 세상이 모든 개인을 의미하며 보편 속죄를 의미하기 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자로 함께 하시며 모든 세대에 걸쳐 자신의 택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50] 김상엽 신학저널.163.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성화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거룩하게 세워진다. 개신교 신학에서 성화는 칭의나 중생으로부터 구분된다. 그러나 칭의와 중생은 성화의 기초이기 때문에 둘로부터 성화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 칭의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법적인 활동이나 선언에 한정된다. 죄인은 칭의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자격을 갖게 되고, 이때 성화는 그에 대한 유효적 실행이다. 중생이라는 용어는 최초의 유효적 행위에 한정된다. 죄인은 중생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게 되고, 이때 성화는 점진적 발전이다.
[51] Ibid,164.
[52] Ibid,165.
[53] Ibid. 중생과 칭의는 순간적 행위이다. 중생과 칭의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여기에서 죄인들은 수동적이다. 반면에 성화는 하나님의 점진적인 사역이다. 성화에서 죄안은 하나님과 협력이다.
[54] 김상엽, 신학저널, 165.
[55] 김상엽, 벤자민 워필드의 변증적 성경론, 백석대기독대학원 (2017년):69.
[56] Ibid.
[57] 유창형, 존 칼빈의 성화론 (용인: 목양,2009년),64.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아담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의를 상실했다. 이 회복은 그리스도에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의 일치이다.
[58] 빌헬름 니젤, 칼빈신학 강의, 이형기, 조용석 공역 (서울: 한들, 2011년),185.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사신다. 그 하나는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의 행동들을 지도하시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의에 우리로 하여금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우리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용납될 만하게 하는 방식이다.
[58] 김광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2014),160.
[59] 김광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 ,160.
[60] 기독교강요, 3.8.1. 십자가의 고통은 믿음을 시험하고 강화시키며, 인내력과 겸손을 개발시키고, 육의 충동을 정화시키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기독교강요,3,8,4).
[61] 유창형, 존 칼빈의 성화론 , 122.
[62] 로날드 S.월레스, 칼빈의 기독교생활 원리, 나용화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 2013년),95.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 분의 지혜와 뜻이 우리의 행동을 주관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를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주님을 향하여 경주하도록 노력하게 된다(롬14:8, 고전6:19).
[64] 유태주, 한국기독교신학논총,75.
[65] 최성렬, 한국조직신학논총,247.
[66] 최성렬, 교회사 내 독자적 연구: 한국내개혁신학 수용과정과 역사, 제4강 (강의안, 알파크루시스대학 시드니, 2018년 9월),3
[67] 워필드, 칼뱅:하나님,성경,삼위일체교리 해설,374.
[68] 최성렬, 한국조직신학논총,247.
[69] 토트 J. 빌링스, 그리스도와의 연합, 김요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년),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