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rted spiritual discipleship training from the Holy Spirit perspective relationship
들어가기 전에
코로나 이후로 세상이 힘들게 변하였다. 모두다 힘들어하는 이런 세상에서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교회가 이젠 비대 면을 통한 예배를 진행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간에 이루어지는 일상이 무너진 지금 교회도 비 대면 예배로 속수 무책 힘들어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한 순간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예배이다. 예배는 비 대면이든 대면이든 상관없이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초대 교회 시대에도 전도와 예배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부흥이 어려웠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제 교회 공동체는 비 대면의 코로나 시대에 예배와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바꾸어 갈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고민해야 한다. 특히 다음 세대를 품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의 복음을 전도해야 한다. 복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같은 어둠의 시대가 성경의 복음을 변질시킬 순 없다. 복음을 전달하는 세상의 매체의 방법 중에 인터넷과 스마트 폰 또한 복음의 빛을 변질 시킬 순 없다. 어쩌면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악한 어둠의 도구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도구로써 바꿀 수 있다. 지금 인터넷과 스마트 폰은 코로나 이후 같은 언컨택트의 시대에 하나님이 준비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예배의 도구로 준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수 많은 교회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가를 생각하면 인터넷과 스마트 폰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런 하나님이 주신 소통의 채널에 좀 더 복음의 컨텐츠가 넘쳐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인터넷과 스마트폰에는 수 많은 악한 컨텐츠가 청년과 청소년들을 중독으로 병들어 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주신 치료 해법은 간단하다. “Spiritual vaccine eliminate hidden snakes deception from the next generation” 영적백신으로 다음세대의 숨겨진 뱀의 계교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려면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숨어 있는 악한 사탄의 것들을 없애야 한다. 사탄의 사악한 뱀 같은 계교는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세상에서 더욱 강하게 다음 세대를 속이고 사망으로 몰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청소년들에게 마치 백신처럼 주어야 한다. 복음을 들은 수많은 청소년들이 회심 이후에도 수 많은 세상의 악한 컨텐츠 때문에 성경의 복음과 멀어져 가는 삶을 살고 있다. 바이러스가 정상 세포를 속이는 것처럼 사탄 또한 속이는 거짓의 영이다. 청소년들에게 영적 백신을 주어서 사탄 뱀의 계교를 없애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시대를 통해 역사하신다. 특히 영적 백신인 복음을 어떻게 청소년들에게 전달할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계획하고 계신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에 순종하시고 십자가의 사망에서 부활로 그리스도인의 길을 만드셨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시고 그 길로 안내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을 적용하고 계신다.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한 것이 결국 선한 것에 굴복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시고 있다.
이 책은 먼저 악한 컨텐츠가 넘쳐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세상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으로 적었다. 지금 시대에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스마트 폰과 인터넷 중독을 어떻게 이기는지 적었다.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거꾸로 영성 훈련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관점을 성경 말씀을 통해 알게 해야 한다. 성령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이 성경에 나와 있는 군대 귀신을 연상하게 되는 데 스마트폰 중독은 마치 군대 귀신 같다. 이 군대 귀신의 중독에 걸린 청소년은 선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의를 전해주고 선으로 악을 이기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면 된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치관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보는 가치관으로 청소년과 청년을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 즉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인 거꾸로 영성훈련으로 오늘의 상황을 해석하고 적용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부모님들과 어른들이 가정에서 교회에서 성경의 말씀을 전하여 한다. 코로나 같은 상황에서도 비 대면과 온라인을 통한 교회 공동체와 가정이 믿음의 성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모든 기성 세대의 성도들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부모님들이 성경 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먼저 교회 공동체 성경 교사와 함께 다음 세대가 알아야 할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성벽을 통해 악한 컨텐츠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부모님이 교회 공동체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직접 성경을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부모님들에게 성경 말씀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훈련시키고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성령 관점으로 인도하는 거꾸로 영성 훈련 방법을 적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거꾸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 좀 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또 한 성경을 어떻게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부모님들과 청소년, 청년들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직접 코칭과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교재를 만들었다.
부모님들은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교육과정을 통해 제자의 영성 훈련을 했으면 한다. 이 코칭 교재로 부모님 청소년과 같이 가정에서 실시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교재는 온라인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을 통해 부모님과 자녀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회복할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또 한 성경에 있는 성령과 생명의 원리로 중독을 이기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다음세대에 접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코칭 교재 시리즈는 예수님의 관점 원리로 안내하고 있다. 거꾸로 예수님의 관점을 키우려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령님의 관점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훈련하게 하는 책을 질문과 응답의 코칭 교재 형태의 시리즈로 만들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에 다음 세대에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어떻게 써야 중독을 이길 것이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적었다. 정보통신이 발단한 이 세대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 길은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의 거꾸로 영성 훈련에 질문과 응답을 통하여 예수님을 성경에서 찾도록 해야 된다. 더 나아가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며 비전 선언문을 적용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 청소년과 청년들의 영혼의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 질 것이다.
- 거꾸로 영성 성령 관점 관계 코칭 교재 시리즈 바램-
이 책은 성공한 사역 자의 글이 아니다. 성경 교사로써 사역자로 써 선교사로써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글을 만들었을 뿐이다. 뛰어난 설교자의 글도 아니다. 뛰어난 문장가의 글도 아니다. 뛰어난 분석가의 글도 아니다. 뛰어난 직업 작가의 글도 아니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선택하여 제자를 삼은 것처럼 하나님은 약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필자를 세우시고 이 글을 쓰게 하시었다. 단지 이 책은 잃어버인 한 영혼 군대 귀신 걸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로 폭풍의 바다같은 호수 갈릴리를 건너가신 예수님의 심정으로 적었다. 또 이민자 교회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던 IT 전문가인 전도사가 직접 성경을 가르치고 인터넷과 디지털의 경험을 살려 교육 훈련 교재로 적은 글이다. 형식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의 감화를 글로 만들어 보았다. 필자 자신을 내세우려는 목적이 있어 책을 만든 것도 아니다. 단지 지름길을 찾아 잃어버린 단 한 영혼이라도 천국의 좁은 길로 인도하고 싶다. 넓고 편한 혼탁 세상의 길에서 천국의 좁은 길로 인도하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에서 만든 것이다. 그저 그 마음뿐이다.
세상의 혼탁한 일상에서 청년들이 환상을 보고 어른들이 꿈을 꾸면서 성령 충만함을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러기 위해 부모님과 어른 들이 청소년을 향한 비전과 꿈을 갖기를 바라신다. 또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의 관점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길 바랄 뿐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청소년과 청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믿음의 씨가 자라지 못하고 인터넷과 스마트 폰 중독에 넘어가서 생명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교회들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해 섬기고 싶어 그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코칭 형식으로 적어 본다. 소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질문과 응답 속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푯대가 되었으면 한다.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한 것을 믿고 복음의 생명을 가졌으면 한다.
코로나 이후에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길을 잃어버린 양이게도 이 글이 안내 좌표가 되길 바란다. 또 거꾸로 영성인 성령 관점을 통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질문과 응답이 씨앗을 그들의 마음에 심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 씨앗을 좋은 땅에서 자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무성한 나무가 되게 할 것이다. 그 나무는 길을 찾지 못하는 나그네에게 쉼터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또 한 나무 밑의 쉼터는 청소년과 청년에게 예수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통하여 비전을 만들어 가는 통로가 될 것이다.
거꾸로 영성 훈련인 성령 관점 관계 교육 시리즈는 주님의 일이며 주님이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만들 것이다. 모든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교회 종파, 언어와 지역을 초월한 교회 공동체가 될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이 허락한다면 성령 관점 교육 시리즈를 청소년과 청년 사역 팀이 있는 모든 교회 공동체 마다 쓸 것이라 믿는 다. 이제 이런 믿음으로 다시 뛸 것이다. 이 책은 작은 교회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큰 교회의 부모님들이 성경 교사가 되어 자가의 자녀를 서로 가르치도록 만들어가게 할 것이다. 온라인 플랫폼에 연결된 모든 교회가 다음세대에 맞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 교사들을 다 같이 양육하였으면 한다. 그래서 주를 믿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마지막 때에 구름처럼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을 기도하며 꿈을 꾼다.
- 저자의 약력-
저자는 국민대학교 정보대학원 석사를 졸업하였고 뉴질랜드와 호주에 있는 알파쿠르스 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졸업 하였다. 한국에서는 S보통신에서 인터넷 관련 프로젝트로 최초의 인터넷 K ISP 제안 프로젝트, 증권회사 등 수 많은 웹프로젝트를 구축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로 미국 S 소프트웨어 지사에 입사하여 교육 팀장, S화재, H자동차 프로젝트를 경험하였다. 그 이후에 관련 무선 통신 모바일 관련 일을 하였으며 새로운 웹에 대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뉴질랜드 이민을 통해 현지 IT 기업 운영과 이민자들의 사업자들을 도와주는 경험 등 다양한 정보통신과 교육 경험을 25년 간 쌓았다. 이런 경험을 살리어 NEXT WEB 책과 이민 영혼의 자유를 향해 떠나는 여행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뉴질랜드 현지 교회에서 중고등학교 학생, 대학교 청년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믿음으로 성경 교사와 간사, 선교사이면서 사역자로 살고 있다. 그 동안 수 많은 비지니스와 선교여행을 통해 청소년 선교 교육을 진행하였고, 한국 미국 뉴질랜드의 많은 교회에서 스마트 폰 중독을 강의하였으며 선교 대회나 세미나에서도 새로운 교육 방법을 강의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성경 훈련을 통해 청소년, 청년 성경 교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현지 뉴질랜드 프로젝트 메지먼트 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지역 교회 공동체를 위한 allinone mission 선교회로 활동하고 있으며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연합되면서 온라인으로 광고가 되도록 하는 온라인 교회 플랫폼 개발 allinonechurch.org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Allbuilder.org 란 온라인 청소년과 청년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선교 플랫폼을 통해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고 있다.
목차
1절 대화가 단절된 심각한 스마트 폰 중독에 대해... 1
1절 결과와 순위로 이야기하는 인터넷 게임과 스마트 폰 세상... 12
3장 세상에서 느끼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지옥... 18
1절 우상의 나라 시돈과 두로의 청소년과 청년들... 19
1장 코로나 이후에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영적 백신... 27
2절 제자를 훈련하는 단계와 영적 백신의 증거... 31
3절 그리스도인 영적 형성 단계와 영적 백신 접종된 믿음... 33
4절 소명과 사명의 단계 복음의 영적 백신을 적용하는 시대... 36
3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썩지 않을 영적 유산을 물려 주자... 54
4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배의 유산을 물려 주자... 56
5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물려주자... 60
3부 하나님이 가정과 공공 사회와 교회에게 다음 세대를 주신 이유... 62
1장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와 성경을 주신 이유... 62
3절 성경 교사, 사 역자, 부모님들이 해야 할 가정 예배... 69
4절 성경 교사, 사 역자, 부모님들이 해야 할 영성 훈련... 71
2장 하나님이 가정과 공공 사회에게 교회를 주신 이유... 75
1 절 코로나 이후에 교회가 가지는 사회적 공감 능력 역할... 75
2절 코로나 이후에 교회가 가지는 선교의 변화... 78
3장 코로나 이후로 힘들어하는 지역교회 청소년 교육을 위한 성경 교사 양육 사역... 82
1 절 코로나 이후에 교회가 가지는 성경 교사의 역할... 82
2 절 지역 교회를 위한 성경 교사 양육 과정의 목표... 83
3 절 지역 교회를 위한 성경 교사 양육 과정 도구... 87
4부 영적 백신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세워지는 관계회복과 다음세대 믿음의 영성... 91
1장 부모님들과 성경 교사, 다음 세대들에게 영적 백성으로 주는 성경 훈련... 91
1절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하나님 나라 부름의 시작... 91
2절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 하나님의 구원 계획서 성경... 94
2장 영적 백신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로 세워지는 다음 세대 영성... 97
1절 예배가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 97
2절 영성으로 찾아가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 100
3장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지는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과 해석, 적용 원리 영성... 104
1절 예수님이 주신 꿈을 꾸게 하는 성령 관점 관계 비전 원리... 104
2절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보는 성경의 비전 훈련... 105
3절 세대 관계회복을 위한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 원리... 106
4절 성경의 관계 해석 원리를 통한 영성 형성 훈련... 108
5절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성경의 영성 적용 훈련... 111
6절 성령 관점 관계의 적용 원리로 가는 기도의 영성... 114
5부 성령 관점 관계의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 116
1장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세워지는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116
1절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보는 성경의 제자 훈련... 116
2절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성경을 읽는 거꾸로 제자 영성 훈련... 119
2장 초대 교회 영성인 거꾸로 제자 영성 훈련 과정 안내... 121
1절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으로 가는 초대교회 회심의 과정... 121
2절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으로 가는 초대교회 비전의 과정... 123
3절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으로 가는 초대교회 해석의 과정... 126
4절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으로 가는 초대교회 적용의 과정... 127
5 절 초대 교회 제자 훈련과 거꾸로 영성 양육과 전도 단계의 교재로의 융합... 129
3장 초대 교회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적용하는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 131
1절 청소년을 위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131
4절 초대 교회 제자 훈련과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의 과정 융합... 135
4절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으로의 실천 전도 과정... 138
5절 양육하고 전도하는 예수님 관점의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142
6절 양육과 전도하는 예수님 관점의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 145
4장 부모님들과 성경교사들에게 전하는 성령 관점 코칭 영성 훈련 교재... 148
1 절 성령 관점 관계 코칭 교재 시리즈 배경... 148
2절 성령 관점 관계 원리 코칭교재 시리즈 대상... 150
3절 성령 관점 관계 코칭교재 시리즈 기본원리 -- 성령으로 사는 방법... 152
4절 성령 관점 관계 코칭교재 시리즈 목적 --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154
5절 성령 관점 관계 코칭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 믿음의 거꾸로 성경... 155
5장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한 성경 교사 양육 전도 교재 시리즈로 안내... 158
1절 성령 관점 관계 코칭 교재 시리즈와 성경 교사 양육 목표와 내용... 159
2절 성령 관점 관계 코칭 교재 전도 시리즈와 청소년과 청년 전도 목표와 내용... 162
6절 성령 관점 관계 코칭 교재 시리즈 고난과 나그네 같은 여정... 164
질문) 왜 스마트 폰의 부흥을 일으킨 실리콘밸리의 부모들은 스마트폰을 자식들에게 주지 않는 가?
지금은 수많은 수억 개의 스마트 폰이 사람들의 주머니에 있다. 사람들은 매일 스마트 폰을 확인하고 스마트 폰을 잠잘 때까지 쉴 새 없이 보고 만진다. 식사 시간에 부모들은 보통 아이들이 울면 스마트 폰을 보여 주고 만지도록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가 스마트 폰을 만지고 보는 순간 아이들의 뇌는 그 중독 정도가 가장 강력한 미디어에 노출한 것과 같다. TV나 다른 미디어보다 스마트 폰은 엄청난 미디어 중독의 수치에 노출이 되게 된다. 그 이후 아기들이 다은 어떤 충격이 와도 그 충격만큼 크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에게 스마트 폰을 주는 것은 중독으로 가는 가장 큰길을 열어 주는 것과 같다. 그들의 감성이 스마트폰 중독에 갇혀서 더 이상의 충격이나 감동이 낮아지게 하여 점점 더 중독에 노출되게 된다.
그런데 이 스마트 폰을 처음 만든 곳은 실리콘 밸리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부모들은 안다.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쓰는 시간은 뇌가 정지된 시간과 같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중독된 아이들은 앞에 지적 능력과 감성 능력을 담당하는 색깔이 검게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쓰게 되면 분노 조절이 힘들며 부정 정서를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형상에서 창조 능력은 아이들의 감성 지수가 중요하다. 단순히 지능 지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성 지수가 많은 사람들이 좀 더 많은 창조적인 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감성지수는 어릴 때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때에 스마트폰을 쓰게 되면 감성 지수는 적어지게 된다. 스마트폰을 주거나 스마트 패드로 학습을 시키는 것은 아이들의 감성을 인위적인 댐 같이 막게 된다. 결국 이것은 1세 이하나 2 살에 주는 스마트폰과 스마트 패드로 인해 아이들이 감성 지수와 이해도가 느려지게 된다,
또한 사람의 머리에 신경만 조직에서 스냅스가 발달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가 어릴적 10살 이하에 시기이다. 이시기는 바로 감성이 발달하는 시기와 겹치면서 사람이 뇌세포가 발달하고 점점 더 많은 감성 뿐 만아니라 지적 능력, 공감 능력도 발전하기 때문에 이다.
이렇듯 아주 어릴 적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지며 무엇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이런 시기의 어린아이에게 스마트 폰을 준다면 그 아이의 감성 지수는 스마트 폰이 준 감성에 멈추어질 것이다. 심지어 미디어에 중독된 아이들은 말을 할 줄만 알았지 말을 듣는 인내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이런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선생님과 부모님이 가르치면서 인내력을 가르치는 데 그런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한 심지어 아이들은 학교에서 수업을 스마트 패드로 하고 있는 데 이것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댐으로 막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직접 눈으로 보고 사람에게 말하며 듣는 습관이 발전되면 아이들은 공감과 관계 형성 능력이 발전을 가지고 된다.
결국 스마트 폰이 중독된 아이 들은 지적 능력과 공감능력이나 관계 형성의 능력이 더 떨어지게 된다. 앞으로의 미래 세대는 인공지능이 가진 정보능력으로 인내력을 가지고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을 더 떨어지게 할 것이다. 수많은 한국 아이들이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조사가 있었다. 이것은 스마트 폰과 스마프 패드로 학습하는 학교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에서 찾는 자극은 아이들의 자기 주도적 감성과 지성 능력의 감퇴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부모님들이 스마트 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자기 주도적 이해 능력과 감성 능력과 학습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려면 어른들은 아이들의 스마트폰 통제를 통해 만들어야 한다. 부모님들은 스마트 폰과 패드가 통제가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릴수록 스마트폰의 중독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그런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되도록 외부에 있는 자연을 보게 하며 습관적인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런 세대에게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릴수록 아이들은 부모님의 손길을 잡고 갔던 산책길과 뽀뽀로 느끼는 사랑의 감성을 느낀다. 어른이 되면 잊어버릴 수 있지만 머리에 남는 감성은 수많은 스냅스로 연결되어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을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따뜻한 햇빛을 느껴야 한다. 아이들이 받게 되는 이런 오감이 주는 감성을 스마트폰에 뺏기게 되면 안된다. 어릴 때 아이들은 바람에 날리는 꽃 향기를 코로 느끼고 책을 넘기는 종이의 질감을 손으로 느껴야 한다. 세대가 변해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오감의 경험은 피조물에 적용된다. 창조주가 있음을 부모님이 증거로 어릴 적부터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책을 줘야 된다. 스스로 읽고 독서에 대한 기록을 적게 해야 한다. 책을 읽게 하는 능력을 인공지능으로 해서 요약하거나 문장을 만들게 되면 안 된다. 우선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요약하는 능력을 가지 면서 적은 문장이라도 직접 문장을 만들고 요약해야 된다. 그렇게 하면 한 줄이라도 읽고 느낀 점을 알게 하면 생각하는 능력이 늘어난다. 인공 지능 시대를 살아 가는 다음 세대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상으로 듣고 읽고 말하고 쓰는 공감 능력을 동시에 키워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오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스마트 폰 중독이 된다면 아이들의 감성을 망치는 것과 같다. 스마트 폰에 중독된 아이들이 부모님들이 주는 감성을 공감할 리가 없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부모님과의 감성이 공유가 안되어 대화가 안되고 결국 부모님과 정서적 안정을 찾을 리가 없다. 안 그래도 한국은 부모님과 대화가 모자란 세대인데 청소년과 청년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다. 결국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부모님이 줄 감성과 정서적 안정을 스마트폰에 뺏기었다.
질문)그런데 요즘의 스마트 폰 중독은 어떠한가?
스마트폰이 없을 때 2007년 인터넷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2백만 명 된다고 조사됐다. 그 당시에 기사를 인용하면 9살에서 39살의 인구가 2천3백여 명인데 9 % 인 2백11만 정도가 인터넷 중독이 심각하다고 하였다. 특히 성인 중독자보다 청소년과 청년 중독자가 두배의 차이로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터넷 중독으로 학교 공부와 직장 업무 같은 생활 피해자가 25%가 되었다. 2014년인 한국에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직장인 10명중 7 명이 중독성이라고 신문사의 기사가 있다. 직장인 500명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의 중독 위험성이 어떠한가를 질문하였는데 70% 이상이 주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한다.
질문)그럼 지금 이 시대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지금 10년 이후 2024에는 더욱 심하여 질 것이다. 현재 스마트 폰과 인터넷 중독 상태에 있는 성인을 조사한 통계 내용이 증거가 된다. 아마도 2007년에 공식적인 통계가 200만 명 정도였다면 위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시간을 통해 점점 악화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옛날 2007년에는 스마트 폰이 없어 그 정도 수치는 적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의 스마트 폰 때문에 위의 기사처럼 10명 중 7명이 중독 증세를 주의 필요한 수준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마도 천만 명 이상 엄청나게 많은 성인과 학생들이 스마트 폰과 인터넷의 중독 증세에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갈수록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대화의 단절은 점점 습관이 될 것이고 더 많은 스마트 폰과 인터넷 중독자를 낳을 것이다.
오래전 필자는 한국 출장 중에 황당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한국에서는 전철을 타고 가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스마트 폰으로 무엇인가를 한다. 이제 그런 모습은 이제 일상이 되어 그리 대단하지 않다. 전철에서 거의 모두 다 스마트 폰을 보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귀신 집단에 홀린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며 긴 시간 동안 전철을 타고 가는 것은 일상이 되어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질문) 스마트폰 중독과 담배 중독은 어떤 차이가 있는 가?
옛 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버스에서 당연하게 피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담배가 해롭운지 몰랐기 때문에 미국이나 모든 도시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모든 공공 장소, 전철,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금지시켰다. 심지어 어떤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면 천만원의 벌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마찬 가지로 스마트폰 중독은 엄청난 정신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공공 장소에서 스마트 폰을 일정 시간 이상 보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이 만들 있을 수 있지 않을 까 상상 해 본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 날 지하철 2호선 전철을 타고 긴 시간을 좌석에 앉아 강남역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옆 좌석에 다정하게 연인처럼 보이는 커플이 스마트 폰만 보고 있었다. 둘은 서로 이야기도 없이 계속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 연인들은 꽤 긴 시간을 이야기도 없이 스마트폰만 보고 무엇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연인인지 알 수 있는 그런 젊은 커플이었다. 스마트 폰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 궁금하였다. 서로 다른 어떤 재미있는 것을 하는 것인가 궁금도 하여 옆을 힐 끗 그 들의 스마트 폰을 보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긴 시간 동안 대화 없이 서로 메신저로 무엇인가를 계속 주고받고 있었다. 더 심한 것은 서로 손으로 툭툭 치면서 빨리 답장하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역에서 여자가 내리면서 계속 메신저하는 모양을 하면서 내렸다. 어이가 없었다. 대화가 없는 그런 연인들의 일상을 보니 참 어이가 없었다.
질문) 대화를 안 하고 스마트 폰으로 문자로 소통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 가?
이런 현상은 비단 전철에서 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카페를 가보면 더욱 가관이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 중에 대화를 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스마트 폰에 매여 있다. 연인이든 친구든 사람들의 손에는 스마트 폰이 있고 대화는 별로 없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시키고 대화를 하다가 말이 끊기면 다시 스마트 폰을 본다. 어떤 때는 카페에서 대화만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질문)그렇다면 학교는 어떤 가?
이런 대화의 단절은 점점 비속어가 난무하는 초등학교 교실을 가보면 더욱 심각해진다. 아이들은 문자로 모든 것을 소통하는 것 같다. 대화로 소통해도 될 일을 문자로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문제는 이 문자가 점점 암호화되듯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문자로 보내는 내용을 보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다.
아이들은 부모와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감성을 느끼며 성장한다. 그 감성은 오감을 통하여 형성한다. 아이들의 눈으로 사람들의 보고 입으로 이야기하며 귀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코로 사람들의 냄새를 맡고 그들의 감성 지수를 형성한다. 아이들의 감성은 서로 간의 성격을 인지하게 하여 좋은 본과 나쁜 본을 구별하게 한다. 이런 아이들은 부모의 칭찬과 꾸지람을 받고 자라야 한다. 부모님이 자기를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눈과 입을 통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성인이 된 후에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질문) 스마트폰 중독 때문에 생긴 소통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적 감성은 말씀을 듣고 읽고 말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사람과의 소통도 된다. 그런데 지금 많은 청소년들은 스마트 폰 중독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메신저로 문자화 되거나 대화가 단절되고 있다.
사람들이 다툼이 많아지는 것은 이런 생활 속에 서로의 뜻이 오해되고 그들의 표현 방법을 메신저로 하고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이런 메신저의 일방적인 표현의 대화는 많은 충돌과 다툼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소통의 어려움으로 고통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다. 부모님과의 대화가 부족하며 친구들과의 대화가 부족하며 선생님과의 대화가 부족하니 그들은 고통스럽다.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사랑의 감성이 있을 리가 없다. 사랑이 전해지는 통로가 막혀서 부모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스마트폰 중독 때문에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성은 사람이 귀로 듣고 말하는 영성 감성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적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마음속에 허전함과 공허함이 든다. 이것을 다른 것으로 채우면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부족함 때문에 갈등한다. 이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중독되는 게임과 다른 것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 것인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질문) 그렇다면 부모와 대화도 단절되고 문자로 소통하는 지금의 아이들이 어떤 대화를 할 것인가?
사람의 입과 귀는 서로 대화를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시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귀로 듣고 입으로 소통을 하라고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은 눈으로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귀로 듣고 입으로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대화를 하도록 되어 있다. 사람들은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고 마음을 읽으며 뜻을 알게 된다. 그들의 표정과 오감으로 서로가 의지 적으로 잘못을 깨달아 표현하는 방법을 바꾼다.
부모님과의 대화가 단절되면 그들의 듣는 감성은 친구들의 말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친구들이 하는 욕을 배우고 심한 욕설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필터 없는 정수기처럼 그들의 대화는 욕설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대화를 통한 소통의 도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른 채 점점 힘들어한다.
이것이 스마트 폰 중독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모르고 부모님들도 모른다. 마치 거대한 감옥에서 누가 시키지 아니하였는데 전철이나 카페나 학교에서 모든 사람이 똑 같이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한다. 어떤 학교는 스마트 폰을 미리 수거하고 수업하는 데 아이들이 중독 증세를 보인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것이 점점 더 심각해진다는 것에 있다.
누가 복음 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질문) 중독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실 중독 문제의 본질을 아는 것이 이런 중독의 파워를 이길 수 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믿고 삶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독의 본질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에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채우지 못한 것을 믿고 내가 스스로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는 우상과 같다. 우상은 하나님 대신에 채우는 것을 말하고 중독은 채우려는 것에 사람의 의지로 멈추지 못하면 중독이 된다. 중독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상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함몰되어 의지가 멈추지 않고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쾌락에 빠져 드는 것이다. 우상의 문제로 발생되는 근본적인 결과로 중독이 생기는 것이다.
사탄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죄의 우상을 심어 놓고 사망으로 몰고 가고 있다. 우리의 선조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다. 그 이면에는 사탄의 거짓말이 있었고 그것을 따르고 믿게 되면서 불순종의 죄가 모든 후손에게 퍼져 간 것이다.
이것이 원죄인데 그 원죄가 사람에게 나타나는 시작은 바로 정욕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의지로 나 자신에 필요한 것을 채우는 것이 사람이 가진 정욕이다. 정욕에는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이 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채우고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거짓의 존재가 사탄이다. 그래서 인격적인 존재인 사람을 중독으로 묶어 사망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따 먹은 것은 중독의 이런 시초가 된 것이다. 이런 중독은 습관이 되고 이 습관은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을 거짓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중독이 일어난 사람들은 뇌에서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나온다. 도파민은 동기 부여와 쾌감을 조절하고 세로토닌은 기분 상태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결국 이 호르몬의 영향으로 계속적인 쾌감을 즐기기 위해 자기 자신의 의지로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포르노를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호르몬의 영향으로 중독되어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스마트 폰 중독을 비롯한 모든 중독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중독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탄이 지배하게 되면서 깨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지는 첫 번째 중곡 징조는 하나님 처럼 창조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중독된 사람들에게 창조적인 생각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려고 아무리 하여도 들지 않는 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깨진 것으로 알아야 한다. 사탄이 중독을 통해 창조적 생각을 위배하고 사탄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두번쨰는 중독의 징조는 하나님의 명령인 생육하고 번성하는 법칙에 위배된다. 하나님의 영상이 제대로 유지 될려면 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쉼을 주고 생육하게 하기 위해 잠을 자게 하였다. 먹고 자고 쉬면서 성장하는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탄이 준 중독이 막고 있다. 이 중독 문제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깨는 사탄의 전략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알고 사탄과 싸워야 한다. 사탄이 지배하듯이 모든 것을 중독이 통제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많은 중독되는 사람들이 먹고 자는 일상의 기본 생활을 잊어버린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어진 생육하고 번성하는 법칙을 위배하게 한다. 예를 들어 뉴스를 장식한 어느 가정주부가 어린아이를 방치하여 죽게 하였던 사건도 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법칙에 위배된 것이다. 그 이유는 가정 주부가 게임 중독에 걸려 어린 아기를 죽게 방치하였던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잠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스마트 폰과 게임을 하는 것을 보면 안다.
만약 식사를 거르면서 인터넷 게임을 하는 모든 청소년과 청년이 있다면 백 프로 중독에 걸리었다고 보면 된다. 특히 새벽에 알리는 스마트 폰 메신저의 “메시지 왔쇼” 는 사람들의 잠을 못 자게 한다.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법칙이 위배되는 생활에 거룩한 예수님의 성령이 임재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중독이 일어난 이유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탄이 공격을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회복되게 되면 중독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상호 연결되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이 임재해야 할 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영이 원죄로 죽어서 영이 있어야 할 부분에 허전함이 생기는 것이다. 그 허전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다가 생긴 것이 중독이다.
좀 더 중독의 현상을 자세히 보면 죄로 인해 타락된 영혼에 하나님이 주신 생존하며 창조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무엇인가에 구속된 것 같이 되는 것이 바로 중독이다. 사람이 가진 탐욕과 중독은 이런 면에서 거의 같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원래 있어야 할 하나님의 영역에 성령 하나님이 임재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난다. 그래야만 중독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해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영이 살아나게 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로 수많은 청년과 청소년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더욱 중독을 일으키게 된다. 한국의 자살 통계가 점점 높아지는 이유는 이런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인터넷과 스마트 중독에서 가장 중요한 치료제 일 수밖에 없다.
질문) 성경에 군대 귀신에 잡혀 있는 사람의 상태는 어떻게 될 까?
신약 성경에 군대 귀신 걸린 사람이 나와 있다. 이런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예수님께서는 군대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어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하셨다. 이렇게 청소년과 청년들의 스마트폰 중독은 군대 귀신에 걸린 사람 같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매일 스마트 폰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불 특정 다수 군대 귀신같은 악한 영향을 받는다.
이 악한 영향으로 자기도 모르게 심각한 중독 증세가 생긴다. 이 중독 중세는 악한 영향으로 스마트 폰에 있는 게임이나 중독성 있는 수 많은 컨텐츠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어 포르노 사이트에 중독되면 세상의 이성을 보는 눈이 이상해진다. 원래 남녀의 모습을 하나님이 창조하였는데 포르노에 중독된 아이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포르노에 나와 있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이런 중독 문제가 생기는 것도 모른 채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스마트 폰과 인터넷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세상의 모든 악한 기운에 영혼이 파괴하고 되어 간다. 심지어 자살까지 한다. 수많은 포르노 사이트, 게임 사이트등 이런 중독을 걸리는 SNS까지 군대 같은 형태로 청년 한 사람, 청소년 한 사람을 중독을 시키게 하는 것이다.
결국 청소년과 청년들이 이때 군대 귀신 들린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사탄의 하수 귀신에 의해 통제 당한다. 이 모습이 바로 스마트 폰과 인터넷 중독인 것이다. 수 백만수천만이 스마트 폰 인터넷 중독으로 걸린 것은 아마도 군대 귀신이 걸린 것 같다. 만약 아이들에게 스마트폰과 인터넷 사이트 중독이 걸리었다면 그 아이에게 군대 귀신이 들어간 상태처럼 된다. 군대 귀신이 하라는 대로 하고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끌고 간다. 바로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스마트 폰 중독이 있다면 바로 군대 귀신에 걸린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의 중독이 아니라 여러 개의 중독이 동시에 같이 걸린 것이다. 아이들은 스마트 폰에서 수많은 게임과 수많은 채팅 떼어 놀 수 없는 많은 유혹들이 마치 군대처럼 달려 붙어 있는 것이다.
군대 귀신은 사람의 힘으로 떼어내기가 힘들다. 예수님께서 오셔야 된다. 예수님을 만나야지 군대 귀신이 떨어진다. 스마트폰에 수많은 군대가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이런 현상은 단지 청소년과 청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만나야 스마트 폰 중독이 떨어진다. 이런 모든 과정을 교회에서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룩 공 교회와 성도가 교제하는 하는 것을 믿는 다면 교회는 이런 군대 귀신을 몰아내는 본부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머리인 교회가 머리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있어 가라고 하는데도 교회는 몸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스마트폰에 있는 군대 귀신이 물러날 리 없다. 머리이신 예수님이 안타가 워 하신다. 수많은 스마트 폰에 중독된 사람들이 자기는 군대 귀신에 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교회 공동체를 나가고 예배를 본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몸인 교회가 모르니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답답하게 느끼실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 공동체는 스마트 폰의 중독에 대한 실질적인 피해를 알고 대항해야 한다. 사탄은 작은 구멍이라도 누룩을 널려고 한다. 교회 공동체가 이런 누룩을 퍼트리고 중독에 묻히면 빛과 소금이 될 리가 없다. 지금은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하나님의 공 교회를 스마트 폰 중독으로 가고 있는 세상에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가 할 일이다.
질문) 어떤 사람들이 청소년과 청년의 중독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가?
누가 복음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스마트 폰과 인터넷의 중독증에 걸리었다. 그것조차도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돈을 버는 세리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그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장하여 정상적으로 일을 못하고 중독에 다시 빠진다는 것이다. 청년이 성장하여 그 수익으로 생활을 하던 사람이 매일 게임중독에 빠져 벌은 돈으로 게임머니를 구매하게 경제적 파산에 이르게 한다. 신문에 어린아이가 부모의 스마트 폰으로 천만 원 정도의 게임 머니를 구매한 적이 있다고 나와 있다. 어떻게 스마트 폰과 인터넷에서 이런 형태로 통해 돈을 버는지 알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죄인을 찾아오셨듯이 만약 지금 오신다면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는 죄인과 이를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삭개오를 보면 알 수 있다. 세리장인 삭개오는 죄인 중에 우두머리 죄인이었다. 로마의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 중에 우두머리였다. 그런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시 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삭개오 보고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의 집에서 묵으시었다. 지금 이 세대에 죄악 속에 있는 세리들은 인터넷에서 돈을 착취하는 사람들이다. 그 당시 로마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지금의 광대한 제국은 인터넷이다. 이렇듯 이 시대에 삭개오 같은 죄인은 중독 증세를 일으키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돈을 벌거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청소년과 청년의 영혼을 파괴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실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중독 증세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삭개오를 찾아오는 예수님처럼 찾아오실 것이다. 그러려면 예수님을 찾아 뽕나무를 올라가야 한다. 많은 어른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구하여한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런 회개하는 마음으로 뽕나무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찾아온다.
이제 많은 부모님들이 알아야 한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수많은 스마트폰 중독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의 많은 부모님들조차 자기 아이들이 스마트폰 중독에 걸린 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을 중독으로 방치하면 그들의 영혼은 군대 귀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옥으로 끌려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군대 귀신에 걸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올 때 예수님은 험난한 여정으로 찾아오셨다. 갈릴리 호수에 태풍을 잠잠하게 하고 오시었다. 오직 한 사람 군대 귀신에 걸린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서 그를 너무 불쌍히 여기어 그 사람에게 향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스마트폰 중독이나 인터넷 중독에 걸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그런 환경을 조성한 죄인 같은 어른들에게도 찾아오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복음의 원리를 알고 중독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질문) 어떻게 하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스마트 폰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그런 죄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전달해야 한다. 모든 스마트폰과 인터넷 중독 걸리게 한 죄인들에게 예수님의 대한 복음의 열정이 뽕나무로 올라가게 한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였다. 이런 삭개오가 회개하고 소득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불의한 착취를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회개한 삭개오 같이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통해 사람들을 복음으로 청소년과 청년을 구원하고 소통해야 한다. 구원받고 회개한 어른들이 스마트 폰 중독에 걸린 아이들을 긍휼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며 성령이 통하는 진정한 인터넷의 구원과 복음의 사역자가 될 수가 있다.
하나님은 부모님들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하여 회개한 삭개오 같은 사람들과 연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마치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사람, 맹인이나 문둥병이나 신체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지시고 치료하였다.
이와 마찬 가지로 예수님의 터치가 스마트 폰에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을 아이들에게 전할 때 스마트 폰을 통해서 전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통한 예수님의 복음으로 만지시게 하라 하신다. 그래서 군대 귀신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떼어내라고 하신다. 오직 예수님만을 전달하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만들어 자정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인터넷 네트워크에 구원과 복음 운동을 전달해야 한다.
이 운동의 첫 번째는 목표는 잃어버린 양처럼 바로 자살하려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구하는 것이다. 자살을 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스마트 폰 중독이나 그 영향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군대 귀신을 예수님께서 돼지들에게 몰아내셨다. 그 돼지들은 모두 다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다. 문제는 돼지들이 낭떠러지에 죽었는데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달라고 하였다.
지금 이 시대는 이런 상황에 빠져 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라 하는 사람들이 천지에 있다. 지금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해 스마트 폰 중독에 걸리게 한 군대 귀신들을 몰아내야 하는 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벌면서 청소년 들의 영혼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으로 군대 귀신의 중독들을 돼지들에게 쫓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스마트 폰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달되어야 한다. 스마트폰에 예수님의 복음을 보내면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스마트 폰 중독 증세를 가지고 있다면 오직 치료 방법은 복음 밖에 없다.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섭리인 예수님의 말씀을 스마트 폰에 넣어서 악한 영을 몰아내게 해야 한다. 그래야 만 그 안에 있는 군대 귀신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어 죽게 된다.
복음이 들어가게 하기 위해 작은 습관을 만들면 된다. 아이들과 스마트 폰 없이 직접 보고 문답하는 대화의 시간을 매일 10분 정도 가지면 된다. 작은 물줄기가 바위를 뚫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루에 10 분씩이라도 스마트폰 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감성을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어떤 주제도 상관없다. 그러면서 인생의 질문이나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를 부모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하루에 10분만 가지자고 하면 된다.
특히 전도 책 시리즈에서 영혼의 질문에 관련된 문답서 책을 같이 공유하면서 서로 질문과 응답으로 대화를 나누어 가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가진 영혼의 고민과 질문의 답을 성경에서 부모님과 같이 찾아보면 점점 더 부모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중에는 시간을 좀 더 할애해도 상관없다. 매일 하다 보면 점 더 많은 시간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서 같이 일반 보드 게임이나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통해 아이들과 소통을 재미있게 하면 좀 더 친화 적이 된다.
서로 간에 점점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되고 부모님들과 같이 성경을 읽고 서로 대화를 하도록 유도하면 된다. 특히 부모님이 성경을 읽는 시간에 아이들의 스마트폰으로 녹음하게 한다. 그렇게 아이들이 부모님이 읽어준 성경 내용을 매일 듣도록 유도하면 된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 통독과 복음에 대해 진지하게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성령의 관점과 관계 원리에 대해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알려야 한다. 바로 이런 시간이 가정 예배가 된다. 가정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가정 예배이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에 대하여서는 다른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질문 나눔) 만약 예수님이 스마트 폰의 중독을 어떻게 비유하셨을 까?
그 다음으로 부모님들은 스마트 폰 중독 문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부모님들이나 성경 교사들이 스마트 폰 중독이 어떤 영적인 문제를 일으키는지 모르면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적으로 스마트폰을 예수님이 어떻게 비유하시었을 까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이 책을 썼다. 스마트폰 중독을 어떻게 해결하라 하시는지 예수님의 여러 가지 관점으로 적어 보았다. 예수님의 복음과 연결되면 청소년과 청년들의 스마트 폰 중독은 치료가 가능하다. 스마트 폰에 있는 악한 군대 귀신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서 중독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으로 이들에게 복음을 심고 의를 심어서 구원해야 한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성경을 읽고 듣게 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듣는 시간은 중독된 시간에서 빠진다. 점점 물이 바위를 뚫고 나가 듯이 10분에서 20분으로 늘려 성경을 읽고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접속하게 하는 지 알려야 한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몸체인 교회가 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교회는 청소년과 청년 복음화 율이 3%도 안 된다고 한탄만 한다. 그러면서 교회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제일 많이 접하는 스마트 폰과 인터넷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쓰지 말라고 한다.
질문) 교회는 스마트 폰 중독을 이기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가?
아이들의 문화와 생활로 잡힌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넣어야 한다. 그 메세지는 강력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데 바로 정체성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이들이 정체성을 안다면 분명히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하는 지와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알게 될 것이다. 정체성은 아주 중요하다. 스마트 폰 중독이 무엇인지 구분하게 되는 것도 그 정체성을 살리는 것에 교회를 중심으로 부모님들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세상에 보내진 자로써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또 한 교회가 복음 적인 방법으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써서 다음 세대에 창의적인 방법을 살려 줘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중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스마트 폰을 써서 선교와 전도가 살아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중독의 특징이 창조적 성향이 없이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것인데 교회가 스마프 폰을 통해 창조적인 일을 한다면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 프로젝트를 주어서 영상을 만들고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질문과 답으로 스마트 폰을 쓰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매일 성경적 복음일기를 쓰게 하면 그것이 창조적이기 때문에 중독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스마트 폰에 중독된 아이들을 방치하고 복음을 전달하지 않으면 거대한 세상 풍조가 스마프 폰을 통해 들어 온다. 그렇게 되면 영국처럼 선교지로 파송하는 선교의 본거지가 이젠 선교를 받아야 하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 이렇게 이 세대가 지나가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유럽의 교회처럼 될 수도 있다. 한국의 교회가 다음 세 대를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 이들이 없는 교회가 카페, 술집, 무슬림 사원이 되는 것은 안 봐도 뻔한 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지금도 점점 그런 모습이 한국 교회에 나타나고 있다. 전 세계 선교사를 두 번째 많이 보냈던 한국 교회에 청소년과 청년 부 예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소수의 노년층만 나오는 영국 교회가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변했을 것이다. 지금 영국에는 샤머니즘을 믿는 사람과 주술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한탄하고 계실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의 확신을 어떻게 하든지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넣어 전달하고 다음 세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나서야 할 책임이 있다. 지금 이 세대에 제일 많이 보고 있는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정작 교회는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전달할 생각을 못한다. 마치 중세 시대의 교회가 성경을 금지시켜서 암흑시대가 온 것처럼 된다는 것이다. 인쇄술로 인하여 성경이 대중에게 인쇄되고 배포되었을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스마트 폰에 있는 채팅과 성인 앱이나 게임 앱을 통해 죄를 짓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죄성이 가득한 인간의 욕구를 통해 내면에서 죄가 꼬리를 물게 만든다. 마치 사람을 가상공간에 칼로 죽이고 총으로 죽이는 게임 공간에서 쉽게 한다. 청소년과 청년의 본성인 욕심을 따라 전쟁하고 땅을 차지하게 만든다. 또 어떤 앱은 자극적인 언어로 여인들의 반 나체 사진으로 사람들에게 간음을 하게 한다. 여기에다 수많은 인터넷의 매체를 보면 도저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사진이나 기사를 내보고 있다. 점점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그런 사건을 그대로 내보내고 있다. 거기에 간음 살인 등의 매일 기사의 헤드라인에 나타나고 있다. 댓글은 더욱 심하여 거의 욕하는 수준에 이른다. 실제로 이런 인터넷 댓글과 기사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는 마음만을 가진 것도 죄라고 하시었다. 마찬가지로 형제에게 욕을 하여도 사람을 죽이는 마음을 가진 것처럼 죄라고 하시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죄 유대인의 율법보다 더 크다.
이렇게 죄가 아무렇지 않게 육과 만나 그 청소년과 청년의 영혼을 오염시킨다. 수많은 군대 귀신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무방비로 유혹하도록 되어 있다. 필자를 포함한 믿는 사람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는 영은 바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스마트 폰에 있는 군대 귀신을 몰아내고 회개하는 영으로 회복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모든 죄에 길에서 회개와 용서 사랑으로 회복시킬 것이다. 이것 또한 교회가 나서서 해야 한다.
질문) 인터넷 게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누가 복음 13: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분명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다는 천국의 원리를 말씀하시었다. 이 천국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에서 예수님께서는 전 혀 다른 기준을 제시하신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섬기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는 것까지 하시었다. 낮아지는 기준이 천국에서는 높여지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시었다.
그러나 세상은 높아지는 결과로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되고 높아지는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을 세상에 퍼트리고 있다. 어떤 부모는 성적을 석차와 점수로 아이들을 평가한다. 사람을 평가할 때 숫자와 양 그리고 순위가 높거나 먼저 된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몇 평에 사는지 몇 등을 하는지 몇 배기량의 차를 가지고 몇 억의 돈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것들이 세상의 기준이다. 사람이 가진 숫자와 결과로 평가한다. 여기에 천국의 기준은 없다.
이것을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조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의 값어치를 땅에 떨어 드린다. 너는 몇 등 밖에 못해 너는 점수가 낮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라고 사탄은 자기를 정죄하도록 조정한다. 사탄과 세상은 먼저 된 것이 먼저 된다고 이야기한다. 나중 된 사람 즉 순위에서 벗어난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조정한다.
그런데 이런 순위와 숫자를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매일 연습을 시키는 곳이 있다. 바로 인터넷 게임과 스마트폰 게임이다. 게임을 보면 우선 레벨 순위가 중요하고 땅을 차지하고 몇 개의 무기가 있고 아이템이 있는지 가 중요하다. 그래서 게임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일등 하려고 수많은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인터넷 게임 중독인 것이다. 사탄은 이런 게임을 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너무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심지어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은 실생활에서도 똑 같이 성적순으로 레벨 순으로 평가한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결과인 성적이 몇 점과 몇 등으로 청소년과 청년을 평가한다. 청소년과 청년 자신도 등수로 자기를 평가하고 있다. 성적이 떨어지면 극도 한 성적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까지 가능 경우가 있다.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의 생각에는 성적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이 ‘이것밖에 안돼서 세상을 살아가도 안될 거야’ 하고 자포자기한다. 실제로 많은 성인이 되고 나면 정말 공부 성적은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영향을 주지 않게 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적의 스트레스에 자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터넷 게임과 스마트 폰 게임인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재미있는 게임에 일등 하려고 열중한다. 인터넷 게임으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무가치하게 성적순으로 평가하는 이 세상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게임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매년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결과로 말하는 사회 기준에 의해 인터넷으로 게임 사이트에서 안정을 찾고 싶어 매일 중독되어 간다.
질문) 스마트폰 메신저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필자는 한국의 청소년과 청년 자살률에 대해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심지어 자살 사이트까지 생겨 어떤 방법으로 자살을 하면 좋은 지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매년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정상적인 사회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처럼 그들의 대화는 비정상적으로 변한다. 인터넷으로 대화하고 스마트 폰 메신저로 욕하고 게임 사이트에 중독되어 간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인터넷 게임 사이트에서 매일 칼과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한다. 매일 총으로 사람이나 괴물을 죽이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과연 무엇을 본받을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무엇을 말하는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영혼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그대로 거두게 된다. 이런 중독으로 인해 수면 부족, 식사 등을 못해 제대로 영적인 믿음의 생활을 못한다. 영과 육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결국 청소년과 청년들은 우울증이나 심한 대인 기피증 같은 것이 중독증에 걸린 청소년과 청년들 한 테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발전되면 실제 대인 관계나 사회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 만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결국은 외톨이가 되어 사회적 반항아가 되든 지 자살을 하든 지 파국으로 치닫는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항상 스마트 폰 메신저로 중독이 심하다는 것이다. 항상 생활하면서 메신저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에 있고 응답을 준비하고 있다. 또 청소년과 청년들은 메신저로 문자를 보내고 상대방이 읽지 않거나 답이 없으면 불안정한 증세를 가진다. 메신저 내용을 읽었다는 표시가 있는데 답을 주지 않는 상황을 당황해 한다. 사람들이 메신저를 읽고 답을 주지 않는 상황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한다. 심지어 대인 관계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하며 자책까지 한다. 실상은 상대방이 바빠서 읽고 답장을 안 했을 뿐인데 이런 오해들이 쌓여서 서로 싸우고 감정이 폭발하고 다투기까지 한다. 지금 한국의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런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메신저로 왕따를 당하는 경우까지 생기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의 이면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메신저로 누군가가 메일 내가 쓴 글을 읽어 주고 봐주며 응답을 달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마음이 안정된다. 이것은 심각한 메신저 중독이다.
질문) 스마트 폰 중독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이 자살이 증가하는데 당신의 자녀는 어떠한가?
더욱 심한 것은 이런 안정감을 찾기 위해 매일매일 컴퓨터에 앉아 다른 게임 하거나 성인 포르노 사이트를 보는 것이 마음에 안정되는 증세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마트폰 중독증 증세이다. 그들의 생활은 중독 증세로 파괴되고 수면 부족으로 점점 정신 건강이 파괴되어 간다. 이렇게 되면 수면 부족으로 정신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 수면 부족 등이 계속되면 정신 건강에 해가 되어 우울증 등을 일이 키는 것이다. 이 우울증이 심하게 되면 결국 자살로 이른다.
왜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최고로 증가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한 해에 자살하여 죽은 청소년과 청년의 숫자가 베트남에 파병되어 아깝게 죽어 간 젊은 병사들의 숫자보다 많다는 것이 과연 믿기어 지는지 묻고 싶다. 영적인 전쟁에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영적인 전쟁을 이길 수 있는지 우리 기성세대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뭉쳐서 맞서야 한다. 사탄과 맞서서 싸워야 한다. 사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공격 목표가 바로 자살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탄이 인터넷을 이용하여 수많은 젊은 생명을 자살로 몰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청소년과 청년의 자살을 막아 야 한다. 한 마리의 길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 아흔아홉 마리 양을 인도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다고 하신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죄인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예수님을 더욱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은 길이 없어서 희망이 없어서 자살을 선택하려고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한 명이라도 더 자살하려는 청소년과 청년을 구하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더욱 시급하다. 지금 이 시대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아니다. 수백만 명 수천만의 양이 길을 잃고 인터넷을 헤매며 중독으로 영혼을 파괴되고 있으면 그 중에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언제 가는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로 마감할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소년과 청년의 자살 문제가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수많은 죄인을 구하고 자살을 하지 못하게 인터넷을 구원의 복음의 도구로 써야 한다. 교회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삭개오처럼 예수님의 찾는 죄인들에게 부어 주어야 한다. 교회가 사탄의 공격에서 무너지고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구원의 방주로 초대해야 한다.
구원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성경 교사와 부모님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심어 주어 군대 귀신을 물리치게 해야 한다. 스마트폰에 있는 군대 귀신들은 세상에 대한 우상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는 세상의 우상이 너무 많다. 수많은 다음 세대들이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거나 유혹에 빠져 습관적으로 메신저, 성인 사이트나 게임 사이트를 들어가서 그들만의 우상을 만들어 간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없는 세상은 재미가 없는 것처럼 되어가지만 결국 그것은 우상 같은 것에 빠지는 것이다.
질문) 인터넷 댓글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인터넷 웹사이트는 공유 개념을 이야기한다. 하나의 웹사이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정보를 쓰고 정보를 읽는 것이 공유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진정한 공유의 개념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인터넷 포탈을 생각해보자. 여기에 댓글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된다. 사람들은 포탈에 어떤 인터넷 신문이 보기 위해 접속하여 그 사람들이 올린 블로그와 검색 정보 내용을 보는 것이지만 수십 만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올린 글을 읽고 수정하면서 전부 관리할 수는 없다. 결국 관리자는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이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사용자 관리와 웹 사이트의 불 건전한 언어 사용의 관리를 이루더라도 심각한 댓글을 올린 인터넷 사이트는 한계를 보이게 된다. 지금 어느 신문 인터넷 사이트나 포털을 보고 라도 욕이 댓글이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매일 친구들과 놀기 위해 또는 다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카페에 나가는 데 매일 술 취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상대방과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욕하면서 대화에 끼어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대화를 하게 되고 욕을 들으며 원하지 않는 내용의 이야기들을 서로 해간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카페에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이야기 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며 담배와 술을 먹으면서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만나는 곳에서 모든 정제되지 않은 대화와 자기도 모르게 담배와 술을 먹으면서 욕을 하면서 서로 대화를 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공유하는 정보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댓글이 이런 것이란 것을 잘 모른다. 댓글 때문에 마음이 아파하는 사람들은 댓글이 시장 판에 놓인 수많은 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댓글이 초등학생이 적은 글이란 것 알 수가 없다. 마치 초등학생이 적은 욕이 세상이 나한테 전부 욕한 것처럼 느끼었다면 결국 세상의 인정을 우상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상의 우상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인터넷 댓글로 같은 것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한 가지 개인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이는 보다 다양한 문화를 개방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다. 이 모든 종교가 동등하며 다원주의 적인 풍조에 휩싸여 심각한 죄의 문화가 인터넷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다. 다양한 것을 인정하는 이런 문화 때문에 예수님 만을 복음으로 믿고 길이요 진리라고 하는 교회가 조롱 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인터넷 댓글은 이미 사회적으로 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아이들이 이 조롱하는 문화에 인터넷으로 댓 글을 단다는 것이다. 작금의 스마트 폰 시대는 Social Network가 더욱 발달하여 교회를 조롱하고 댓글을 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댓 글을 다는 인터넷의 SNS 참여 문화는 web 2.0이 나오면서 UCC, 댓 글과 블로그를 통한 인신공격, 조롱 또는 기존의 독설보다 더 심한 루머 등으로 인터넷은 심각한 공황의 상태에 빠져 있다.
질문) 인터넷 댓글로 교회가 조롱을 받는 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여기에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연예인들이 인터넷의 댓글 때문에 자살을 하고 더욱이 바스테르의 효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방 자살을 한다. 이런 자살을 하는 연예인들이 교회의 신자이며 성도 라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교회 사역 자들이 죄를 짓는 경우에는 말도 못 하는 댓글이 달리고 조롱을 받는다. 사탄은 포스트 모더니즘 문화를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조롱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마지막 때인 다음 세대는 예수님만을 믿는 사람들이 조롱 받는 시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판단하신다. 완전한 인간은 없듯이 모두 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인간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 긍휼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에서 용서를 받는 다. 사람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이 대가를 치루신 것 때문에 우리는 죄의 정죄에서 벗어나 부활하게 된다. 이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전달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 모든 이들이게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를 조롱하는 청소년과 청년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자라나서 예수님이 영적인 사람으로 씨를 뿌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 문제는 우리 교회가 조롱하는 어린아이들을 놔두면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엘리사를 조롱하던 아이들과 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다가 죽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열왕기하 2:23~25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그 당시 북 이스라엘 왕은 남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알면서 정치적으로 남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벧엘이라는 도시를 만들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단을 쌓고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하나님의 뜻을 접어버린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런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원 함과 살아 있음을 몰랐다. 당연히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선지자도 모르게 되었다. 그때 아이들은 스승 엘리야와 함께 갔던 엘리사가 혼자 가는 것을 보았다. 그전에 엘리사는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와 같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홀연히 불가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후에 혼자 가는 엘리사를 보고 조롱하였다. 혼자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조롱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조롱하는 것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임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결국 그 아이들은 하나님과 대적한 것이다. 아이들이 사십 명이 죽었다는 것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것도 잔인한 방법으로 곰에게 찢기어 죽었다. 이 불쌍한 아이들이 죽은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물어보고 싶다. 바로 벧엘에 사는 이 아이들의 부모와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그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했었다. 선지자가 왜 이 도시에 왔는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찬 가지로 지금의 전 세계의 모든 아이들이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무방비로 놓여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기성세대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무방비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풀어놓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 청소년과 청년들은 자기 어떤 것을 하는지도 모른 채 댓글을 달고 있다. 교회를 조롱하며 남들에게 욕하고 어른들조차도 자기 의견이나 가짜 뉴스를 생산하여 마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퍼트려서 새로운 인터넷 문화에 빠져 가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아이들이 보는 관점의 세계를 전혀 관심도 없이 막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이에 수많은 아이들이 스마트폰과 인터넷 중독증에 걸려 영혼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자살로 죽어 가고 영혼을 구할 교회를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조롱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지옥으로 가는 것은 불쌍한 아이들이 곰에게 찢기어 죽어 간 것보다 더 처참하게 죽어 가고 있다. 많은 부모님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영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영혼이 사탄의 손아귀에서 종 노릇하고 있음을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어둠 속에 있다. 이제 청소년과 청년 들게 영혼의 양식을 먹여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해야 한다. 영적 백신을 주어야 한다. 오직 스마트폰 중독을 이기는 방법은 영적인 문제이므로 영적 복음인 영적 백신 밖에 없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으면 영적인 문제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될 리가 없다. 설사 해결되더라도 그것은 미봉책일 수 있다. 스마트폰의 중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 에게 유혹하는 사탄의 계략이다. 그 계략은 오직 영적 백신 복음으로 만 이길 수 있다. 성경의 창세기는 이미 그 사탄의 머리를 밟고 있는 메시아 예수님을 선언하고 있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영적 양식과 영적 백신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스마트폰 중독에서 스스로 이겨내게 할 것이다.
이사야 23:1-4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 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에스겔 26:12 네 재물을 빼앗을 것이며 네가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을 헐 것이며 네가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릴 것이며 또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
신명기 33:18-19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우상의 나라 시돈과 두로의 땅에 대한 이사야와 에스겔 예언이 나온다. 그 땅은 악녀 이사벨의 고향으로 바알의 우상을 섬기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이사벨은 바알 우상을 북 이스라엘 전체로 흘러가게 했고 이사벨의 딸은 남 유다에게 바알 우상을 전하였다. 유다 또한 바알 우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결국 시돈과 두로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망하게 했던 최초의 우상의 땅이 된 것이다. 성경에서 이 지역이 이사야 서에 예언이 되었는 데 특이하게 망한 이유가 나온다. 시돈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이루면서 다음 세대의 청년들을 양육하지 못하였고 그 이유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슬피 부르짖을 것이라 예언한 것이다. 결국 이사야의 예언대로 두로 지역과 시돈 지역은 하나님의 처참한 징벌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시돈과 두로의 땅처럼 사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복음을 지금 세대는 다음 세대의 청년들에게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최후는 어떠할 까 적용하면서 알아보려 한다. 결국 위의 성경 구절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시돈부터 우상의 흐름이 있었다. 원래 그 땅은 노아의 손자 가나안의 장남 시돈이 정착한 땅이었다. 시돈은 사람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시돈은 노아에게 저주를 받은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장손이다. 구약은 보통 이 시돈을 페니키아라고 부르고 여러 도시를 구축하면서, 지중해를 넘나든 해상무역국가 페니키아를 이루며 부를 얻었다.
성경은 결국 그들이 저주를 받은 이유를 적어 간다. 저주받은 함의 아들 가나안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시돈은 바벨탑이 무너진 후에 가나안 해변가에 정착한 것으로 예측된다. 세월이 흐른 후에 하나님은 가나안 민족의 죄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민족을 앞세워 징벌하시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인 스볼론 지파는 시돈의 땅에 있는 원래 가나안 사람들이 너무 견고 하여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스볼론은 기드론과 나할 롤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 둘의 행적을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아마 이 골짜기에 있었던 같다. 아셀은 악고, 시돈, 악십, 그리고 아빅을 취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을 무너지게 하는 작은 댐의 구멍처럼 되었다. 이는 모두 다 상업이 성행하여 그들을 취하지 않는 항구가 있는 지중해 근처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스볼론 지파는 우상의 뿌리를 제거하기 못하고 그들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문화에 섞이게 되었다.
모세는 시돈의 땅을 이스라엘 스불론 지파가 차지 한 땅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면서 모세는 스볼론 지파에게 그 땅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성경에 모세가 예언한 대로 스볼론 지파와 원래 땅에 살던 우상을 섬기던 시돈 사람들과 같이 부와 사치를 이루고 우상 문화에 섞이며 살았다. 시돈 사람들이 가진 기술은 바다에서 채취한 뿔 고동이나 해산물로부터 염료의 원료를 추출하였다. 당시 주변 나라에 왕족이나 부자들이 즐겨 입는 자색 옷이나 값비싼 옷을 팔아 막대한 부와 소득을 올렸다. 또한 시돈 해변에 널려 있는 모래에서 규석 성분이 많은 나와 유리 제품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제품을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제품이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녹여 비싼 값의 유리제품을 만들어 배로 수출함으로써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누렸다.
예레미야, 에스겔과 이사야의 예언의 경고가 나오는 유명한 두로라는 섬이 있다. 구약의 두로는 페니키아의 도시로서 흔히 시돈과 연관하여 언급되는 데 지중해 연안에 위치에 있으며 시돈의 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섬은 바다의 요새였다. 난공 불락의 요새였다. 한마디로 두로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도시였다. 시돈의 유리제품을 유럽이나 애굽에 팔고 애굽의 곡물을 다시 들여와 북 이스라엘에 팔아 막대한 부를 이룬 도시였다. 거기에다 섬이기 때문에 도저히 침략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런 곳이 13년간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 의미는 결국 물질을 추구하는 가치가 우상으로 변하면 결국 그 대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 후세에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나라까지 우상이 누룩처럼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바벨론 시대 이후 다음 세대의 시돈의 땅 두로는 알렉산더의 헬라 군대에 의해 제방을 쌓아서 완전히 함락되었다. 두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버티고 항전하였지만 마침내 둑길이 다 만들어지고 알렉산더의 헬라 군대에 의해 무너졌다.
이때 에스겔의 26장 12절의 예언 중에 있는 대로 헬라 군대의 의해 두로의 부서진 파편들을 물 가운데 던지고 방파제로 만들어졌다. 그때 3만 명은 포로로 끌려가고 2천여 명의 지도자들은 두 손을 묶인 채 목 베임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것을 미리 예언한 것이 바로 이사야서 23장과 에스겔의 26장이다. 이사야와 에스겔은 이미 몇 백 년 전에 시돈의 땅 두로가 황 무한 땅으로 변할 것이라 예언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곳이 섬이었지만 결국 제방을 쌓아 땅으로 되면서 배로 들어갈 곳도 없음을 미리 예언한 것이다.
더 심한 것은 이런 풍조를 이웃 나라와 이스라엘에 전하였다. 북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는 그의 아들과 페니키아 공주 이사벨과 결혼하는 관계가 있다. 이 공주가 엣 바알의 우상을 북이스라엘에게 들어오게 하였으며 그 결혼은 우상과 조약을 맺은 것 같았다. 북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의 조약은 또 한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부터 백향목을 해상 페니키아 인으로부터는 훌륭한 수입 상품을 얻어서 이스라엘이 부를 이루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이런 부를 포기 못하고 이사벨과 결혼시켜 좀 더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 출신 이사벨은 이런 풍조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북 이스라엘은 우상 문화에 젖은 시돈 왕족 이사벨을 북 이스라엘의 왕후로 삼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다. 아마도 값비싼 자색 옷을 수출하던 시돈 지방의 왕족이 당연히 북 이스라엘 왕족과 연결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런 연결이 치명적인 우상의 연결고리가 생기었다. 그 당시 북 이스라엘 오무리 왕조의 아합 왕은 시돈 지방의 왕족 이사벨과 결혼하면서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우상을 고스란히 이스라엘에게 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가던 이스라엘의 패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왕비 이사벨은 잔인하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다. 오죽하면 이사벨에게 쫓기던 선지자 엘리야가 자기만 하나님의 선지자로 남았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 대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물질과 풍요의 신으로 써 이스라엘 전역에 퍼지었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추락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더욱 마지막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였던 남 유다도 아합과 이사벨의 딸인 아달랴에 의해 처참하게 다윗의 자손들이 죽어갔다. 이사벨의 딸이 결국 남 유다에서 다윗의 왕족을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녀 자신이 여왕이 되어 남 유다의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이와 같이 남 유다에 바알과 아세라 신을 본격적으로 들여온 것도 시돈 이사벨의 영향이 너무나 컸다. 결국 남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할 때는 자식을 바알의 우상에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이 바로 누룩이 빵에 퍼지듯 온 이스라엘 땅에 퍼지게 됨을 경고하시고 예언까지 하시었다. 선택 받은 민족이라도 그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끌려가게 할 것이며 예루살렘을 찰 것이라 하였다.
이런 모든 것의 시작은 시돈과 두로의 땅 우상에서 부모들이 욕심으로 자녀를 돌보지 않고 살았던 것에서부터 유래가 된 것이다. 그 모든 이유가 이사야와 에스겔의 선지자의 예언에 나온다. 번영하고 부에 취한 이 섬의 도시는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산고를 겪지 않고 청년을 양육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다음 세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돈의 땅 두로 섬의 부모들은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물질적 가치관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관으로 잡혀 그들은 자녀들을 가르치지 않았거나 물질적인 가치가 최고인 것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 당시 시돈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부모님이 매일 어떻게 돈을 버는지에 열심히 기술만을 전수했을 것이다. 매일 애굽에서 곡물이 들어오고 유리제품 자색 옷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게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부모들은 경쟁하듯이 자식들에게 어떻게 능력 있게 매일 돈을 벌고 부하게 되는 것만을 생각했고 가르쳤을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자란 다음 세대는 물질적인 가치관에 사로 잡혀 부모가 해야 될 자녀들 더 낳지 않았을 것이다. 자녀를 낳게 되면 물질적인 풍요에서 멀어지는 것을 걱정했을 것이며 심지어 그들은 자기에게 있는 자녀들을 돌볼 겨를 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린 다음 세대가 어떤 악행을 저지를지는 자명한 일이다. 마침내 그들은 바알을 섬기면서 자녀를 재물로 바치어서 자기의 부가 바알 신에서 나오게 한 것 믿게 되었다.
두로와 시돈의 세대들이 처한 상황과 지금의 한국 세대와 너무나 똑같다. 많은 부모들이 풍요가 가져오는 것 만을 쫓아 진정한 생명인 예수님의 복음을 영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도 똑 같이 세상적인 부를 쫓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바로 많은 부모들이 똑 같이 시돈과 두로의 부모처럼 물질만을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바라보는 세상은 부모들과 똑 같이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찾아 불나방처럼 살다가 사라지고 있다. 많은 청년들이 이런 부모를 쫓아가고 물질만능으로 치닫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회 내에 지배적인 시조가 되어있는 배금사상, 샤머니즘, 영웅주의 등 한국교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돈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수가 많게 하고 여기서 모인 돈만 있으면 교회 건물도 크게 지을 수도 있고 선교사도 많이 보낼 수 있으므로 돈은 목회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일부 목회자들 사이에 퍼져 있다.
또한 한국의 청년 세대들은 아이를 하나 낳거나 낳지 않고 있는 세대로 가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인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을 지키지 않고 있다. 기성세대가 가진 물질주의 적 교육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멀리하고 있다. 가정을 갖는 것보다 돈이 우선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부끄러워해라 라고 꾸짖는다. 세상의 욕심으로 부모들이 바쁘게 살면서 청소년과 청년들을 영적으로 양육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의 경고와 꾸짖음을 받게 된다. 필자를 포함한 모든 부모들은 부끄러워야 한다. 지금의 청소년과 청년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이 시돈과 두로의 예언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을 통해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 믿음의 선배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한다. 그는 매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길을 걸어갔다. 아브라함이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온 생애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명하시며 아브라함을 지키시며 상주시는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말씀도 배우고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물질적 가치관이 세상을 지배할 때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세상적 가치관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육적인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청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결코 시돈과 두로의 청년들처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복음에 모든 가치를 부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청년들이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 주시는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의가 되고 율법으로서는 사람이 잡지 못할 의로운 것을 하나님이 직접 드러내신 것이다. 그런 사랑이 물질적 가치에 의해 희석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시돈과 두로는 물질적으로 성공하였고 난공불락의 성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삶은 지금 현재에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다. 세상의 귀한 것들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오고 가며 무역을 하고 돈을 벌고 하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는 것인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썩어질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자체가 죄이다. 물질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하나님이 모드 것을 공급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 삶에서 오직 우린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구원의 자유를 느끼고 다음 세대인 청년들을 기르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질문) 당신의 아이들을 디지털 세상에 방치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많은 부모들이 세상의 가치 기준인 썩어질 것에 두고 모든 것을 부모의 욕심대로 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욕심과 목표를 가지고 청소년과 청년들을 과외에 맡기고 학교에 맡긴다. 어른들은 가정에서 당연히 믿음을 전수해야 할 일을 학교와 교회에서 다 알아서 주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고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지 않고 청소년과 청년들을 방치하고 있다. 이렇게 방치된 청소년과 청년들은 자기 안에 영적인 갈급 함으로 인터넷에서 환상을 쫓고 스마트 폰과 게임과 포르노 사이트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 이런 결과를 낳은 이유는 부모님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을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방치하고 살게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모들이 그것쯤이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디지털의 도구들은 한번 길을 들으면 계속 자기를 주목해달라고 요구하는 애 같이 변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스마트폰에 떼지 못하고 전철이나 길거리를 다니고 있다. 이런 중독에 가장 취약한 청소년과 청년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에 걸려 방치되고 살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온갖 혐오스런 정보들에 중독되어 방치되어 살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의해 천국이 아닌 지옥을 느끼며 살고 있다.
질문)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로 게임을 매일 12 시간 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어린 나이에 매일 몇 시간씩 포르노 사이트를 들어가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스마트 폰에는 청소년과 청년들뿐만 아니라 많은 성인들도 중독으로 몰아가는 요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는 이것들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아직도 인성이나 가치관이 정립이 안되었을 때 이런 무분별한 인터넷과 게임, 포르노 사이트에서 노출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게임 사이트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거의 사실적 수준으로 피가 튀기면서 죽는다. 이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사람이 죽는 것이 마치 개미가 죽는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미국에서 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많이 일어난 경우를 보면 대부분이 그러한 게임 사이트에 중독된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람의 뇌는 환상과 현실을 구분 못한다고 한다. 게임을 통해 심어진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환상이 현실이 되어도 청소년과 청년들의 뇌에선 구분을 못하게 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또한 게임의 영향으로 자극적인 영상에 노출되어 현실과 게임 영상을 구분 못할 수도 있다. 또 게임사이트는 등수와 능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정보들이 많다. 성적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은 점점 더 게임 사이트에 중독된다. 성적으로는 이루지 못할 것을 게임의 등수가 좋아지려는 그런 보상 심리로 엄청난 돈을 들여 게임 아이템을 구매한다. 이렇게 게임의 등수와 성적으로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 게임 성적이 좋아 레벨이 올라가면 다른 낮은 레벨에 있는 사람들은 처다 보지도 않는다. 오직 높은 레벨로 올라가기를 바라고 중독되어 간다. 어처구니없는 이런 실상을 이 세상에 모든 청소년과 청년들이 환경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런 중독된 청소년과 청년들은 가장 무서운 것이 자살이다. 그 자살의 시작은 바로 스스로를 정죄하고 살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중독되었을 때 중독이 주는 마지막 자괴감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한다.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적 문제, 관계 문제, 중독 문제를 가지고 자살을 하려고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살 희망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어른들의 책임이다. 부모의 책임이다. 삶의 단 한순간이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의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를 주어야 한다. 어른들과 부모님들은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 있다는 영적인 것을 가르쳐야 한다.
질문) 청소년과 청년들을 키우는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지금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 돌아오게 한 것처럼 세상 어른들과 부모님들에게 경고를 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외모와 능력 등수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청소년과 청년들은 하나님의 평등한 사랑을 모른다. 부모님들이 그들을 평등하지 못한 세상으로 몰고 가고 있다. 결국 청소년과 청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외모와 공부 등수, 능력으로 세상의 척도를 생각하며 산다. 점점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자기 외모와 능력 공부 등으로 세상을 한탄하면서 자살까지 생각한다.
그 청소년과 청년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부모님이 할 일이다. 하나님의 존재적 형상이 청소년과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주시었는데 그것을 청소년과 청년들이 모르면 얼마나 처량한 가?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받은 것은 생각지 않고 보지 않으며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많은 사람들이 탕자처럼 세상의 것에 아버지 하나님의 자원을 미리 받아 낭비하고 결국 세상의 오물인 쥐어 열매를 먹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피를 우리 모든 삶의 계좌에 넣어 주시면서 용서의 은혜를 주시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청소년과 청년들은 모르고 어른들 또한 하나님의 뜻도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아버지 하나님에게 오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너무나 많은 것을 사랑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라신다. 그저 값없는 것처럼 은혜를 받고 그저 무의미하게 살아가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혹시 부모님에게 자녀들은 여러분의 삶에서 무슨 의미한 지 물어보고 싶다.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를 키우면서 공감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자녀를 주셨다. 그 사랑의 은혜를 받고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모르고 마치 그것이 당연히 나의 소유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부모님이 아이들을 때리고 있는데 그것을 말리는 분한테 “ 내 새끼를 내가 때리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하고 “ 말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소유이고 은혜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을 은혜로 키우고 내 사랑을 알아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그 마음을 알게 하신다.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어떤 마음인지를 알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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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같은 팬데믹 이후에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펜데믹 시대에는 학교, 상점 등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마스크가 일상적으로 쓰고 살았다. 그러면서 재택 근무가 많이 이루어져 많은 직장인들이 집안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아 졌다. 코로나 이후 그 전 일상은 회복되었지만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두려워지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용기를 내야지 가능한 일이 되었다. 코로나가 끝나지 않고 전 세계를 계속 힘들게 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 이전에 사람들이 가졌던 자유로운 일상 생활은 사라지고 매일 치 소는 물가에 두려워하는 날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방송에는 전쟁과 지진이 일상화된 뉴스로 나오고 있다. 환경적인 문제는 이제 재앙으로 치닫고 있다. 사람들은 많은 뉴스와 소식들로 인해 일상 생활을 못하면서 두려움과 평안하지 못한 나날로 힘들어 하고 있다. 이젠 사람들이 점점 더 평범하였던 그 전에 일상이 그리워하고 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서 방황하고 있다. 많은 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보는 것이 일상 생활이 되었다. 청소년들 청년들이 복음을 접하는 것이 쉬어졌지만 관심은 인터넷과 스마트 폰, 게임, SNS 같은 것에 한눈이 팔려 있다. 많은 청소년, 청년들이 세대차이와 직업을 구하지 못하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방황하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 청소년 청년 또한 진화론 등 수많은 이념과 갈등으로 더욱 점점 힘들어 하고 있다. 여기에 더 많은 청년과 청소년들이 스마트 폰 중독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속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달해야 한다. 교회가 그전에 맞지 못한 수많은 고난을 겪어도 잊지 않은 것은 복음을 계속 전달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망을 두고 복음을 전달해야 한다. 복음은 육적인 문제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복음이 전달할려면 사람들의 이해 수준으로 복음이 전달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경험한 것을 복음으로 비유를 하면 이해하기 쉬어지는 것이다. 복음을 전달하는 과정을 마치 백신으로 비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치 코로나 같은 팬데믹 세상에서 효과를 본 것은 백신을 통한 정상적인 생활을 많은 사람이 경험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백신은 해로운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항체가 형성되게 하여 저항하고 치료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신의 원리는 해롭지 않은 바이러스를 사람의 몸에 넣어 아무 영향이 없게 한 다음 몸에는 항체를 형성시킨다. 그 항체로 해로운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바로 알아차려 저항하고 죽이게 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의 가장 최우선 과제는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수많은 나라에서 몇 백 개의 백신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임상 테스트를 하여 안전하다고 판단할 때 사람들에게 맞혀졌다. 이렇듯 백신은 안전성이 가장 큰 요소이다. 백신의 가장 큰 기능은 항체가 생성되었기 때문에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효과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맞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백신은 죽음으로 끌고 가고 있는 바이러스와 싸워서 생명으로 회복으로 변하게 한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육체적 치유의 백신보다 영적인 전인적 치유의 중요한 백신이 있다. 그것도 단순히 지금의 육체적 삶에서 살게 하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적 백신이 있다.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죄와 사망과 싸워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게 한다. 영적 백신의 복음은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만들었기 때문에 완전하며 안전하다. 불완전한 육체적인 백신이 아니라 완전하고 안전한 영적인 백신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영적 백신으로 사는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백신을 맞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복음이 가진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야 한다.
질문)영적 백신인 복음을 알리는 과정은 무엇인가?
이렇듯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복음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비유하고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이렇게 복음을 해석할 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교회로 부터 듣게 된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복음을 설명하지 않고 비유를 들어서 계속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그 사람들이 이해 하는 수준까지 기다려 준것이다. 예수님도 그 시대에 문화나 생활 속에 있는 여러 가지 비유의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해석해주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들은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로 성경의 복음을 번역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고 마치 예수님처럼 성경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물론 성경에 있는 비유로 가능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있는 것으로 비유를 한다면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기본 관점으로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새로운 복음의 비유를 새롭게 새창조하여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증거이고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하는 것이다. 또 한 말씀이신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고 창조의 원리이며 말씀으로 새창조하는 역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을 주는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이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생명수나 말씀의 양식처럼 육과 영은 서로 비유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지금 백신이란 말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이것을 영적 비유로 설명 영적 백신이란 말로 복음을 번역해 이해할수 있게 한다. 백신은 바이러스의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개념이 복음과 같다. 단 한번의 접종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백신인 복음이 바로 영적백신이다. 백신이 죽음으로 끌고 가는 바이러스를 막게 한다면 죄 때문에 사망으로 끌고 가는 복음 또한 영적 백신이 된다. 이런 백신처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죄와 싸워서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영적 백신 같이 나음을 입었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이 영적 백신의 근거가 된 것이다.
질문)완전한 영적 백신이 우리에게 접종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구도자가 되어 회심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구도자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다. 완전한 영적 백신에 접종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기 500년 전에 쓰였던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는 지를 보여 준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선 영적 백신을 접종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영적 백신은 우리 안에서 작용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죄악의 허물에서 나음을 받았다는 그 믿음은 영적 백신을 접종 받았다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안전하게 백신 접종이 이루어 진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써 모든 접종이 한번에 끝난다.
질문)구체적으로 접종 받은 영적 백신의 재료는 무엇일까?
또 한 구체적인 영적 백신의 재료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좌 대신 흘린 속죄의 피이다. 예수님이 영적 백신을 만드는 과정은 처참하였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채찍으로 맞으면서 피를 흘리었다. 또 한 예수님은 가시 왕관 때문에 머리에서 계속 피를 흘리었다. 죄없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손과 발에는 대못이 살을 파고 들면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돌아 가시었다.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십자가에 대신 받으시고 부활하시었다. 예수님은 채찍질을 맞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어 못으로 찔리셨다. 영적 백신의 재료는 사람 대신 저주를 받은 가시 면류관이다. 영적 백신의 재료는 사람 대신 나무에 달린 저주를 당하신 그분의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 백신인 복음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누추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사람이 되셔서 살점을 찢어지는 채찍을 맞으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음을 통과하시며 부활하시었다.
질문) 영적 백신인 복음의 안정성은 무엇인가?
분명히 예수님께서 주신 영적 백신인 복음을 맞은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서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을 잃지 않고 앗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평강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죽어갔다. 성경의 히브리서에는 이런 믿음의 선배에 대하여 쓰여 있다. 성경이 영적 백신의 안전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분명히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 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 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다” 라고스에 있다. 예수님이 치료한 나병, 소경, 중풍 병자, 혈우병을 알았던 이들이 예수님을 만난 순간 나음을 입었다고 성경에 써 있으므로 안전하다.
질문)영적 백신의 원리는 무엇인가?
이사야 53장 5절에는 나음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어디서 나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죄와 사망의 형벌에서 나음을 받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죄와 상관없이 살아야 되는 데 죄로 인해 계속 힘들어 한다. 이것은 정확한 영적 백신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한 영적 백신의 원리는 죄가 사람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믿게 되는 원리이다. 죄는 그대로 있지만 죄의 정죄를 받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부활하였기 때문에 사망으로 끌고 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 안에서 죽고 부활하였음으로 죄와 상관없이 된다는 것이다.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육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으로 태어난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 새로운 피조물에서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한 항체 형성이 임재하 신 성령 하나님으로 생겨난다. 영으로 사는 삶에서 영적인 백신은 사람에게 죄에 대하여 항체를 형성시켜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살도록 성령을 주셨다.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찔림과 채찍으로 우린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사야 9:1-6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마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질문)그러면 이런 완전한 영적 백신인 복음은 어떻게 퍼져 갔을 까?
영적 백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영적 백신은 어두운 곳에 빛으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임마누엘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어두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 9장 1절에 스볼론과 납달리 땅 갈릴리의 어두운 곳에서 빛으로 오신 한 아들 활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땅은 외세의 침략으로 이방인의 경계라는 말로 갈릴리를 가장 낮은 수준의 땅으로 생각했다. 오죽하면 유대인도 어떻게 갈릴리 안에 있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낳을 수 있느냐 하고 갈릴리를 무시하고 하였다.
이런 땅에서 제자를 훈련하시었다. 하나님을 모르던 어두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을 알기 시작했다. 똑똑한 세상의 박사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지식이 많지 않던 바닷가 어부들 무리를 선택하시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를 핍박하던 사람도 제자로 삼으셨다. 이사야 9장 2절에는 흑 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 바로 바울을 연상한다. 그는 예수를 믿는 자가 되어 잡으려고 행하는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이었 던 그가 흑 암에 행하였던 것을 몰랐다. 하나님을 따르고 행하였던 그의 행동이 흑 암에서 행했던 행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빛을 보고 눈이 보지 못하게 한 것은 흑 암에서 한 행동을 바로 깨닫게 한 것이다. 그는 아나니아를 통해 영적 백신인 성령 세례를 받고 눈이 떠서 영적 빛을 보았다. 그 안에서 성령 관점의 비전이 생 긴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를 만나났다. 이는 교회로 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을 가진 것이다. 그 과정은 성경 진리를 찾고 듣는자로 10년 간 오랫동안 고향 다소에서 있었다. 그 동안의 사역은 성경에 나오지 않았다. 제자로써 진리를 찾아 교회로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을 밟은 것이다. 바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었을 것이다.
질문)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울이 쓴 신약의 편지로 되어 있는 말씀 하나 하나를 읽어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녹아 흐른다. 그가 빚진자로 이방인의 사도가 된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느끼었던 마음이었다. 결국 사도 바울 이웃을 사랑하는 이방인 사도로 세워졌다. 그런데 바울은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 생계를 이어가면서 다른 사람한테 절대로 기대지 않으면서 이방인의 사도로 기도자로 살면서 충성스러운 자가 되어 순교를 하였다. 이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성령 하나님 관점으로 비전을 가진것이 분명하다. 그가 그 당시 땅끝이 스페인이라고 생각하고 선교의 비전을 가진 것이다. 결국 이사야 서에 나와 있는 이사야 9장 2절에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그가 받은 빛을 비치게 하시었다.
질문)그 사망의 그늘진 땅은 어디일까?
바울이 생각한 세상의 끝은 스페인 까지만 이방나라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심지어 조선의 땅에서 선교사를 통해 영적인 백신 복음의 빛을 맞게 하였다. 그렇게 전하여 진 빛이 지금 한국에도 빛 주고 있다.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은 사망의 그 늘진 땅이었다. 희망이 없고 사망이 모든 민족에게 재앙으로 왔던 황폐한 땅에 복음의 빛이 들어왔다. 수 많은 교회가 제자를 훈련하면서 교회로 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을 거쳤다. 예수님이 동행했던 제자들의 행전은 그늘 진 땅에 빛으로 왔다. 그 빛은 전세계2위 선교 국가로 다른 오지 사망의 그늘진 땅으로 계속 빛 주고 있다.
질문)영적 백신인 복음을 맞은 사람들은 시작의 반응은 무엇이며 그 결과로 무엇이 나타날까?
하나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빛은 결국 이스라엘과 유럽을 통하고 어둠에 있던 한국에 있는 성도들까지 빛을 보게 되었다. 그 전도의 빛을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부름에 응답하고 교회로 부터 제자 훈련을 받았다. 응답한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말씀을 듣는 자 된다. 이런 제자들은 말씀인 영적인 생명이 영으로 들어와 다시 살아나게 된다. 또한 죄의 정죄를 받지 않는 칭의의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주신 복음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의를 입었으므로 제자가 되어 평생을 죄와 상관없는 의롭다 칭하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자인 제자들은 영이 살아나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제자들의 증거가 나타나며 영적 생명이 살아나면서 마치 나무가 자라듯 성경말씀의 자양분을 먹고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나무로 커져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극명하게 나타는 것은 바로 인내를 하는 것이다. 성도와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영적 백신을 결과로 맞이하고 있다.
질문)영적 백신의 영적 증거는 성경에 어떻게 나와 있으며 우리 영적 형성에 무슨 작용을 할 껏인가?
우리 같은 죄인을 인내하시고 결국에는 제자로 만드시고 알지도 못하는 미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알게 한다. 베드로와 그 친구들이 제자가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결국 이런 제자들은 일차적으로 소명이 생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성장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법과 같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심어준 복음의 영적 백신이 생명으로 자라게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주셨는 데 이 성령 하나님은 바울이 영의 눈을 떴던 것처럼 영적인 빛으로 새로운 비전을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시킨 예수님의 영이시며 영적 백신인 복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성경 말씀을 먹으면 성령 하나님이 영적 항체가 계속 영성으로 형성되어 죄와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 나중에는 영의 부활과 몸의 부활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영성 형성하는 단계가 된다.
이것을 비유로 하자면 백신을 맞고 항체가 생성되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 그러면 항체 형성은 말씀을 듣는 자에게 말씀의 해석하는 힘이 생긴다. 성령 하나님의 동행 즉 십자가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증거가 생기면서 더 깊은 영성이 형성된다. 이러한 영성 형성에는 하나님과 더욱 밀착되며 기도의 사람이 된다. 성경에는 선진들의 수많은 기도의 증거가 나와 있다. 시편을 보면 수많은 증인들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통해 영적으로 어떻게 회복되고 형성이 되었는 지를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기도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기도자가 되었는 지 성령 관점의 해석원리도 나와 있다. 결국 복음의 영적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항체 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사랑이 이웃을 향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9;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런 단계를 가진 성도들은 오직 십자가 신앙을 가지고 성화가 되는 것이다. 즉 말씀을 통해서 완전한 영적 백신인 복음을 접종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였다. 행실이 깨끗해진다는 것은 성화가된다는 뜻이다. 영적 백신을 맞아 항체 형성이 되어 죄가 들어 와도 싸운다는 것이다. 또한 그전에 이루어진 잘못된 습관과 죄성으로 끌고 같던 일이 순식간에 역겨워진다.
이 항체 형성은 바로 성화로 이루어 진다.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 항체가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이 되어 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죄가 들어와도 회개하게 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죄와 싸우고 점점 더 많은 죄에 대한 항체가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이 된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말씀과 성령으로 고난을 해석한다. 영혼과 마음이 치료가 되어 평안한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앞으로 죄를 지어 토색할 일이 있으면 몇 배나 갚겠다고 선언한 사건도 죄에 대하여 항체형성이된 것이다. 또 어느 날 성령으로 중생 한 성도가 갑자기 담배를 피우는 순간 매스껍게 느껴지고 답배를 끊게 된 것도 이런 경우다.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자신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게 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사례와 고난이 와도 나를 연단하시려고 또 고난을 주시는 구나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영적 백신인 복음이 항체를 형성해서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 결국 복음의 영적 백신의 결과는 성도에게 나타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심어준 복음의 영적 백신이며 이 말씀을 먹으면 성령 하나님이 영적 항체가 계속 형성되어 나중에는 영의 부활과 몸의 부활 하게 한다.
이런 영적 백신은 성경의 선지자와 시편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사야는 구약의 복음서로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죽음과 부활이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는 유대 말에 요시아 때의 선지자이다. 특히 이사야 9장은 예수님 태어나기 700년전에 예수님의 사역이 어디서 공 생애를 지내시고 어떻게 돌아 가셨 는 지 이사야 서에 적혀 있다. 이사야는 우상을 섬기던 유대에 요시아 왕이 개혁의 선봉에선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굽과 전쟁에서 부상으로 요시아 왕이 죽고 애굽으로 새로운 왕이 끌려간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음 예수님의 태어남과 공생애 어떻게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어떻게 재림하시는 소망을 기다리며 이사야서를 적었다. 마치 지금의 시대와 같다. 코로나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 복음의 백신을 알려 주어야 한다.
영적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항상 즐거워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창성하게 하였고 회심케하며 믿음의 구원으로 인하여 항상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사야 9장 3 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 오니’ 라고 하시었다. 3절의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고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창성하게 많아 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적 백신인 복음을 가진 사람은 염려되는 환경이나 고난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탄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빼앗아간다. 마지막 때인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마치 정상 세포인 것처럼 가장하듯이 영적인 사탄과 이단도 마치 복음인양 사람을 미혹하고 어떻게 하든지 기쁨을 뺏아가 갈려고 한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라
하나님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하라 라고 하였다. 기도와 간구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 기쁨을 회복하고 그 회복된 기쁨으로 즐거워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영적 백신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잡아 주셔서 기쁨을 잊지 않게 된다. 염려거리가 사라져서 기쁜 것이 아니라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평강은 모든 지각에서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다. 이 평강이 기쁨으로 가는 원리는 염려하지 말고 기도 할 때 생긴다. 이런 기쁨의 원리를 사탄은 하나님 나라 믿는 사람들이 전도와 선교로 인하여 영적 백신으로 추수하여 즐거움을 가진다. 사망에서 잡힌 사람을 탈취하여 같이 교회에서 주앞에 예배 드릴 때 그들은 더욱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영적 항체 형성이 된 사람들은 고난이 왔을 때 이단의 유혹이 왔을 때 말씀을 통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옛날 예수님은 세례 받은 후에 40일의 고난을 받으시고 사탄의 유혹을 신명기 말씀인 사람이 떡으로 만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통해서 이기시었다. 이사야서에는 신명기처럼 영적 백신이 많이 있다.
완전한 영적 백신을 접종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한 일과 앞으로 행하신 일을 믿었다. 영적 백신의 접종은 오직 믿음 밖에 없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하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우리 같은 티끌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에 접종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접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길이가 너무 길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 다. 하나님의 사랑은 깊이가 있다. 무덤에 까지 들어간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높이가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작은 예수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는 사랑이다. 이는 사람들은 어깨에 멍에와 채찍과 압 제가의 막대기는 영적인 의미로 스스로 정죄하며 죄의 저주로 인해 사망의 굴레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표현한다. 이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으로 사랑을 표현하시었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런 영적 백신인 복음을 맞은 믿음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영성 훈련은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의 관점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이웃을 사랑하고 훈련하는 데 있다. 그렇게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훈련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은 성장할 수밖에 없다.
이사야 9:3-6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그 믿음을 미디안의 날에 적용하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다. 이사야 9장 4절에 나오는 미디안의 날은 두 가지 일이 있다. 첫 번째 미디안은 이스라엘 민족을 유혹하는 미디안을 치는 모습이다. 두 번째는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미디안을 지배를 받다가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보통 위의 구절은 첫 번째 모습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두번째로 영적 백신을 적용하면 그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을 대항하기 위하여 3만명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미디안의 병사들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군인 3만명도 많다고 하여 3 백명만 남기라고 하시었다. 그리고 미디안을 기습하여 항아리를 깨고 횃불과 함께 공격하여 미디안과 아멜렉 동방의 군대들은 서로 어지러지 죽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3백명으로 이긴 미디안의 전쟁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하고 있다. 소수의 인원은 결국 믿음을 적용하는 소명과 사명이 있는 군인들로 충분하는 것이다.
믿음은 숫자가 아니며 결과도 아니다. 믿음은 숫자가 많은 양이 많은 세상의 원리가 아니다. 적은 양이라도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셨다. 바로 믿음은 주어진 환경에서 보여지는 과정이며 예수님 안에 있는 존재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것이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교회의 삶에 완전하게 동화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모습은 충성스러운 자의 모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자들의 소명과 사명이 된다.
지금 이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사는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물질적인 것 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게 하면서 살아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서는 소명과 사명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 시대에 사는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충성스러운 자가 되는 지 알아야 한다. 세상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원리로 소수의 사람들이 믿음을 보이고 세상의 죄에서 승리를 이끌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오직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성령 하나님 충만하게 거하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인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알게 되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과 미래의 소명과 사렴의일을 알게 된다. 어쩌면 이사야 9장 4절은 예수님이 이미 한 일을 말하고 5 절은 앞으로 있을 마지막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누가 복음 21: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를 예수님은 속이는 자들이 득세하며 미혹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누가 복음에 많이 예언하고 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과 복음을 들었으나 영적 백신이 없어 이단에 친노를 당하여 속박당한 사람들이 많아 질 것이다. 이럴 때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분별해야 한다.
성령 관점으로 적용을 하면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멀길을 가신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위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가시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때 이것이 영적 백신인 복음을 통한 탈취 물이라고 한다. 이사야 9장 3절에는 탈취 물을 나눌 때에 주 앞에서 즐거워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그들을 따른다면 5절처럼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 지리니 불에 섶같이 살라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렇게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충성스런 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영적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은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진리이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소명과 사명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이런 소명과 사명의 단계는 부활의 역사와 재림의 미래를 준비하는 전도와 선교를 통해 성령관점으로 적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전도와 선교는 사명이 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세상이 고난을 주고 슬픔을 준다 해도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성령 충만한 삶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성령 관점으로 영적 영성 형성이 된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제자들 처럼 세상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광장에서 전철에서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전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적 백신을 연결하는 것과 같다. 이런 성경 말씀을 해석하면서 적용까지 하며 이단까지 구분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성경 말씀 중에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질문)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전하십니까?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사야 9장 6절을 잘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삼위일체의 말씀도 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성령 관점으로 영성을 말씀에 적용하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된다. 앞으로 예수님이 부활하고 재림하신 다는 것을 이 말씀 구절에 적용이 된다.
6절에 ‘예수님은 인간의 아기로 태어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쓰여 있다. 원래 기묘자와 모사는 영어로 wonderful counselor 로 되어 있다. 원래 성령의 뜻은 변호자, 카운슬러, 거룩한 위로 자라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며 영존하신 아버지이시고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마치 3개의 원처럼 위가 다르지만 일체의 한 분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위가 다른 삼위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현하지만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구별된 위격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통하신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내주하시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서 내주하하신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서 내주하시는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완전히 연합된 존재로 계시기 때문에 결국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적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이며 대제사장과 왕 중의 왕 그리고 선지자의 직분을 가지고 계신다. 6절의 평강의 왕으로 오신 대제사장인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갈 때 지성소의 천이 반으로 찢어졌다는 것으로 우린 알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로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바리세인들이 표적을 원하자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시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가? 니느웨이에 가서 회개하라고 요나선지자에게 명령하였는데 요나는 원수에 갈수 없다고 다른 나라로 가다가 바다에서 빠지고 삼일동안 커다란 물고기 안에 있다가 나와서 니느웨이에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무덤에서 나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선지자로써 역할이 바로 그리스도의 역할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일이 이루어진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요나의 표적에는 니느웨이가 회개하지 않으면 40년 후에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요나의 회개 선포는 회개하지 않은 처참한 결과를 알고 니느웨이는 회개하여 40년후에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몰라보고 회개하지 않은 예루살렘은 40년 후에 어떻게 되었을 까? 정확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한 40년 후 AD 70년 후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돌위에 돌하나도 남기 않고 망하였다. 영적 백신이 없던 바리세인과 서기관들과 예루살렘은 처참하게 바이러스에 죽은 것처럼 무너졌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그리스도인 것을 몰랐다. 왕중에 왕이시며 대제사장이며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몰라본 것이다.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말한 것은 그 이유가 있다. 40년 후에 회개하지 않는 세대가 어떻게 되는 지 선지자의 입장으로 말하신 것이다.
질문) 지금 이 세대에 무엇을 적용하고 배워야 하는 가?
지금의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언을 받아 들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다는 그 예언은 지금 도 작용하고 있다. 그 옜날 예루살렘의 악한 세대가 영적 백신이 없어서 예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느껴야 한다.
빛으로 오신 영적 백신인 복음을 접종하한 사람들읕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에게 하신일과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영적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삼위일 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성령하나님이 알게 하신다.
이사야 9장 6절을 정확하게 읽고 완전한 영적 백신인 복음으로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셨는데 사람의 아들로 아기로 시작하여 인간의 몸을 입인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이 분은 대제사장으로 선지자이며 왕중왕으로 모든 정사를 메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원래 이름이 성령하나님이 내주하시고 영존하신 아버지 하나님도 내주 하시는 일체의 한 분이시다. 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평강의 왕안에 있으므로 평강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회개와 기쁨의 백성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진 회개와 기쁨은 이미 이루어지고 이것은 영적 백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난다. 우리가 저주를 받아서 죽어야 될 존재인데 그 저주하는 자를 죽이고 그 나라는 이미 하나님이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전에 분명히 수 많은 시편과 선지자릍 통해 성경을 적고 예언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진 회개와 기쁨은 이미 백신의 항체 형성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영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영적 백신인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난다. 사람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니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백신의 안전성을 믿고 맞으면 건강해진 사람들의 육체적 백신에게 고마워 하듯 영적 백신인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해야 한다. 승리의 그날까지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는 목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양처럼 말씀을 통해 세상의 바다에서 빛이 되어 살아 가야 한다.
구약의 성경 이사야 4 장에서 정확하게 베들레헴에서 처녀의 몸에서 한 아들이 태어난다고 예언하였다. 이미 영적 백신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야곱의 아들 유다의 자손중에 다윗왕처럼 그 후손에서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 날 것이라 예언하였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그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영적인 백신을 만들기 위해 이사야 같은 선지자를 보내 셨다. 만약 안전하지 않았다면 그 예언은 틀린 것이 되었는 데 성경의 예언은 지금까지 실현된 것이 차고 넘치고 있다. 수 많은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할 거이라고 하였다. 예레미아는 남유다가 베벨론이 망할 것이고 애굽도 망할 것이라고 하며 수 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예언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역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다니엘은 바벨론을 바사와 페르시아가 망하게 할 것이고 알렉산더의 제국이 페르시아를 망하게 할것이며 로마와 로마 후에 일어나는 나라들이 나누어지고 강성하게 되고 뜬 돌이 이 모든 나라를 부서뜨릴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지금 역사는 그 예언대로 하나도 틀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성경을 통한 영적 백신의 안전성은 극적인 형태로 이 여러분 세대에게 보여지고 있다. 그 안정성을 검증하는 마지막 싸인은 이미 몇 천년동안 나라가 없었던 이스라엘이 1948년에 다시 세워지는 기적같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조차 성경의 구약에 호세아의 예언으로 회복된 시대까지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그렇게 몇 천년동안 나라가 없다가 다시 회복된 적이 없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구약에 정통한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진짜 메시아인 예수님을 영적 백신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주는 영적 백신의 항체가 형성되지 못하여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진짜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럴 때 영적인 백신도 성경 말씀을 통해 항체가 형성되는 해석하고 적용하면 이단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럼 영적 백신은 성경 말씀에 통해 얻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증거로 비추어 진짜와 거짓 선지자와 이단의 거짓말을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예수님의 영성 관점을 거꾸로 느낄 수 있는 거꾸로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 거꾸로 영성 훈련인 성령 관점 관계 원리는 성경을 통하여 얻어지는 수많은 은혜와 증거가 영적 백신의 원리로 적용 되는 데 있다. 그렇게 훈련하게 되면 이단에 대한 항체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게 된다.
질문)그렇다면 지금 세대는 세상에는 믿는 사람들이 영적 백신이 있어서 이단을 구분할 까?
지금은 수많은 이단들이 득세를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한 이단은 몇 십만명이 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만 영적 백신이 없어서 진짜와 가까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이단은 마치 진짜인 것처럼 하지만 마지막이 다르다로 하여 이단이라고 한다. 이단의 배경에는 속이는 자 사탄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속이는 영이 있어서 복음의 끝을 바꾸어 놓았다. 예수님이 계셔야 될 자리를 교주가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단이다. 그래서 복음의 끝을 속이면서 바꾼 것이 바로 이단이다. 지금 많은 이단에 속한 사람이 넘어가고 있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단으로 넘어갈 것이다. 여러분의 이웃이 여러분의 친구가 지금 이런 곳에서 이단에 침노를 당하고 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사탄의 압제에 속고 있는 친구들에게 오늘 본문 이사야 9 장 6절을 영적 백신으로 읽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하나님이시며 인간이 되신 것을 이구절을 보여주고 설명해야 한다. 또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이 구절에 나왔으므로 삼위일체의 관점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거나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헷갈리게 하고 있다. 영적 백신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에 넘어가고 있다. 어떤 이단들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 이 구절은 백신이 된다. 말씀으로 해석하면 이단의 항체가 생긴 것이다.
예수님도 영적 백신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겼다. 세례를 받은 후에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시었다. 돌로 떡을 만들으라고 성전에서 떨어지라고 사탄은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속이고 시험을 할려고 하였다. 그런 사탄의 시험에 영적 백신인 성경 말씀의 해석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고 이기시었다.
영적 백신을 가진 믿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일을 믿어야 한다 이 두가지를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우리는 은혜로 받아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의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속 죄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을 믿는 영적 백신이 우리 안에 말씀으로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 때에 속이는 자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럴 때 영적 백신의 항체가 그 속이는 것에 반응하며 거부하게 된다. 속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생의 생명을 갖는 다음 세대가 청소년과 청년의 부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롬 5:12-21, 고전 15:42-50
롬5:1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삶>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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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5:12-21 <아담과 그리스도>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
질문) 여러분은 성경에서 나오는 스토리를 어떻게 이야기 하시는 가요?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책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며 성령 하나님을 보내 임마누엘하시며 다시 오신다는 이야기가 성경의 스토리이다.
구약의 스토리는 창조로 아담과 이브를 만드셨지만 아담과 아담, 그들의 후손이 범죄하고 타락하니까 육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선택하여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구약이다. 신약의 스토리는 약속대로 유대의 마지막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안에서 생명안에서 하나님 나라 천년왕국, 새하늘 새땅에서 왕노릇하하는 존재가 된 것이라 고 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위의 본문은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시다라고 전하고 있다. 원래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담의 나라에서 아직 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다.
질문)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고 돌아가시고 마지막 날 부활하기전 사람들은 어떤 상태로 있었을 까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되기 하루전에 사람들은 모든 영적 사망의 상태에 있었다. 사람도 사망의 상태로 모두다 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가 다른 것은 예수님은 사망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이며 또 그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였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사망은 죄 떄문에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렀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되셔서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가 그분처럼 되는 것이다.
롬5:12 <아담과 그리스도>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성경에는 사람의 사망을 세가지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 쨰는 물리적 죽음이다. 영혼과 육체기 분리되는 것이다. 두 번 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죽음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죽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 죽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연결 되는 것과 분리는 복음을 세상에 비유로 적용해 보겠다. 이것은 성령 관점으로 영성이 적용이 되어 복음을 전달하는 과정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수학적 기호로 해석하고 적용해겠다.
이제부터 이런 사망과 생명이 가지는 복음의 원리를 디지털의 원리 0과 1숫자로 설명해 보겠다. 디지털에서 연결되지 않은 상태를 0으로 연결된 상태를 1이라고 본다. 마치 전기가 들어오는 스위치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0 은 연결이 끊긴 상태 즉 스위치를 off 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기가 연결이 되는 것은 스위치를 on으로 하는 것과 같다.
이제부터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 죽어 있는 상태를 0으로 하겠다. 이것은 첫 쨰 아담의 나라 사람들을 0의 나라 사람들이라고 한다. 0인 이유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망으로 가고 있고 진리를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과 연결 된 상태 살아 있는 상태를 1 이라고 하겠다. 하나님과 영혼이 분리 되지 않은 마지막 아담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 또한 1의 나라이라고 하겠다. 1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하나님 한분이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첫째 아담의 나라 사람들은 0 이란 숫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죄를 달고 있는 나라이며 영적 죽음이 있는 나라가 되었다. 0의 나라에는 선조들이 하나님과 영혼이 분리되어 0을 가지고 태어나 0으로 죽고 있다. 많은 영혼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 갔다. 이런 사람들은 아담의 나라 0으로만 끝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여 결국 아담의 나라 백성 0의 나라 백성으로 죽음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1이 되고 싶었지만 결코 ㅇ1 이 되지 않았다.
그 나라는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선조들은 율법을 지켜서 1 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1이 되고 싶어 행위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숫자로 표현하면 0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노력하여 0.1, 0.2, 0.3 이런식으로 0.999까지 같다. 그러나 그들은 0.0001 이 부족하여 결국 0으로 죽었다. 아담의 나라 백성들은 죽을 때 0으로 죽은 것을 모르고 자녀들도 0으로 죽게 되는 것을 몰랐다.
이런 아담의 나라에 어느날 1을 달고 온 사람이 이세상에서 왔다. 아버지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분이 하나님이 연결된 상태 1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선지자와 시편에서 예언된 말씀대로 하나님이 직접 오신 것이다. 그 분은 1이란는 숫자를 가지고 계셨다. 그 분은 원죄로 태어나서 아담의 나라 0을 가진 죄 대신 죽고 부활하시었다. 그리고 아담의 나라에서 이 좋은 소식을 믿으면 0 가진 사람에게 1을 더해 주는 마지막 아담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었다. 마지막 아담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성령관점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게 되면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되고 회심하게 된다. 교회는 말씀을 듣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해야 한다.
복음을 전달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하나님과 연결된 1을 가지게 된다. 결국 아담의 나라 백성 0은 혼자서 하나님 나라 백성 1이 될 수 없는 것이다. 1이 0에게 들어와서 함께 더해저야 1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혼자의 힘으로는 갈 수가 없는 것을 알아햐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돌아오지 않으시면 결코 마지막 아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이다. 그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회개를 해야 한다.
(슥1:3_)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다. 이것을 숫자로 표현하면 복음은 0과 1 이 더해지면서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 1 이 된다. 0+1= 1 로 복음을 표현하면 아주 쉬은 것이다. 복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 나라 백성 0인 우리에게 인간이시며 하나님인 예수님의 1를 우리에게 더하는 것이다. 실제로 죽어야 만하는 0인 우리에게 1인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는 것이다. 0과 1 이 더해지면 1 이 되는 이 공식은 새창조의 역사이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질문) 여러분은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를 믿으십니까?
내가 성령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과 합해지면 예수님처럼 영원한 생명 영생을 갖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을 위한 창조의 역사는 그 분이 오셔서 새창조로 새영을 부어주시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담의 나라 백성 0인 백성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회심하고 돌아가면 하나님이 마지막 아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스가랴가 예언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안에 성령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된 1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믿으면 새창조가 된다. 창조의 역사와 임마누엘의 역사,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 재림의 미래를 믿으면 새창조가 된다. 재 창조가 된 사람들은 주의 영이 보내진 자들이며 하나님 임마누엘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이다. 창조하는 역사는 새창조의 역사가 되어 새롭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1:18-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어두운 밤에도 하나님은 길을 안내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임마누엘은 성육신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말하고 있다. 0은 아담이 하나님과 연결이 안되고 있기 때문에 죄로 이 땅에 존재하는 이 세상 나라를 말하고 있다. 아담의 나라는 죽을 수 밖에 없으며 모두 다 흙으로 돌아 간다. 예수님은 아담의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여 세상에 나오신 것이다. 영광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1은 마지막 아담 예수님으로 예수님 안에서는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역사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있다. 1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바로 아담의 나라 0에 임하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질문)왜 0인 아담의 나라는 1 하나님 나라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나라에 스스로 못 될까요
고린도 전서 15:45-50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48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위의 고린도 전서는 분명히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쓰였있다. 1인 하나님나라는 영을 살리는 것이며 생명을 받는 것이다. 성경에 분명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거 썩는 것은 썩지 않은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0의 나라가 1 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0의 나라는 썩을 없어지는 존재이며 땅에 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0이 스스로 혼자 1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1의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하늘에 속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혼자서는 못간다. 마치 구렁텅이 빠진 사람이 위에 밧줄이 없이는 구하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 혼자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가 없다. 결국 하나님의 임마누엘 역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 백서이 될 수 가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역사는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것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또한 썩는 존재 땅의 나라 0은 썩지 않는 1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가 임하여 예수님 마지막 아담이 우리에게 더해져야 우리가 사는 것이다.
질문) 그렇다면 지금의 하나님 나라 1은 나라가 되는 데 어떠한 요소를 갖추고 있을 가요
첫 번 쨰 하나님 나라는 국민이 번성하고 생육하여야 힌다.
롬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질문) 하나님 나라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
많은 사람이 선물이 넘쳤다는 말은 믿음을 통해 칭의를 받은 것을 말한다. 죄가 있음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는 것이 칭의 인데 이것은 수 많은 사람들을 선물 같은 은혜로 생육번성하게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값을 믿는 믿음으로 선물같은 용서와 은혜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만 바라보고 우리의 죄에 대한 것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칭의가 이루어지면 수 많은 사람들이 생육 번성하게 된다.
기존의 아담과 땅의 나라도 마찬가지로 국민이 생육번성하게 되는 데 영적으로 해석하면 수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 전도와 선교를 하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 지상 명령으로 가르치는 제자가 늘어나는 모습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 관점의 비전을 주시고 진리를 듣는 자가 되게 한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임마누엘 역사이다. 제자들은 성령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함께 거리로 전쟁터로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 간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국민의 생육번성은 세상 나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초대 교회에도 제자가 되는 과정을 받은 것이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런 제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과 진리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제자들은 거듭남으로 생명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것이 제자들이 처음 가지는 소명이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이면서 예배를 드리고 진리를 듣는 자가 된다. 성령 하나님은 이들에게 비전을 주시고 임마누엘의 역사로 제자들에게 순종하는 무리를 만든다. 초대교회가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된다는 것은 진리를 듣는자인 제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지금 도 수 많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들이 전도와 선교사로 생욱번성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밭이라 심령이 모여서 교회가 이루어지고 가치관과 이땅에도 확대되어가는 과정이며 교회사의 과정은 생육번성과 땅도 정복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천억명이 낳고 죽었는 데 10%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백억명이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이 문화가 달라지고 하나님 나라의 땅정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 인구의 3분 1을 차지 할 정도로 많은 수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이것도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 국민이 생육 번성하는 것이다.
세 번 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의 통치권입니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아까 발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나라 1을 받은 사람이 입니다. 이 사람들이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2:10 많은 아들들 이끌어 영광에 이르게 하는 일
요한 계시록 21:7 내 아들이 되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왕자와 공주가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예수님이 이땅에 임하시므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므로 재림할 때 완전하게 회수가 된다. 성경은 진정한 왕이 오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구약은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왕으로 오심을 계속 알리면서 달려가는 기차와 같다. 마태복음의 첫 장이 그 달려 갔던 기차가 어디까지 종착역으로 달렸는 지를 알려 준다. 그 길은 진리의 길이며 하나님 나라 왕국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알려 준다. 그 하나님 나라 왕은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 나라 왕국을 만들것이며 세상의 나라를 처 부스고 심판하시는 왕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의 헌법입니다.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사람의 죄성은 아무리 사람의 의를 덮혀도 죄인으로 죽는다. 사람의 의는 덧칠하는 것과 같다. 검은 옷에 하얀색의 물감을 발라도 다시 검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에게 덮혀지면 하나님이 의인으로 우릴 칭하신다.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힌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흰 옷이 우리의 죄를 다 가리고 남는 다. 그리고 예수님의 칭의가 끝이 아니라 서로 순종하며 사랑하는 헌법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순종을 받으면 의롭게 된 우리도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순종을 받아 헌법으로 지켜내야 한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로 나가야 한다.
요한 복음 13 :34 새계명을 네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헌법은 순종과 사랑이다. 순종하게 하는 것도 성령 하나님이 하시며 사랑하게 하는 것도 성령 하나님이 하신다.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이 이시므로 성도는 자기 부인이 있기만 하면 된다.
결론 적으로 하나님 나라 왕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국민과 땅과 통치권과 헌법으로 이루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가 초림을 통해 임하는 나라가 통치 확장 되어가는 비유가 겨자씨 비유가 완성되어가면서 확장되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죽으시고 그 겨자씨가 세상을 뒤덮고 하나님 나라 왕국을 만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질문)여러분은 어떤 나라에 속하고 게십니까?
질문)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헌법을 지키십니까?
질문) 하나님이 없는 0인 땅의나라입니까 하나님과 연합된 하나님 나라 1입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6:17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지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아멘”
우리는 세상의 나라에 속하고 있지만 우린 이미 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생육 번성하도록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에 보내진 자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의 땅으로 가서 전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로 예수님의 통치권을 인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지금도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한다. 0 더하기 1 은 1이라는 사실 나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더하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며 나는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 복음의 원리를 항상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옛날 흥미로운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시간에 관한 스토리가 나온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시간이 마치 돈처럼 환산하여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불하는 미래 도시에 관한 이야기다. 그 도시 사람들은 오른 팔에 자기가 앞으로 살 수 있는 수명의 시간을 숫자로 미터기처럼 적혀서 나온다. 만약 그 도시에서 택시를 타면 팔을 내밀어 5시간을 주고 택시를 탄다. 그렇게 되면 팔에 남은 수명이 5시간이 줄어 든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물건을 시장에서 팔면 그의 팔을 내밀어 그 시간만큼 수명을 가치로 받아 늘어난다. 그런데 만약 수명의 시간이 O 이 되면 실제로 죽는다. 어떤 여자가 버스를 타고 아들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원래 1시간 가치로 갈 수 있는 데 2시간 가치로 올라 버려서 탈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시간 반의 수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아들을 향해 달려 갔다. 그렇지만 결국 한참을 달려서 갔지만 결국 시간이 제로가 되어 죽게 된다. 그 아들은 그 때 가진 시간이 100년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영적으로 이 영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삶에 있어서 시간을 어떤 가치로 생각하는 지 과연 영생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고 있다. 이런 주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십자가 역사와 복음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지를 알아보겠다. 그리고 이러한 영생의 가치가 어떻게 영성에 도움이 되는 지도 알아볼 것이다.
질문)그렇다면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첫 째는 생물학적 죽음으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일어나는 죽음, 곧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죽음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며 모든 사람은 이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둘째는 영적 죽음으로써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지만 영혼은 하나님과 분리 되어 죽어 있는 상태를 이다. 영혼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사는 죄인들이 바로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해서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영원한 죽음이 있다. 그것은 육신이 한번 죽었다가 부활한 상태에서 영원한 지옥 혹은 불못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 상태를 말한다. 요한 계시록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세 번째 죽음까지 가지 않는 영적으로도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이런 죽음을 가지게 된 이유는 창세기에 나와 있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사탄에 거짓에 속아서 선악과를 먹게 된 이후부터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코로나 사태 같은 펜데믹 상황은 영생이 사람들에게 과연 있을 수 있을 까 생각한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개인의 건강으로 죽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생명은 결국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이젠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가 그것을 믿기 만하면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쓰여 있다.
요한복음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 영생이 과연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한 단순한 영생의 의미는 사망이 없는 시간의 개념을 생각한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만약 시간만이 가치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가는 이유가 영생을 받기 위해 간다면 그 자체가 인간이 가진 욕심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영생의 시간을 더 받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결국 육신의 정욕에서 나온 영생의 개념은 문제가 있다.
영생이란 단어는 그런 뜻으로 사람의 욕심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놋 뱀을 장대에 들은 것처럼 십자가에 들리는 이유가 단지 시간의 가치인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복음의 뜻을 잘못 아는 것이다. 결코 영생의 뜻이 시간만의 가치로 여기어서는 안된다. 성경에 나오는 영생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와 연관이 된다. 즉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시간과 다른 모든 것이 된다. 영생은 영원한 시간을 가치로 여기는 것에 제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서로 같은 조건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치 나무에 가지고 붙고 잎이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영생은 가지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하는 역사이며 예수님의 영생 생명수 나무에 접붙이기 위해 하신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생명수는 예수님이며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생명수 과일을 먹지 못하였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생명수 때문에 선악과 죄의 상태로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불사를 말하며 죄를 지은 상태로 죽지 않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십자가 역사는 우리 자아가 죽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된다. 그래야만 예수을 믿음으로 칭의 된 사람들은 예수의 생명수 나무에 접목하게 되는 데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이 단계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단계이며 성화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지에 붙어 있는 사람들은 성령 관점으로 말씀을 해석한다. 이런 사람들ㅇ 말씀을 해석하며 세상에 성령의 열매를 보여 준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열매가 세상 보여 지며 이를 위해 기도를 하는 자가 된다. 기도하는 작은 예수가 되어 이웃을 사랑하면서 전파하고 빛이 된다. 이런 영생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교회는 더 깊은 영성형 과정을 청년들에게 주어야 한다. 청소년 청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면 그들의 무엇을 할지가 비전으로 보여지고 그들의 직업으로 이웃을 섬기고 기도하면서 사랑하게 된다.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의 나무에 청년과 청소년들을 예수님 생명수에 영생으로 접붙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적 백신을 접종해주어야 한다.
로마서 14:17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요한복음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 이다
이 시대는 이제 마지막 때로 가고 있다. 결코 시간을 돌릴 수 없고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영화처럼 먹고 마시기 위해 1년씩 더 줄 수가 없다. 지금 이 세대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사는 사람들은 영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 영생의 참 의미는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씀에 따라 해석하여 주신다. 성령 관점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 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이 주신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영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자격을 가지는 것과 같다. 즉 성경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해석되는 사람은 기도자가 되며 새로운 탄생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가족 자녀가 되며 백성이 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참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 그 분이 누구이신 지를 안다는 것이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친밀함으로 우리 안에서 이해시키는 분이 아니라 마치 부모님을 자녀가 아는 것과 같이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며 예수님을 알게 된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것과 같다. 영생이 가진 의미가 시간을 이해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편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이렇게 교회는 더 깊은 영성형성을 위해 기도하게 하고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려면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고 해석하게 하며 기도를 드리게 해야 된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정확하게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가게 하는 지 부모님과 성경교사, 어른 들은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예배를 전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땅의 끝에서 오는지를 청년들에게 성령의 관점으로 알려 주어야 한다. 지금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주인이 되신다. 사람들이 주기도문에 “나라에 임하옵시며” 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예수님이 가르쳐준 대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주는 즐거움 먹고 마시는 것에 청년들이 관심이 많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생이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 오직 하나님 나라는 공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영생의 삶을 이야기한다. 먹고 마시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의롭다 칭하는 나에게 성화의 삶을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영생의 삶이다. 그 삶에 평강과 기쁨이 있다. 청년들에게 영적인 영생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알려 주어야 한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서 믿음으로 사는 의로운 삶이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장소와 시간에 관계가 없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가진 기쁨이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다스리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가 주는 평안과 안식이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임하는 평강이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는 선물이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돌리는 삶이다.
이 시는 청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받게 하기 위해 만든 시이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리기 위해 어떻게 성령 안에 의를 찾고 평강을 누리며 기쁨의 희락을 찾는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 오직 하나님 나라 만을 알리기 위해 성령 관점으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보는 지 알려 주는 데 있다. 서두의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죄가 있는 이 상태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오직 시간의 개념으로 사람은 영생만을 생각한다. 죄가 있는 인간의 욕심으로 보는 영생은 오히려 저주라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그 안에는 평강과 의와 희락이 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관계가 사람한테 예수님의 복음을 통한 구속으로 다가오며 사람한테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명수가 평안과 의와 평강으로 사람한테 영원히 오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였고 당대의 초강국인 바벨론에 2인자인 다니엘은 청년의 시절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서 하나님 나라의 계획하에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갖게 하였다. 이스라엘이 망한 그 때에 하나님은 청소년인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바벨론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훈련을 받게 하시었다. 쇠사술로 묶인 채 바빌론으로 끌려간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 죽음을 이기는 경험을 하게 있었다. 사자 굴에서 떨어져 살아난 다니엘과 불에서 떨어져 살아난 다니엘의 친구들은 초강대국인 바벨론 이란 나라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그 하나님 나라의 계획은 다니엘을 통해 바벨론 과 그 이후로 오는 초강대국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지 계시로 알려주게 되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의 신상의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해석해 주었다. 사람의 우상이 되어버린 신상의 꿈을 그 당시 바벨론 이후에 세계강국이 어떻게 올지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 나라들이 어떻게 손대지 않은 돌로 무너지는 지 생생한 꿈을 해석해주었다. 여기서 금은 바벨론 시대를 말하고 은은 바사메데 페르시아 놋은 알렉산더의 그리스, 쇠는 로마, 진흙과 쇠가 섞은 나라들이 마지막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 2:34-35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시편 110:3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그 손대지 않은 돌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 돌이 태산이 된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도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이 전 세계 퍼지는 지금과 다시 올 예수님의 시대를 영적으로 의미한다. 결국 다니엘은 몇 백 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의 예언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태산처럼 커져서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활과 재림의 역사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어른 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에게도 흐른다. 하나님의 뜻은 권세와 능력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다. 그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날에 청년들이 거대한 무리를 지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나올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권능이 날이 될 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받는 시대에 거대한 청년 무리들이 주께 나올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청년들이 새벽 이슬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코로나 이후의 시기가 전대 미문의 환경이 다가오고 있다. 환경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전쟁과 지진이 성경 말씀 마치막 때처럼 빈번이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이제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사회가 불안해지고 있고 가정 폭력이 20%이상늘고 이혼도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이후로 불안해하고 있다.
질문)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 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다음세대를 위해 어떤 역할이 필요한가?
코로나 사태는 모든 오프라인에서 일어나는 것들에게 대해 다시 쓰게 되는 시기가 도래했다. 경제, 정치, 교육, 사업, 종교 등 사회적 모든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를 증거해야 한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역사를 우리가 증거하며 살아야 한다. 사망의 어둠을 이기신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자.
이런 부활을 경험 사람들이 바로 새벽 이슬 같은 청년 들이 되는 것이다. 새벽 이슬은 어둠을 이기고 맺히는 이슬이다. 세상의 역사에 손대지 않은 돌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이 돌이 하나님 나라의 태산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이 시대에 거룩한 옷을 입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는 주의 청년들이 새벽 이슬 같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게 된다. 권능의 날은 재림의 날이다. 재림의 예수님이 오실 때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나오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그 때까지 이들을 키는 것은 거룩한 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거룩한 옷을 입는 백성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라고 생각하면된다. 이들은 충성스러운 자가 되어 성령 관점으로 영성을 적용시켜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들도 새벽이슬 같은 청년과 함께 영화롭게 하는 것의 하나님의 재림의 역사이다. 시편에 나온 역사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 많이 있다. 시편 110 편의 역사는 재림으로 예언되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질문) 청년들이 과연 어떻게 변하길래 청년들을 새벽이슬 같이 만들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세상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다. 그들은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구별되는 삶을 살게 된다. 소명은 개인이 받는 입장이고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입장이 된다. 사명은 예수님의 대사명이 있다. 전 세계 선교하는 사람은 제자를 가르치고 전파 하는 대사명안에 있다. 소명은 세상에 구별되면서 각자의 성령 관점에서 적용이 되어 가르치고 전파하고 모든 일 중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하게 받는 것을 말한다. 이런 소명과 사명을 청소년들에게 주어 이슬이 물에서 구별되듯이 구별되는 다음 세대 청소년과 청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의 이세대는 생각해야 한다. 이런 명제 속에서 다음 세대에 성경 말씀에 있는 예정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계획으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을 충성스런자로 만들어야 한다. 각각 개인 청소년과 청년이 가진 직업적 소명을 성령 관점으로 적용하여 세상에 선함으로 드러내는 양육을 해야 한다. 그 선함이 드러냄이 바로 교회의 삶에 완전히 동화 시켜야 한다. 청년 청소년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예배를 통해 성령 충만이 어떻게 되는 지를 알게 해야 한다. 예배에 대하여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특히 코로나 사태 이후에 사회적 혼란에서 있어서도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듯 지금 시대에도 수많은 청년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계획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주의 깊이보다 깊다. 청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그 사랑의 계획과 뜻이 지금도 이 세상에 흐른다. 그 청년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계획이 여기에 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
새벽이슬은 지나간 어두운 밤이 흘린 눈물이다.
새벽이슬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눈물이다.
새벽이슬은 고난을 통과한 청년들의 기쁜 눈물이다.
새벽이슬은 거룩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헌신으로 만들어졌다.
새벽이슬은 빛으로 오신 분을 찬양하는 즐거운 노래이다.
새벽이슬은 사탄에 잡힌 자들이 주께 풀려 나오는 증거이다.
새벽 이슬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나라 백성의 증표이다.
새벽 이슬은 십자가 피로 묻은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다.
새벽 이슬은 다시 오신 분을 마중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 청년들에게 그 사랑을 전해야 한다.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세상을 전부 사랑하실 수 있다. 한사람 하나를 온 세상을 사랑한 것처럼 사랑할 수도 있다.
질문)지금 이 세대에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해야 청년들이 새벽이슬 같이 될 까?
바로 성경 말씀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경말씀으로 죄의 중독에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치료해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청년들을 치료 해주고 영생을 준다. 성경의 제 1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에 그들을 안내하는 안내서이다.
디모데후소 3:15-17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갗추게 하려 함이라.
청년들이 삶을 하나님 뜻으로 살게 하려면 그들에게 어려서부터 영적 양식을 주면서 교회의 삶에 완전히 동화 시켜야 한다. 그들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은 권능을 받게 되며 그들이 새벽이슬 같은 존재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은 능치 못할 일이 없다. 이런 하나님이 그 분의 말씀을 적고 그분의 능력을 의로 드러났다. 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드러났다. 복음은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연결되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 지혜가 성경을 읽으면 보이고 계시가 열린다. 하나님의 감동이 고스란히 청년들에게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게 해야 한다.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을 봐야 그들이 온전해 진다. 온전해지는 것 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하게 된다.
연결질문) 학교에서 일등으로 만드는 것이 그 아이의 진정 한 삶의 목표인가?
한국의 부모들은 왠만하면 아이들을 일등 학교에서 일등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과연 일등학교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가 있을 까 ? 한가지 예로 수 많은 일등학교에 온 아이들이 성적이 조금만 떨어지면 자살하고 인생을 포기한다. 아이들의 눈에도 공부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결 질문) 영원한 죽음이 그들을 데리고 가는 데 과연 생명이 공부보다 못한가? 이
런 아이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의 생명은 주신 분이 계시며 그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공부는 바로 그것 밑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썩을 것에 불과하다.
연결질문) 아이들의 비전과 꿈은 어른들의 욕심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연결질문) 가정은 오직 공부를 위해 모든 것을 제공하는 베이스 캠프인가 ?
그런데 이 세상의 많은 부모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목숨보다 더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 마치 부모 세대가 누리지 못한 것을 모든 과외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부모들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부모의 욕심으로 자기 만족을 가질려고 하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다. 과연 이것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능력을 보여 주는가 생각해야 한다. 오직 의사를 만들고 변호사를 만들어 세상이 존경받는 아이를 만드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인가? 세상에 많은 부모들이 한가지 높아지는 가치관으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마치 아이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높아 지기만을 바라는 바벨탑과 같다. 이것은 아이들을 바벨탑에 가두는 것과 같다. 많은 가정에서 행복한 이야기는 없어지고 오직 성적 이야기로만 바뀌고 있다. 세상에 이런 부모들은 모든 세상이 원하는 것을 위해 돈을 들여 사립학교에 보내고 사교육을 시킨다. 청소년과 청년들을 모든 것에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옛 날에 바벨론은 능력있고 힘이 센사람이 최고로 만들었던 나라였다. 이것은 아이들을 바벨론 같은 나라에 가두는 것과 같다. 아이들이 당연히 따라 올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아이들은 능력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한국 부모들은 자기 욕심으로 피아노와 태권도, 수영등을 강요해서 만들어 간다. 부모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의 마음속에 세상이 주는 가치관인 가득 찬다. 부모들은 수능보기전에 청소년과 청년들이 삶의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한다.
연결질문) 이런 아이들이 자라나서 인생을 행복하게 생각할 까?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부모나 세상 사람들에 가치 기준에 맞추어 살면서 만족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로 인해 청소년과 청년들은 가장 자유스러울 나이에 인생의 평안함과 자유를 잃어버리면서 산다. 오죽하면 한국 청소년과 청년 학생들에게 삶의 만족도를 조사 했는데 OECD국가 48 개국 중에 47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얼마나 많길래 꼴찌에서 두번쨰를 할 까? 그들에게는 공부와 성적이 모든 것을 죄우하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시간이 없다.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어디서 가르칠까? 청소년과 청년들은 기댈 곳이 없이 다른 곳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을 려고 노력한다. 영혼의 길을 잃은 수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자포자기 상태로 모든 것을 포기 하며 산다. 더욱 심한 것은 자포 자기 상태에서 담배, 술, 게임, 스마트폰 중독 등의 굴레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배처럼 사는 청소년과 청년들도 있다.
출애굽기13:6-8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대질문)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부모님들과 교회는 어떤 식으로 영적 유산을 물려 주어야 하는가?
이 같은 지금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려면 부모님들은 생활속에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말로가 아니라 생활로 자녀들이 영적인 유산을 갖게 된다. 많은 부모님들이 성경을 가르치지만 생활의 본을 보여주지 못하고 산다. 성경의 복음을 강조하면서 공부가 우선인 것처럼 사는 부모님에게 그들의 자녀는 영적 유산이 물려줄 수가 없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 지 부모님이 정해야 한다. 부모님이 우선인 가치가 생활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먹었던 무교병은 대대로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유월절의 관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 유월절 기간 무교병을 일주일 동안 먹어야 되는 지를 그들의 자녀들에게 삶으로 생활으로 유산을 물려 주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급하게 탈출하면서 그 상황이 누룩을 넣을 시간이 없게 됨을 피부로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성경에 명령하시었다. 절기를 지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입장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입장으로 감사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감사함을 가지고 있어야 예배가 된다. 구약의 유월절의 의미가 어린양 예수님이신 십자가 피의 속죄와 부활을 예표한다. 유월절이 애굽에 있는 짐승과 사람의 장자를 죽이신 것에서 오직 어린양의 피가 묻은 곳마다 넘어갔다는 것에 감사한 것이다.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속죄와 부활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에서 넘어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가 예배를 드린 것은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피로 성도의 죄의 심판이 넘어가게 한 것을 감사하는 것과 같다.
베드로 전서 2:1-5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연결질문)인생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시기에 부모들은 진정한 인생의 의미인 신령한 예배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까?
세상에 버림받은 예수님을 기억해보자. 그분은 버린 돌이 되었지만 그 산돌부터 주출돌이 되어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예수님의 몸이다. 세상의 구원을 오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소망의 빛을 발해야 한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교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택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교회의 몸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신 평강과 감사가 자연스럽게 든다. 여기 감사하는 예배는 예수님의 성격과 힘과 능력을 몸과 머리이신 예수님과 연합된다. 이런 예배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예배는 드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들어야 한다. 예배는 형식이 아니며 생활이며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한다. 부모님들과 교회 공동체는 이런 예배의 삶을 통해 다음 세대에 영적 유산으로 전달해야 한다. 코로나는 이런 예배를 세상속에서 보여 주는 기회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 삶으로 보여진 예배가 진정과 신령이 되는 예배가 된다.
다음세대가 기성세대의 삶을 통해 보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예배가 회복할려면 부모님들과 교회 공동체가 어른 들의 책임이 있다. 그렇게 기성세대가 변할 려면 기성세대가 성령의 임재가 있어 생명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삶으로 예배가 변화가 되어야 한다. 삶으로 예배드리는 방법 중에 가장 평법함 것은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모든 자연은 바다 뿐만 아니라 경치가 좋은 데든 상관없이 아름다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창조 한 세계를 하나의 영광으로 돌릴 때 세상에서 그곳은 하늘 아래에 있는 천국이라고 한다. 어디서나 사진처럼 풍경이 천국에 온 것 같이 아름답다. 아마도 하늘 아래 있는 아름 다운 자연을 볼 때 청소년들은 창조적 생각을 발전 시킬 수도 있다. 한국도 바닷가나 산에 가면 아름단운 자연 환경이 어디 든지 발견 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자연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가 있다. 이런 자연속에서도 감사함으로 예배가 가능하며 그 예배하는 마음을 청소년들이 품으면 창조적인 능력이 키워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도 지옥에 사는 청소년들이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수 만은 죄와 유혹의 굴레에서 구속되어 중독으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청소년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답운 바다와 하늘이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 중에 많은 청소년들은 부모님들의 욕심 때문에 부모님의 기준에 맞추어 산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님들이 바라는 눈으로 아이들은 점점 돌 같은 부담으로 점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잃어 버리게 한다. 하나님이 부모에게 자녀를 준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라고 하였는데 부모들은 자기의 욕심으로 세상의 기준에 맞추도록 강압한다. 이런 청소년들이 자기가치를 알이가 없다. 가치 없는 존재로 느끼면서 매일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청소년들이 너무 많다. 만약 원래 자기의 가치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만한 존재이며 그 가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목슴을 버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 부모가 그것을 느낄수 있도록 해야 되는 데 그것을 부모의 욕심으로 세상의 가치로 자녀를 여긴다면 청소년들은 세상의 가치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결국 부모님들의 욕심으로 아이들은 수능점수를 잘 받은 아이로 키워 지는 것이다. 과연 이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까? 만약 세상의 수능 점수와 대학교의 수준으로 아이들을 키운다면 실패한 부모 나 성공한 부모 자녀 모두 자기 기만으로 세상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 오지 않는 다. 자기 자신도 그 중에 제일 위대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모른다.사탄은 하나님이 만든 아름다운 피조의 세계를 욕심때문에 못보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른이 되어도 중독의 굴레를 못 벗어나 살게 된다. 심심치 않게 신문에 젊은 부모가 게임중독에 빠져 아이를 굶여 죽인 것이 나온다. 이런 모든 악독과 기만이 어디서부터 왔는 가? 이 모든 것이 부모 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세상이 주는 가치관으로 살게 하니 세상 염려에 빠져 못나오고 있다.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른이 되면 통장의 돈 만을 생각하며서 살아 갈 것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평생을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 가게 될 것이다. 많은 젊은 세대들은 물질, 명예, 돈이 많은 것을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다. 어떤 청소년드릉 그것을 가질려고 시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며 산다. 건물주가 꿈인 젊은 세대가 과연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생명과 기쁨으로 살 수 있을 지 의문이 든다. 그 저 인생의 삶이 통장 계좌에 좌지 우지 된다면 얼마나 처량한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환경속에서 세상이 주는 것의 노예가 된다면 그 생활은 천국 속에서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 그들만의 인생의 굴레에서 평강과는 거리가 먼 그들만의 지옥이 되고 있다. 이런 아이들이 부모 세대가 되면 옛 날 우상을 섬기는 부모와 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녀를 낳지 않고 물질 만능의 세대에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지금 한국은 이미 그런 세대로 들어가고 있다. 한국의 많은 지표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많은 교회공동체에 다음세대가 없어지고 초등학교는 이미 많은 수가 줄어들어 인구가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죽는 사람이 태어나는 사람보다 많아 지면 한국은 다음세대에 희망이 없다.
하나님의 축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고 지상명령을 내리셨다. 또한 하나님은 청소년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었다. 만약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인자 하심을 맞 보았으면 당연히 자녀들도 그 길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주권이 있고 땅이 있으며 백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이땅에 만들어 졌다. 이런 백성은 제사장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 제사장이 된 모든 청소년들을 생각해보자.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이 들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인가 부모님들은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과 청소년들은 죄 때문에 사탄에게 빼았기었고 땅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점령당하였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청년들이 죄로 인해 잃어버린 땅과 주권 속에서 사탄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 교육은 진화론으로 공격이며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학교 왕따, 폭력, 미디어 중독으로 청소년들이 무너지고 있다. 물질적 풍요가 영적인 것에서 무너지고 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과 우상의 땅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음세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저 세상 나라에 살다가 죽어 갔다.
시편 127:3-5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이런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고 갈고 닦아 주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 가정에서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코로나 같은 이 세대에 이제 많은 청소년들이 집에 있게 되는 시간도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대면 예배를 교회에서 하면서 예배가 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기회가 없다. 가정에서 예배가 회복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시편 127 은 자녀를 화살로 비유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화살을 많이 가진 용사는 사탄과 싸움에서 이길수 있다. 그리고 화살을 갈고 닦아주어야 한다. 화살을 닦는 것처럼 이젠 가정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예배의 회복을 가져야 한다. 가정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 공동체의 예배도 회복된다. 흩어지고 모이는 예배가 초대 교회의 회복과 같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주일학교의 교육이 힘들어지고 있다. 많은 교회가 주일학교가 무너지고 있다.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너무나 많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안되고 있기 때문에 예배가 무너지게 된것이다. 가정 예배는 이것을 회복하는 씨앗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진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나라로 안내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주권을 다음 세대에게 찾아 주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게 하여 생명이신 성령으로 살아 있게 하여 주권을 찾아 주어야 한다. 그러면 청소년과 청년들은 각자 꿈을 가지고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땅을 정복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을 이끌고 들어 갈 것이다.
로마서 1:19-23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노라.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헤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노라
질문)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는 무슨 뜻인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각자 꿈과 능력이 다르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개성이 각자 다르게 태어 난다. 아이들을 바벨론 같은 나라에 구속되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기 이해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영으로 그들에게 자연이 주는 창조자의 계시를 알게 해야 한다. 우리가 보는 진실의 눈으로 뉴질랜드에서 바라보는 태평양 바다는 참 아름답다. 태평양 바다에 푸른 바다는 푸른 하늘과 같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그 해변가의 초록색 초원은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왜 그들은 이 아름다운 광경을 못 보는 가? 왜 하나님의 사랑을 자연을 통해 알만하게 보여주었는 데도 알지 못 할 까?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사랑 대신에 다른 어두운 것에 끌리었다. 하나님은 능력과 신성으로 만드신 만물에 그의 사랑을 그들의 속에 보여 알게 해야 한다. 아래의 사진은 뉴질랜드 바닷가에서 거센 파도에 굴하지 않고 버티어가는 나무를 찍은 사진이다. 이것을 보면 우선 생명에 대한 강인한 인내를 알수가 있다. 이 나무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버티어가는 생명으로 인내하라는 메세지를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주시고 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세상은 피조물이 창조주한테 하나님이 불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자연 계시나 성경 말씀을 들으면 말 못하게 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인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썩을 우상과 바꾸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도 다른 것을 찾아 떠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그 사랑의 모습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을 보면서도 다른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어 감사치도 안 하였다.
진실은 하나님의 알만한 사랑을 위의 사진처럼 아름답게 표현하시었다는 것이다. 모든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이 만든 작품이며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창세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모든 자연 만물에 보여 알게 되어 핑계치 못하게 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모든 자연과 사랑을 보여지는 것 때문에 알게 된다. 그들은 죄때문에 보았으나 보지 못한 것처럼 모른척하며 살고 지혜있는 척하나 사실은 우둔한 자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죄의 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때 핑계치 못하게 될 것이다. 마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썩어질 금수와 바꾸고 외면한 사람과 같다.
그 하나님의 은혜중에서 제일 큰 은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이런 모든 죄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리어 저주를 우리 대신에 받으셨다. 오늘 하루는 이런 하나님이 주신 용서의 계좌에서 저주 대신 은혜로 빌려 산다.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오늘 하루를 빌려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자녀들에게 하님의 큰 은혜를 알려 주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의무이다. 자녀들과 아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낮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은 하나님께 빚지는 인생이 된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어찌 이분을 위해서 살아가지 아니하려 하는가. 어쩌면 예수님처럼 따라 해보라는 뜻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 영화롭게 하면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 오라하신다. 썪지 않은 그분의 숨결로 만든 우리 영혼이 다시 그 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 속에 살다가 무의미하게 죽는 것보다 예수님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며 예수님이 가지신 영적인 가치관을 따라 영원히 살라 하시는 것 같다. 이제 어른들과 부모님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 세대에게 보이게 하고 세상에 전해야 한다. 다음 세대가 거부를 하여도 또 전하는 자가 지쳐 쓰러져도 보답하기 힘든 그 감사의 마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 한다. 다음 세대의 그 누군가가 당신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영광을 돌리면 그것이 반사되어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 영광의 열매를 세상에서 이룬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목적을 이룬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목적이요 삶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질문)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행성. 하늘, 땅, 바다 와 그안에 사는 모든 생물 같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로 만들어 졌다. 사람을 제일 마지막에 창조하셨다. 그 전에 창조한 모든 것들은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모든 것을 관리하도록 만드셨다. 창조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이 그 중에서도 가정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관계 형태로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만드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저버린 것을 모른다. 부부가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룰 때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어머니 마음을 알며 자기가 자녀였을 때 부모가 가진 마음이 어땠는지 알게 된다.
성부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이런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로 계신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보다 더 알만한 사랑을 보였다. 그 큰 사랑을 사람들이 핑계 치 못하게 역사 속에서 보이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직접 주시었다.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인간의 관점으로 인간이 되시었다. 신성을 가지신 분이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사람의 입장이 되고 사람을 대신하여 죄를 모두 안고 십자가에 돌아가시었다. 더욱 큰 사랑을 보이셨다. 더욱 큰 사랑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만드셨다. 교회를 그리스도 신부로 여기는 것이 바로 가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서로의 관점으로 관계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존중하듯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하라고 하였다.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듯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하게 하시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물처럼 들어오면 모든 것이 새롭게 가정과 교회의 관계가 보이며 이를 통해 성령 관계 관점 원리를 완성하신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서 피조물이 되어 낮아지기까지 하시면서 성령을 통해 요셉의 가정에 짐승의 구유에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것도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인간이 겪어야 될 세상의 아버지 아들의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과의 기도도 잊지 않으셨다. 그분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었다. 제자 요한은 그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를 돌보아 드렸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께서 육체의 아들의 관계로 가정이 어떻게 부모를 모시는지 관점까지 완성하시었다. 하나님이 가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가정은 사탄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있다. 사탄이 인간에게 가정 치명적인 공격 수단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영광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이니 자녀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된다.. 그러므로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광의 은혜가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최선이 되어야 된다. 자녀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시켜야 된다.
질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모퉁이에 버려진 돌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돌이 되셨다. 인간의 노력으로 돌을 다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 없도록 보여 지었다. 다니엘의 신상 꿈에서 모든 세계사 속에서 일어나는 강대국을 그 뜨인 돌 모퉁이 돌이 박살 내셨다. 예수님은 그만큼 도저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으로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곳과 그런 사람들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 모델이 바로 교회이다. 가장 큰 예로 예수님은 어부들과 세리를 제자로 삼아 도저히 지식을 구하는 바리새인의 무시를 당하기까지 하면서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였다. 그 모퉁이 돌이 다니엘의 환상처럼 강력한 로마 제국의 신상을 부서트렸다. 실제 로마 제국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에서 보면 그저 쓸데없이 굴러다니거나 누구나 처다 보지 않은 그런 돌 취급을 당하신 것이다. 마치 사진 처렁 분명하게 바닷가에 버려진 모퉁이 돌처럼 보이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 부활로 세상의 관점을 뛰어 넘어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만드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모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킨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알리셨다. 그 십자가와 부활의 보혈을 믿는 사람 마음에 예수의 마음을 넣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이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된다. 관계가 회복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변화시킨다.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한 것처럼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회복된다. 모든 사람들이 들어 보았을 이 사랑을 더 이상 핑계 치 못하게 하였다. 예수님의 영을 우리 마음에 넣은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아 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처럼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관점이 바로 예수님 처렁 될 수 있도록 하는 시작이 된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보게 된다. 심지어 자연도 아버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자연을 만드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아닌 당신을 위해 만드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파란 하늘이 있으며 숨을 쉬는 공기가 있고 땅과 숲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는 새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이 있어 아빠와 엄마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이 있는 집에서 사랑하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장난을 치기도 하며 뜰에서 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자연과 하나님이 만든 가정이 같이 공존한다. 그런 곳에 우리들의 보배 청소년과 청년들이 있다. 그 보배 같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해야 한다. 먼저는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 다음은 교회와 학교에서 부모님이 가르친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의 관점으로 알아서 쉽게 가르치게 해야 한다.
2절 아이들의 천국
느혜미야 7:1,5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하시므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계보를 얻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질문) 어떻게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질문과 응답의 코칭 방법으로 성경을 읽게 하는 가?
이 양육 전도 시리즈는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다음 세대인 청소년과 청년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목적으로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성경의 지식을 넣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 할 것인가를 알리는 코칭 방법론의 책이다. 마치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소개되는 거꾸로 영성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하브루타로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의 코칭 수업 방식과 거꾸로 교실의 공동체 학습을 융합한 것이다. 직접 그 질문의 응답을 미리 준 코칭 교재로 성경에서 질문에 대한 응답을 공부하고 공동체 성경 공부시간에는 서로 응답을 토론하고 스토리 보드, 영상을 제작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만들게 한다. 이 코칭 수업 방법은 영혼의 양식을 떠 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먹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렇게 하여 혼탁한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 칭하여지도록 성경 말씀을 읽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마치 바벨론에 끌려가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청소년과 청년들이 돌아올 믿음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과 같다.
질문) 옛날 유대인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벨론에 끌려갔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 까?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신앙을 그들이 지킨 것이 아닌 하나님이 지켜 준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끌려가서 남은 자를 통해 회복을 준비하신 것이다. 그 끌려간 사람 중에 적은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들은 각 계보 대로 등록하고 적게 하였다. 바벨론의 여자와 결혼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로 변하여 그들은 바벨론의 땅에서 죽어 갔을 것이다.
지금 마지막 때에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혀 가고 있다. 살인과 전쟁이 이 젠 하나님이 없는바벨론처럼 되어 가고 있다. 이때 세상에서 방황하는 청소년과 청년들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모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세대이다. 청소년과 청년들도 마치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처럼 성경을 모르는 세대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을 각 계보 대로 돌아오게 하려면 성경을 읽는 방법을 알려 줘야 했을 것이다.
지금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관점을 심어주어 예수님 안에서 믿음의 천국을 세워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꼭 해야 될 일이 있다. 바로 성경 말씀을 어떻게 들으며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가르쳐야 된다는 것이다. 먼저 성경의 숲이 무엇인지 가는 길을 알려 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성경의 숲을 가로 지르는 길이 된다. 이 길을 지나가면 성경의 숲이 어떤 것인지 알아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복음이 전하게 된다. 그들에게 성령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성령의 감동으로 만든 성경은 성령 관점으로 읽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의 관점 원리를 가르쳐 작은 예수님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청소년들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예수님처럼 닮아가게 된다.
이것은 좀 더 다양한 형태로 성경을 접근하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이 코칭 원리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질문과 응답의 코칭 방법을 써서 좀 더 스스로 성경을 찾아보고 생각하는 길을 안내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 성령 하나님의 임재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성경 말씀으로 회개가 일어나고 세상을 향한 믿음의 성벽이 생기었으면 한다. 성경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대로의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예수님의 관점이 살아서 생명력 있게 움직이게 해야 한다.
질문) 성경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인가?
그러려면 전체의 성경 말씀을 전부 하나로 관통하여 지게 하는 것이 있다. 성경의 숲을 이 주제로 읽어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 바로 그 주제는 예수님의 구원이다. 그 표현으로 성경을 쥐어짜면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 신 구약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을 적은 책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과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적은 책이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적은 책이다. 그 중에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원리가 있는데 청소년과 청년들은 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의 관점으로 읽어야 성경이 살아서 말씀이 되고 예수님의 영이 살아서 양식이 된다.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고 믿음이 되려면 예수님의 관점으로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해야 하며 성경을 좀 더 질문과 응답을 통해 스스로 찾도록 해야 한다.
질문) 성경 말씀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이것이 제대로 된다면 오직 예수님의 관점이 되어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 말씀의 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되돌리는 것이 성경 말씀의 최고 목적이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청소년과 청년들은 죄의 구속에서 벗어나 의롭게 된다. 성경을 보았던 그 청소년과 청년들의 눈은 영적인 눈으로 변하여 세상의 죄와 구별된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세상에서 믿음의 성벽처럼 세상과 구별되고 세워진다. 그런 믿음의 성벽을 가진 청소년과 청년들은 삶으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기쁨으로 산다. 그러기 위해 이 책에서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장 알기 쉬운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비유를 통해 성경에 나오는 복음의 관점을 적용해보려 한다.
질문) 이 세대에 사마리아 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을 위해 사마리아 인과 탕자 등으로 비유하였다. 사마리아인은 그 시대에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이었다. 탕자는 그 시대에 가장 불의한 사람이었다. 이 세대에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은 청소년과 청년들이다. 기성세대의 잘못을 그대로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옛날처럼 취직도 안되고 기성세대가 가진 기회도 없으며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먹고 못 사는 그런 세대가 청소년과 청년 세대이다. 매일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서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산다. 기성세대가 가진 공정 함도 없이 매일매일 그들은 처절한 삶의 현장을 살고 있다.
질문)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의 세대에 주어인 스마트 폰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직접 찾아가셨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셨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에 대하여 말씀하시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 사마리아 동네에 예수님을 초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복음이 사마리아 사람들한테 들어간 것이다.
이렇듯 지금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불합리한 세상의 영적 목마름으로 스마트 폰과 인터넷 게임 같은 우물가를 찾고 있다. 여기에 예수님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명수 같은 복음을 넣어주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만약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이 스마트폰, 컴퓨터와 인터넷 시스템에 익숙해 있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좀 쉬운 비유로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비유를 하실까 하는 관점의 마음으로 성경의 비유를 들었다. 이것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의 관점 원리를 통하여 코칭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씨앗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처럼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수많은 영혼의 질문을 어떻게 가르칠 까 어떤 방법으로 그 질문에 답을 주시었을 까 예수님의 관점으로 인터넷을 예를 들어 예수님의 관점으로 코칭 방법을 적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에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길 잃은 영혼에 무슨 질문을 하실 까? 인터넷에 무슨 마음으로 복음을 전달할 것인가 같이 적었다.
가장 먼저 성경의 관점이 어떻게 적용되는 인터넷의 비유를 통해 복음을 알린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인터넷의 도구를 통해 복음의 질문과 성경의 관점을 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적는다. 이 세대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 가를 좀 더 관점화 시키어 다양한 방면으로 알아보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시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보혈의 사랑을 인간과 소통하면서 공유하 시길 바라신다.
질문)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오고 가는 시대에 사람들에게 준 주기도문을 주신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공의와 사랑이 하나님께 기도로 소통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인 복음을 관점으로 받게 하는 것이다.
질문)왜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한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라는 말이 왜 있을 까?
바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관점이 적용되길 하나님께서는 바라시기 때문이다. 단순히 용서하시는 관점을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 단순히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주시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이 관점이 되어서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부활하시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님의 영을 넣어 예수님의 관점으로 증거 하게 하시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이제 복음을 성경을 통해 증거하고 계신다. 그 증거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의 관점이 되어 세상의 이웃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라는 뜻이 있다. 더 나아가 용서하신 그들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달하고 소통하라 하신다. 지금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그 예수님 관점의 사랑을 전달해야 한다. 다음 세대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도록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성경을 읽게 해야 한다.
질문) 성경 교사, 사 역자, 부모님들은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누가 복음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오직 한 분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로마서 16:27
첫 번째 청소년과 청년 자녀들에게 사랑한다고 해야 한다. 우선 부모님들과 성경 교사, 사역 자들은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사랑한다고 해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시고 한말을 그대로 자녀들에게 해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자녀에게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받은 예수님의 영광이 무궁하게 하도록 방법이다.
두 번째 청소년과 청년 자녀들에게 너로 인하여 기뻐하고 자랑스럽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축복받은 청소년과 청년 자녀들이 나쁜 길로 갈 수는 없다.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하였던 그대로 예수님이 받은 축복을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 자녀들에게 이런 축복을 주어야 한다. 물질과 명예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었던 축복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주어야 한다. 이것이 성령 관점을 읽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관계로 적용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향하여 말씀하듯이 부모님께서 자녀들에게 그대로 관계로 적용하면 하나님은 두배로 기뻐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을 관점으로 실천하라고 만드셨기 때문이다.
세 번째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가정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기도와 가정 예배는 항상 잊지 말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매일 아침에 기도를 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매일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 하시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입장에서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가정 예배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에스겔 36: 35-37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5절에서 3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오면 예루살렘 성에 많은 이방 사람들이 성벽을 건축 게 하고 이스라엘의 황폐한 땅이 장차 밭을 갈 수 있는 옥토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절에 아주 중요한 절이 있다. 그것은 “그 소망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지라”라고 쓰여 있다. 지금 청소년과 청년들은 지금 세상의 황무해진 땅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과 같다. 그들을 위해 우리 부모님과 성경 교사, 사역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와 가정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부모님과 성경 교사 수많은 어른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여야 한다. 성령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하여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의 관점을 갖게 해 주도록 기도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예수님 안에서 은혜를 알고 구원의 생명을 알게 된다. 지금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령이 주시는 예수님에 관한 말씀의 증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복음의 씨앗은 있으되 성령 관점으로 성경을 읽지 못해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 부모들과 성경 교사, 사역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소년과 청년들의 영혼의 밭에서 잘 자라도록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 교사나 부모님 동역자들이 같이 적절한 시기에 물을 대주 듯 성경 말씀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읽게 하고 부모님들과 같이 가정 예배를 회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지식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읽고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성령 충만한 예배의 삶을 살 도록 인도한다. 성령 관점 원리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마음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밝히도록 한다. 복음이 죄에서 생명의 구원으로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것인가를 알리는 것이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는 신학적으로 맞다 안 맞다 논할 것이 안된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어떻게 읽는지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뿐이며 부모님들에게 가정예배를 회복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기 위해 가정 예배와 삶을 통해서 부모님이 본을 보이고 교회와 삶에서는 성경 교사가 본을 보이고 사역자가 본을 보여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이런 예배의 소중함을 알려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와 각 가정예배를 위해 서로 간에 인터넷으로 디지털로 연결하여 같이 도와주어야 한다. 가정 예배가 힘든 곳은 서로 디지털로 연결하여 같이 예배 드리도록 격려하면서 같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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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교사, 사역 자, 부모님들이 해야 할 영성 훈련이 있다. 어른들은 이 훈련을 통해 제자의 삶에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제자는 제자 훈련을 받고 끝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평생을 가지고 삶으로 실천하는 실천적 삶의 행동양식이다. 그러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는지 중요함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대로 성경을 읽으면 알려 주어야 한다. 만약 제자 반 훈련이 있다면 그 훈련이 끝나고 성경을 통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소개해야 한다. 예수님도 직접 제자들을 데리고 모든 것을 본으로 보여주시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진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회복되는지 비유를 들어 알려 주셨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 회복되는 천국의 모습을 아버지 관점 관계의 비유로 설명하시었다. 예를 들어 탕자와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성경 말씀의 관점을 아버지 하나님을 이해시키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서 체험하면서 예수님과 같이 길을 걸어 다녔다.
예수님이 성령 충만하게 천국의 관점과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 회복 원리 중에 여러 가지 관점의 주제로 예수님에게 천국 복음을 들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진 문화와 생각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게 그들의 귀와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아버지 관점으로 설명하였다. 그렇게 하여 2 천 년 전 12명의 제자들은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천국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하여 숨어 버리었다. 모든 제자들이 한 제자는 배반하여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고 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까지 하였다. 그런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빈 무덤에서 온 여인들을 나무라고 빈 무덤을 향하여 확인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후에 예수님이 부활체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 적용하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모든 말씀이 제대로 기억이 났고 해석된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그전 가르쳤던 말씀이 생명으로 살아났다.. 그때 예수님이 성전을 삼일 만에 만들겠다는 말씀도 해석된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시작하며 초대교회는 모든 말씀을 해석하였다. 해석 원리를 제자들이 말씀을 듣고 해석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베드로가 한 번의 설교로 몇 천명이 회개를 한 것은 이러한 성경 관점 관계 원리가 적용되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또 초대교회는 성령을 통해 방언을 하고 소유를 나누는 것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셨던 말씀을 적용하여 빌립 집사는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복음의 증거를 안내하였다.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성령이 주는 증거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도하였다. 다른 제자 들고 세상 속에서 많은 예수님을 증거를 적용하는 증인이 되었다.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의 적용 원리가 초대교회에 적용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분의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몸과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예수님 관점으로 성경을 읽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비전과 꿈을 예수님 관점으로 해석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증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씨앗을 살리는 비와 같이 토양을 적시는 성령의 말씀들을 키우고 성장시켜 줘야 한다. 예수님을 비롯 12명의 제자들은 2천 년 전 예수님이 걸어갔던 것처럼 우리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제자의 길과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영성 훈련의 길을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된 영성 훈련은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눈으로 보았던 이스라엘 땅에 기적과 구원의 감격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이젠 우리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관점으로 세상의 비전과 꿈을 가질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비전과 꿈을 예수님 관점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성령의 도움으로 영적 여행을 따라갈 것이다. 그 성령 관점 원리 코칭 훈련 기간 동안 힘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살아 있는 말씀 예수님 관점의 코칭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의 영성훈련은 제자 훈련이 전후로 실생활에 적용되면서 가능하다. 이것은 성경을 읽고 삶으로 적용하는 훈련이기 때문에 영성훈련의 기초로 제자의 삶에 여행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 영성 훈련을 마친 성경교사, 사역자, 부모님들은 성령이 어떻게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임재가 되는지 지속적인 사랑을 알려 주어야 하며 가정 예배로 모든 부모님들이 실천적인 제자의 삶을 살게 한다. 성경 교사가 되신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청소년과 청년들과 함께 기도하는 가정예배 시간에 같이 울게 될 것이다. 그때 청소년과 청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끝이 없는 것을 알 것이다.
질문) 어떻게 청소년과 청년들이 잃어버린 양이 되었을 까?
사자는 길을 잃어버린 누우를 찾아 나선다. 혼자 떨어져 있는 누우는 사자들의 먹이가 쉽게 되는 것처럼 청소년과 청년들이 교회와 믿음의 동역자들에게서 떨어져서 길을 잃어 릴 수 있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호기심이 많다.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것을 우상으로 쉽게 받아들이고 길을 잃어버린다. 이런 길 잃은 양을 사탄의 먹이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 세대의 부모님들은 잃어버린 양인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영적 양식을 먹여야 된다. 성령 관점 관계 코칭 방법을 써서 질문하고 말씀인 성경을 읽게 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써서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전달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부모와 성경 교사, 사역자들이 믿음의 성벽을 꾸며서 다른 유혹된 곳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면 된다. 잃어버린 양이 예수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성경과 복음이 스마트 폰에서 좀 더 개인적으로 연결되게 하면 된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들어와 예수님이 한 것처럼 죄인들을 찾아다니며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사탄이 제일 잘 쓰는 수 법인 세상의 우상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조차도 잃어버린 양이될 수가 있다.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믿고 다른 종교도 믿으면 된다는 다원주의적 생각이 바로 우상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계나 예수님의 관계를 끊게 하는 것은 어떤 의도 이든지 우상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대를 그대로 나 두고 다른 것도 섬기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을 보면 작은 틈 하나가 점점 커져 우상이 되고 이것이 모든 것을 차지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을 알 것이다. 작은 산당을 하나라도 제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하게 까지 되면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임한 것이다.
질문) 그럼 지금의 교회가 청소년과 청년들 잃어버린 양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
인터넷 쓰는 것을 막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왜 이 세대에 이런 인터넷의 거대한 통신망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옛날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모든 통하는 길을 만들 때 수탈을 위해서 만들었지만 결국 예수님의 복음의 통로가 되었다. 바울이 그 길을 통해 복음을 전하였다. 결국 그 복음이 로마 전체를 변화시키었다. 또 영적인 눈으로 보면 헬라 언어로 복음이 연결된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시대에 청소년과 청년들이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을 때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써야만 한다. 이것은 인터넷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 원리로 적용하면 알 수 있다. 스마트 폰과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소통하는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인터넷을 성경의 선지자 같은 역할 하게 하면 된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과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한다. 그 죄로 인해 끊어진 네트워크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하기 위해 다른 네트워크로 우회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시 었다. 하나님께서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죄를 알리고 회개하면서 예수님 구원의 복음을 알리는 방법으로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유지하고 통신을 하는 방법 중에 스마트 폰과 인터넷이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실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알리어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에 맞게 쓰면 된다. 젊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스마트 폰과 인터넷에 실어서 알려 야 한다. 이것을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한다. 어느 골방에서 끊어진 관계로 있는 아이들을 인터넷으로 불러내어 우리가 선지자처럼 우회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할 일이다. 교회가 청소년과 청년을 위하여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면 누군가가 인터넷을 통해 댓 글로 우리를 조롱할 때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써 그들의 악행을 용서할 수 있어 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실 때 군중의 놀림을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품고 이길 수 있는 힘 즉 성령이 우리에게 있어 야 한다.
코로나는 이제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와 가정이 불안해지고 있고 가정 폭력이 20% 이상 늘고 이혼도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 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크리스천은 어떤 한가? 우리가 가진 공공신학적 관점으로 어떤 사회적 역할이 필요한 가를 알아보려 한다. 코로나 사태는 모든 오프라인에서 일어나는 것들에게 대해 다시 쓰게 되는 시기가 도래했다. 경제, 정치, 교육, 사업, 종교 등 사회적 모든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가지는 사회적 책임이 어떻게 변하는지 공공신학의 입장에서 알아보게 될 것이다.
교회가 공적인 윤리인 사회적 책임이 많이 부족한 것은 모이는 예배만은 위주로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 흩어지는 것 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은 예배를 끝나고 사회에 나갈 때 삶으로 드린 역동적 예배가 보이지 않았다. 삶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이것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에서만 성도이고 사회에서는 일반 사람과 못하는 죄를 서슴없이 하고 있다. 더욱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공공의 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회는 삶으로 예배들이면서 공공의 선을 하나님의 대사가 되어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공공의 사회에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이것이 공공 신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제 교회가 해외선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데 코로나 이후에는 해외선교와 같이 지역과 사회와 가정으로 돌리는 것이 공공 신학의 시작이다. 사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진 공공신학의 부재를 해결하려면 선교의 방향을 다시 살려야 된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전도와 선교에 있다. 선교적인 교회는 당연히 공공신학의 공공 윤리로 사회를 인도할 책임이 있다. 교회는 해외에 있는 미전도 종족의 선교도 중요하지만 이제 가정과 사회로 눈을 돌려야 한다. 코로나가 교회에게 세상의 힘든 사람들이 바라보라고 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 선교사들도 힘들어하고 있다. 가정이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곳을 향하는 교회 역할을 찾아보고 디지털 비대면 방식을 통해 교회의 가정 예배가 어떻게 세상에 디지털로 연결하도록 하는지 알아보겠다.
코로나 때에는 많은 교회가 욕을 먹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무너졌었다고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맛을 잃었고 그 맛을 잃은 것조차 모르고 있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적으로 세상을 생각하는 것이 모두가 자기가 이룬 것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경제적인 것 또한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 청지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 한 많은 성도들이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이혼을 하고 있다. 이혼통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혼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와 성적인 문제가 세상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문제가 실제 삶에서 개인적인 윤리와 성적인 문제, 경제문제까지 변하게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삶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이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다.
또 한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고 어떤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고 어떤 일상적인 생활과 취미 생활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기존에 재능을 보이던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헬레니즘의 문화로 세상을 이분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은 결코 이분법 적으로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이 하지 않은 일로 구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다.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는 “너희가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성경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보면 무엇을 하든지라는 말이 나온다. 즉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심지어 나 자신도 하나님이 창조 하신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지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청년과 청소년들이 직업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직업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과 소년이 거룩하게 살면서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말씀안에 거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무엇을 하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빛나게 한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만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개인 생활에 나오는 것과 교회생활을 구분하면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삶이 결국 사회적인 생활에서 경제적인 돈의 개념으로 넘어갈 때는 마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런 행위는 결국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이 된다. 두 주인이 이분법적으로 세상과 종교가 구분하면서 섬기게 되면서 세상에서 악한 행위를 할 때 하나님은 마음의 율법을 통해 경고 하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나마 있던 양심은 작동이 안된다. 결국 돈에 우상이 되어 종교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긴 것이아니라 한 주인인 재물만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마치 종교 중독자처럼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니을 섬기는 것과 같다. 이런 종교 중독은 신앙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게 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이 목표이고 과정이 지만 종교 중독자들은 신앙을 도구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 결국 우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교 중독자는 보이는 곳에서 약자를 위해 배려는 하는 모습을 보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지독한 욕심쟁이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많지 않은 것이다. 모두다 자기가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돈이 우상을 쫓는 것이다. 돈에 기대서 안전한 생활을 보장 받아 헹복에 볼려고 하시만 결국 밑바닥에 구멍이 난 그릇처럼 부어도 부어도 불행과 허전함을 가지게 된다. 이런 형태가 두 주인을 섬기는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도 보인 다는 것이다. 그런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에를 들어 돈이 생기면 약자를 도와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실상 그런 사람들이 돈이 생기면 돈이 우상이기 때문에 약자를 위해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경우이며 증거가 된다. 이런 성도들이 늘면서 결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못되며 공적인 책임에 비난을 받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사회생활을 하면 일반 사회인들이 보게 될 때 개인적인 윤리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 같거나 못하게 되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으로 제자가 되어 영성 형성 제대로 되었다면 이렇게 교회가 욕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인 성도들의 영성 형성되어 나무가 제대로 자랐다면 그 나무들이 모이면 숲이 되듯이 그 숲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논하면서 교회가 점점 빛을 내게 되는 것이다. 즉 각자 개인 윤리가 모인 공공 교회와 공공 신학의 모습을 담게 되는 것이다. 성도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듯으로 제대로 삶을 산다면 푸른 소나무처럼 되고 공교회와 공공신학은 이런 교회 성도들이 모여 숲을 이루기 때문에 숲 전체가 초록으로 빛나는 것이다. 이 처럼 개인 성도와 공 교회는 숲처럼 보이고 연결되어 있다. 이제는 공 교회와 공공신학을 바라보는 눈이 개인과 신앙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이고 지금까지 마주하는 사회적 문화적 현상과 상황에 어떻게 개입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각 교회 공동체가 주체적 역할을 주장하기보다는 지역 교회와 공교회가 복음의 가치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를 만들고 모든 사회와 가정이 참여하는 지역 사회의 일환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즉 이웃과 지역 공동체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들과 지역 다른 공동체의 협력과 지역 이슈에 참여하고 올바른 태도로 각 성도들이 사랑을 보이기 위해 이웃을 만나야 한다. 마치 예수님이 사회적 약자들과 만나시고 치료하면서 먼저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도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공동체적 성격으로 제자들에게 하기 위해 다양한 그룹으로 활동하고 만나시고 공감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들에게 다가가 다양한 사회의 통로를 확보하면서 사회적 공감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야 가야 한다. 이렇듯 전체를 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공 교회와 각 교회가 어떻게 다양한 사회적 채널로 이어지는 공감 능력이 있어야 한다. 공감 능력이 가장 큰 분이 바로 예수 님이시다. 공감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람의 공감 능력의 극치를 보이셨다. 공공 윤리는 이런 공감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공감능력은 상황에 따른 깊은 인식이 필요하다.
사실 초대 교회는 전염병이 창궐한 시대였다. 많은 전염 병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힘들어 하였다. 그 때의 초대 교회의 크리스천들은 전염병으로 힘들어 하는 상황을 인식하고 공감하면서 이웃들에게 다가갔다. 그런 어려운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필요를 공감하고 채워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된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지역 사회가 변하고 다른 지역사회가 보면서 이제 수많은 지역과 나라로 이방사람들에게도 복음이 퍼져갔다. 이런 공감하는 힘이 로마와 유럽으로 전파하고 전세계로 전파되었던 힘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시작에서부터 인간의 다양한 삶에서 나오는 모든 상황의 문제를 해결하는 형태로 최선을 다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잃지 않았다. 즉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까라는 관점으로 모든 문제를 보았고 그런 태도는 성령 하나님이 임재한 그리스도인 관점이 되었다. 당연히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상황을 제자의 관점으로 본 상황적인 인생의 여정으로 연속적으로 보았다. 이런 것을 가지는 관점이 바로 성령하나님이 증거하느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성령 관점 관계 원리가 된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은 교회 공동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회와 이웃과 문화를 보아야 한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의 관점은 비전으로 발전하면서 교회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빛으로 사회적 통로를 해석하여 주고 확보하면서 문화가 가진 공감 능력으로 적용하여 변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라와 사회에 있는 다양한 문화를 변혁하는 것이 공감하는 능력으로 빛을 나게 된다. 이 빛은 성경을 중심으로 각 성도들이 성령 관점으로 일어나는 복음의 능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코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다. 성경의 신약과 구약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인간에 대한 관계가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 세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세상의 상황에 대한 깊은 문화에 대한 변혁 인식은 시대를 분별하고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성령 하나님이 임재한 전도자의 길이다.
코로나 19 사태 후에 교회는 많은 상황이 힘들어지고 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전환하게 되면서 많은 교회 성도들이 온라인으로도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 성장주의로 갔었다. 사실 교회에는 선교와 전도의 틀이 되는 흩어지는 교회의 원리가 있다. 사람이 교회 이므로 교회가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영성의 역동성을 가지며 공감능력을 크게 가질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흩어지지 않고 모이기만 하는 것이 결국 영성의 역동성이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해외 선교가 흩어지는 교회로 세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강점을 국내 쪽으로 흩어지는 교회의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에 모든 해외 선교지에서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많은 해외 선교사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특히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자가 격리나 장소와 비용에 대한 대책도 없다. 선교지에 대한 고민과 선교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주거 문제, 예배 문제는 더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문제로 사실 선교사들은 다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자들은 심리적인 공황에 빠질 수도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이런 모든 것을 공적인 교회가 마치 전쟁에서 최전방에 있는 병사처럼 지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코로나 상황에 대한 것이 한국 교회가 가진 선교의 책임이 있다.
이런 코로나 사태를 겪은 교회가 연합하여 앞으로의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다. 선교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여러 의무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적 선교는 해외에 그동안 많이 치중하였지만 이제 부터는 성령 관점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선교를 지원해야 한다. 그러면서 지금 교회 공동체는 연합하면서 은퇴나 해외 선교사들이 가진 문화적 이야기와 경험을 다시 정리를 해주고 국내 사회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훈련시키고 다시 해외를 파 송하는 순환적이며 역동적인 교회 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이며 성령 관점으로사회적 채널이 살아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교회가 선교적이기 때문에 선교를 포기하는 것은 교회 스스로 교회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선교는 교회의 기독교적 삶에서 성령 관점으로 느낀 근본적인 세상의 필요성이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사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데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빛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 관점으로 약자들과 같이 공감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 성도들의 삶도 하나님의 의를 입는 데 있다.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입는지 알아야 한다.
이 과정은 모든 것이 은혜이며 성령하나님이 도움으로 가능하다. 즉 이것을 성령 관점으로 보면 전도와 선교는 사람들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처음에는 복음을 전달하면 그들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구도자로 살게 되며 새창조가 된다. 다음에는 제자로써 진리를 듣는자로 변한다. 예수님의 제자와 같이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며 비전을 갖게 된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말씀을 계속 접하면서 말씀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도자로 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더 깊은 영성 형성이 되어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이 때 세상의 진리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류전체와 공공의 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지는 선교적인 차원에서만 하나님의 의를 알리는 진정한 목적을 가지게 된다. 마지막 단계는 성도가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이 생긴다. 이 소망은 소명과 사명을 바뀌어 진정한 하나님의 선과 의인 하나님의 의가 인류전체를 위해 무엇을 하는 지에 대한 성령 관점으로 영성이 적용이 된다. 이렇게 충성스런 성도는 소명과 사명으로 교회의 삶에 완전히 동화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령 충만해지며 성령의 능력을 완전히 의지하게 된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부활에 같이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공공의 선으로 세상에 보이게 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추수할 때 말씀하신 것처럼 열매가 희게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의 대사로 삼고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교회와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르심의 상황을 한국의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안에서 책임져야 한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더욱더 선교적 역할이 사실 공고히 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에 선교 현장에서의 선교사가 귀국할 때 교회 공동체가 선교사들이 필요하다면 지원을 해주는 것이 절실하다. 예를 들어 웨슬리 사회 성화 실천본부는 선교관을 운영하여 25채의 집을 운영하며 코로나로 귀국하는 선교사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예수님의 몸이다. 세상의 구원을 오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소망의 빛을 발해야 한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교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여기 감사하는 예배는 예수님의 성격과 힘과 능력을 몸과 머리이신 예수님과 연합된다. 이런 예배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들어야 한다. 예배는 형식이 아니며 생활이다. 예배는 드려지는 것이다. 코로나는 이런 예배를 세상 속에서 보여주는 기회가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다. 초대 교회는 모이고 흩어지는 예배였다. 지금의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처럼 삶으로 보인 예배가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성장 주의로 많은 초대형 교회가 사회에 많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교회 공동체는 약자의 소리와 다양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 못하면서 공공 신학적 관점에서 사회적 채널에 민감하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코로나의 확산에 교회가 욕을 먹는 지경까지 가고 있다. 교회가 모이는 것만은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젠 모이는 교회가 중심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서 이런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소외되었던 청소년과 노약계층을 좀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가정 예배를 중심으로 청소년의 회복과 다음 세대를 키우며 가정을 회복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일한 독생자 아들을 아낌없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 사랑은 근복적으로 변하지 않는 스토리로 남아 있다. 이것이 성경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은 진리의 빛으로 진리의 길로 안내를 한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의 지상 사역 기간에 기록된 복음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부활 그 이후에 성령 하나님을 주시었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세례로 도 계속되었다. 그들에게 성령하나님이 임재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이 적용되고 그들의 삶에 관점이 되었다. 이것이 성령 관점으로 적용하는 삶이 된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를 가르침에서 성령 관점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근본 핵심을 성경에서 해석할수 있다. 즉 용서와 사랑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했다. ‘나를 사랑하느냐’란 질문에 모든 것이 숨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랑은 이웃을 사람하게 되는 영성 형성의 핵심이 되게 한다. 이 제자의 삶은 소명과 사명가지고 교회의 삶에 완전히 동화되며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가지게 된다. 심지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좀 더 확장하게 만드신다. 그 관계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가족을 만들어 서로 사랑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할 대상을 만드시기 위해 남녀를 구분하게 하시고 부부가 되게 만드셨다. 그 부부가 아이를 낳아 가족을 만드시면서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느끼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알게 하시었다. 부모들에게는 자녀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보이지 않은 사랑의 증거이다. 이렇듯 주어진 모든 자연과 세상에 주어진 가족은 바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이제 코로나 이후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많아지며 가정은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사역지가 되었다. 가정이 먼저 청소년을 찾아 가고 교회도 청소년을 찾아 가야 한다. 청소년들은 이제 모바일을 놓지 않고 매일 중독 증세를 일으키며 불안해 하고 있다. 이 디지털 세계에서 친구를 사귀고 움직인다. 예수님이 어두운 땅 갈릴리까지 오신 것처럼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어두운 디지털의 세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디지털이 어두운 세상이니 교회는 구분해서 산다고 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청소년에 접근할 기회를 가지기 위해 모이는 예수님처럼 어두운 세상에 임마누엘 한 것처럼 교회가 디지털 모바일 예배로 모이도록 해야 한다. 이 디지털 예배도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달하게 하는 예배가 되게 하고 각자의 가정예배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만들어지면 가능할 것이다. 이때 가정에서 영성이 회복하려면 성령의 임재가 흩어지는 예배로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성령 관점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성령 관점을 가진 교회가 가정예배에서 사회적 공감 능력을 키우고 작은 것에 선을 행하도록 회복시키며 선한 영향력의 흩어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성경 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은 교회, 가정, 사회, 학교가 있다. 이제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곳은 가정밖에 없다. 지금 코로나 이후 교회는 주일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다. 수많은 교회가 이단이 득세하면서 주일학교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자녀들조차 이단 때문에 주일학교를 보내지 않는 다. 영아 부 있는 교회가 73% 정도밖에 없다. 학교는 진화론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 미션 스쿨도 있지만 소수에 있다. 학교는 왕따. 미디어 중독 때문에 영성 교육이 무너지고 있다. 물질적 풍요가 영적인 가난을 낳고 있다. 이런 시대에 비대면 예배를 하게 되는 교회 공동체의 위기 속에서 소망을 가진 흩어진 교회인 가정예배가 살아나기를 바라보고 있다.
지금 전 세계는 모바일의 성장성을 보면 세계 모든 사람들이 기술의 진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도권을 가지고 기술의 진보를 이루는 나라나 개인, 기업이 등장할 때 이는 모든 사람들이 쓰는 인터넷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모바일 인터넷은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 이런 주도권 싸움은 결국 거대한 기업이 되고 사람들의 문화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모바일 디지털의 변화는 코로나 이후에 이제는 비대면 많은 나라가 모바일 디지털로 바뀌게 될 것이다. 수많은 회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싸움을 하지만 지금의 교회 공동체 또한 이런 모바일 디지털의 변화에 따라가야 한다. 공공 신학의 사회적 채널과 사회적 공감능력을 가지려면 이런 모바일 디지털의 채널을 만들고 교회 공동체가 공동으로 다음 세대 교육으로 대응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한 영성의 회복은 교회 공동체가 오프라인으로 모여서 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에 디지털로 인한 흩어진 가정예배를 통해 성경 교육을 살리면 된다.
그러므로 가정도 교회와 같이 성경 교육을 통해 제자 도 영성으로 회복해야 한다. 사탄의 공격에서 교회를 지키는 것은 바로 가정에서 예배를 통해 성경 교육을 회복하면 된다. 부모님들이 제자 도 영성으로 성경 교사가 되어 자녀들의 신앙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성경교사가 할 일은 가정 예배를 인도하면 된다. 인터넷 디지털을 통한 성경 교육받은 기존의 부모님들은 가정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고 서로 나누고 자녀를 예배와 성경 교육으로 인도해야 한다. 디지털 영성 교육을 받은 부모들은 누구나 가정예배를 할 수 있게 하면 된다. 가정 예배는 찬송과 성경말씀 기도가 있으면 된다.
이제 코로나 이후에 모바일 디지털로 인한 흩어지는 교회가 사회의 통로로 연결하는 성령 관점으로 말씀이 적용되는 삶이 필요하다. 흩어지는 교회인 가정 예배를 위하여 제자 영성을 만드는 성경 교육이 필요하다. 초대교회의 영성을 회복하려면 제자 도 영성이다. 초대 교회는 사실 핍박으로 인해 가정 중심으로 흩어진 교회였다. 흩어진 교회가 연합되어 순회 설교자들이 오면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가정 교회가 되었다. 그런 가정 교회가 생명력이 더 있었고 예수님은 닮은 영성으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닮은 교회가 가진 성령 관점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성령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이 세상을 해석하고 세상의 흐름을 공감하며 구별되는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가진 이런 개인적인 영향력으로 비 기독교인들에 성경의 본질과 진리를 번역해주어야 한다. 이 제 공공 신학을 통해 공교 회의 특성을 가지고 본질적으로는 일치하고 비본질적으로 자유를 주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으로 품는 공교회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 사태의 사회적 혼란에서 있어서도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심정으로 예수님이 머리이신 몸이 움직이는 교회가 되듯이 역동적인 교회인 흩어지는 교회가 가정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세상에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다. 이런 명제 속에서 교회 공동체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성령 관점으로 삶과 사회 책임에 대해서도 성도들은 선함으로 악을 이기며 사회적 약자들과 채널을 만들어한다. 만약 악한 사회가 되더라도 선으로 악을 대할 때 하나님 나라 백성인 교회가 선함이 드러나므로 빛과 소금이 되고 마침내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많은 교회가 코로나 이후로 힘들어 한다.
질문)코로나가 교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 까.
아마도 교회가 코로나 이후 사태의 어려운 시기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처럼 고난과 수난의 시대에도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시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지 못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것이다. 교회는 물처럼 흘러가는 곳이다. 예배가 중요하고 복음이 중요하며 예수님의 생명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지역교회는 이제 좀 더 다양함으로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흐르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정이 변하고 청소년들이 변하는 모습을 성경 교사 양육 과정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 특히 부모님들의 변화가 성경 교육과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본 글은 성경 교사가 제자의 길을 가는 소명과 사명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부모님과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성경 교사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목표이다.
특히 지역 교회의 청소년들은 공부와 진화론, 포스트 모더니즘 때문에 믿음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사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확신하면서 듣는 사람들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며 사명과 소명을 가진 사람이다. 믿음은 사람의 행위로 먼저 이루어지지 않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상태로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가르치는 소명 자가 있다. 바로 멘토링을 하는 성경 교사이다. 지금 이 세대에게 주는 다음 세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안에 있다.
소명 자는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맡긴 사명이 있어야 한다. 성경 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은사와 제자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같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받았다. 원래 성경 교사는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 중에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에는 항상 성경 교사가 있었다. 사도 바울과 스데반도 교사를 통해 부르심의 소명과 하나님이 성경 교사 증인으로써 보내시고 맡기신 사명을 받았다고 한다. 성경의 보이지 않는 증거들을 주장하며 바라는 것들의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하는 성경 교사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특히 스데반은 성경 전체를 스토리로 이야기하면서 순교자 증인이 되는 성경 교사의 역할을 자초하였다. 그로 인해 돌에 맞아 스데반은 순교를 하였고 예루 살렘의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 로마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다. 하나님은 예루 살렘 성도의 핍박으로 전 세계에 복음이 퍼지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맡긴 성경 교사 사명을 끝까지 잘 해낸 것이다. 그가 가진 소명은 증인의 삶을 짧게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소임을 다한 것이다.
이렇듯 본 글은 이번 사역인 지역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인 성경 교사를 양육하는 경험을 적는 데 있다. 이 사역을 토대로 어떻게 제자로서 예수님을 경험하고 생명수를 흘러 보내야 하는 지 다음 세대 성경 교사 양육을 위하여 멘토를 통해 얻었던 내용과 경험을 적어 보려 한다. 또한 본 에세이는 이번 성경 교사 양육 코스 교육 과정을 통해 부모님들 누구든지 받아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에서 성경 교사 양육하는 과정 중에 하브루타와 거꾸로 교실에 대해 알아보고 어떻게 실천적 경험을 청소년들에게 영성을 주는 지 논하겠다. 그러므로 써 전체 성경 교사 양육 인도자 과정에서 느낀 사역 훈련의 목표, 도구, 실천 과정과 플랫폼의 미래 방향을 어떻게 할 것인지 서술하여 보겠다.
이번 본 청소년 청년 사역은 코로나 이후로 힘들어하는 지역 교회를 위해 청소년 청년 성경 교사 양육 과정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는 가르치고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대위임 명령 사명위에 있다. 이는 성경 교사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 제자의 위임 명령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교사를 부르시고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맡기신 것이다. 제자의 사명은 교사의 소명으로 온다. 교사는 소명과 사명이 같이 있다. 소명은 부르심에 대한 나의 소명이며 사명은 보내심을 통한 나의 사명이다. 이렇게 사명과 소명은 제자로서 가진 대위임 명령의 말씀 속에 있다. 거기에는 제자로서 세상 끝까지 가서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는 사명과 소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보내심과 부르심을 같이 받고 하나님이 맡긴 사람들이 있다. 바로 부모님 들이다. 자녀들을 가르치는 부르심과 부모로써 역할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부모님들이 이 사명을 망각하고 자녀 신앙 교육을 소홀이 하고 있다. 결국 모든 부모님들이 신앙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의 사명을 받고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와 교사는 영적으로 본을 보이는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선포 자이며 전달자이다. 하나님의 복음에서 나오는 은혜와 기쁨을 전달해야 한다. 본이 되는 기도로써 부르심의 소명자로써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로써 복음의 기쁨을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안내해야 한다. 교사는 충분히 소명자와 사명자로 알고 안내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사는 청년 청소년에게 비전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람의 입장에서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명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하나님의 입장으로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하는 것이다. 아 두가지를 증거로 삼아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과 스데반이다. 사도 바울과 스데반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으로 증인이 되는 것을 두려와 하지 않았다. 교사는 바로 복음을 위해서는 교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사명과 소명으로 한다고 적었다. 교사는 이런 은혜의 경험을 가지고 믿음의 증거를 청소년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이 현 시대는 바울처럼 거대한 인본주의 진화론적 사상을 거부하면서 대적해야 한다. 성경 교사는 받은 성령의 계시를 통해 교사로써 제자로서 세상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의 사역 자들을 통해 다음 세대 성경 교육에 관한 문제가 있다. 이들이 공감하는 것은 현 상황은 세대적 차이로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 세대에 다음 세대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에 방식이 다르다. 다음세대는 디지털을 이해하고 그 것을 통해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하기가 이해하기 쉽다. 메타버스나 SNS로 공감하는 스토리가 증거로 다음 세대에게 인지하기 쉽다. 현 세대가 다음 세대가 가진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같다. 사역자로부터 들은 상황들은 더 심각하다. 지금의 모든 교회가 다음 세대에 교육을 강조하지만 정작 다음 세대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는 사역은 많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 현 세대가 결국 다음 세대를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 교사 중심에 대한 문제점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의 학습자로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자질의 부족과 현저한 소명과 사명의식 떨어지는 결과를 내고 있다.
또한 성경 교사의 교육 교재가 세상의 사지 선다의 주입식과 객관식으로 만들어져 영성을 가르치는 교재로써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주입식과 객관식은 삶과 연결이 안되고 공허한 메아리고 흘러 간다는 것이다. 성경 교육은 영성이므로 스토리 중심 내용 중심과 주입식의 교육으로 다양한 문제가 있는 삶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하려면 주입식이 아니 스토리를 아이들에게 만들게 해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무너지는 교사의 위기가 있지만 성경 교사 중심의 교육을 해체하고 청소년과 청년 중심의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해야 한다. 아이들이 주체를 가지며 성경 스토리를 해석하는 것과 믿음으로 증거가 생기며 증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는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소명과 사명을 가진 교사는 영혼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러운 준비를 하여야 한다. 매일 같은 내용을 가르치더라도 좀 더 청소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런 준비에는 영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영적인 은혜와 기도가 준비되어야 한다. 지적인 준비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성경 스토리를 준비를 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알도록 깨달아서 준비를 해야 한다. 교사들은 인격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말과 행동이 하나의 청소년을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성경 교사는 듣는 마음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인도한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청소년들을 존중하며 스토리를 들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또한 청소년들이 불쾌하게 하여도 교사는 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 소명과 사명을 가진 성경 교사는 목표와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성경 교사의 정체성과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성경 교사가 영성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통로 축복의 통로를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결코 영성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혜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영성은 받는 것이며 그것을 받은 길은 오직 믿음 밖에 없다. 믿음의 통로가 청소년, 청년들에게 있어야 한다.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받은 자들은 증거가 생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알게 된다. 이것을 청소년 청년이 알고 믿음을 받을 때 믿음의 통로와 믿음의 증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교사는 어떤 때도 상관없이 말씀을 축복을 주고 아이들이 믿음의 통로가 만들어지길 기도해야 한다. 성경교사가 인도하는 성경의 증거와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통로가 열리게 된다. 결국 성경 교사는 하나님이 청소년을 축복하는 통로가 되는 사람이 된다. 그 하나님의 축복은 다시 성경 교사가 축복받게 된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소명과 사명을 받은 성경 교사에게 말씀의 축복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사람을 축복하는 생명의 통로를 부모님들이 교회의 성경 교사들에게 일임하고 맡긴다. 부모님들은 방관하고 지켜보기만 한다. 하나님이 자녀를 맡긴 사명을 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인성과 가치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일차적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애착 관계가 있어서 아이들의 본성은 부모님의 품을 그리워한다. 이것은 사랑의 눈으로 기쁨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이들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아이들은 인정을 바라고 부모님의 인정이 바로 애착 관계로 영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정과 칭찬받은 아이들은 기쁨의 용량이 충만하게 된다. 기쁨의 용량에 따라 청소년이 영적인 정체성을 불안하게 또는 안정되게 드러내고 있다.
아이들의 정체성은 결국 부모님들의 영적 관계성에 영향을 받는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불 안정하다 면 아이들의 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도 불안하다. 아이들의 가치관이 재물이면 부모님들이 어떻게 살았는 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부모님이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산 증거가 보인 것이다. 이 영적 문제를 그대로 두면 안된다. 악한 사탄이 역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재물이 최고라는 가치관으로 살다가 지옥을 갈 수 있다.
이런 문제는 부모님과 함께 기도와 복음으로 자녀들의 영적 세계관을 고쳐 나가야 된다. 복음에는 예수님의 가치기 순종과 사랑으로 기쁨의 스토리가 가득 차 있다. 성 육신으로 십자가로 이루신 예수님의 스토리를 부모님과 아이들이 같이 받아야 한다. 부모가 주는 최고의 가치관은 부모님이 보이는 기쁨의 스토리가 아이들의 기억으로 채워지며 칭찬과 인정이 힘이 된다. 부모님들의 영적 가치관을 주는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아이들에게 적용해주어야 정체성을 알게 한다. 이것이 아이들의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데 정체성의 가치관을 복음을 통한 기쁨의 부모님의 스토리가 없이 제대로 형성시켜 주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바람에 부는 뿌리 없는 나무 같이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은 근본적 성경교사의 일차적 책임을 갖는 사람이다. 자녀의 영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부모님이 가진 영적 스토리가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 부모님은 성경 교사의 정체성을 가진 보조 성경 교사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렇듯 성경 보조 교사인 부모님을 포함한 성경 교사는 예수님의 스토리텔링을 말하는 증인과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 단지 지식만을 주는 존재가 되지 말고 삶으로 증거를 드러내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경 교사는 성령 하나님의 스토리가 간증으로 증거와 지혜되어 내면화된 교사의 삶으로 가르쳐야 한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스토리가 창조, 임마누엘, 십자가, 부활, 재림의 스토리가 보이지 않는 증거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단지 지식이 아니라 성경 교사의 몸과 마음에 믿음의 말씀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 영성으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인격적이며 공동체로써 관계 적이기 때문에 열정이 있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부모님과 성경 교사가 같이 보조를 맞추는 일을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한다.
이런 성경 교사는 소면과 사명의 정체성을 가지고 부모님과 같이 성경 교사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부르심의 소명과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주지 않고 성경 교사를 하는 상황은 다음 세대를 무너지게 한다.
그런데 사면과 소명은 거의 없이 정체성 교육도 하지 않고 교회는 성경 교사를 선발한다. 전문적인 경력이 없이 사명과 소명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임의적으로 선발한다. 많은 교회가 성경 교사를 소명과 사명을 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는 지에 대한 교육과정도 없이 성경교사를 투입한다. 또한 소명과 사명의 신앙적 정체성을 고려 하지 않은 채 성경 교사를 선발하면서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해 부모들은 성경 교사를 탓한다. 이렇게 부모님과 성경 교사들은 서로 무책임한 결과를 초래하면서 다음 세대가 떠나는 것에 대해 교회가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므로 성경 교사의 자질은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서로 관계가 이해되도록 통로가 되어야 한다. 청소년과 하나님과의 관계, 교회와 학생과의 관계, 또한 청소년과 부모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통로가 되어주는 종합적인 고려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고려하여 일정한 성경 교사 교육을 받고 일정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성경 교사를 해야 한다.
그런 과정이 있은 후에 청소년 부의 성경 교사가 청소년의 부모님과 간담회를 갖고 부모님이 성경 교사의 보조 역할을 하도록 만들고 또한 부모님은 청소년들이 집에서 청소년 목장 체계의 아이들 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 교사는 이런 전체를 같이 부모님과 맞추어 가야한다. 그러면서 교회는 부모님과 함께 성경 보조 교사의 역할을 하면서 성경 교사의 정체성을 세워주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초대 교회의 제자 훈련을 현대 교회의 성경 교사 양육 코스 플랫폼으로 도입하고 하브루타 방식과 거꾸로 교실로 연결하여 성경 교사 인도자 과정을 온라인으로 직접 교재를 통해 가르치는 사역을 진행하였다. 우선 처음 사역은 전체 양육 코스 진행을 위해 인도자 과정을 총 8주를 진행하였다. 각 지역 교회의 청소년 청년 담당의 2명의 장로님과 3명의 전도사님을 모시고 인도자 과정에서 많은 토론을 진행하고 느꼈던 것들을 소개하려 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처음 만난 사람은 나병 환자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성 육신 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난하고 비참하게 이 땅에서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 분의 뜻이었다. 이런 예수님을 제자들은 옆에서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을 예수님은 몸으로 실천하였다.
이렇듯 지금의 교육도 몸으로 느끼고 영성을 실천하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질문과 경험을 통해 인격으로 실제 체험을 해 주셨다. 요한 복음의 6장 5절 생명의 떡을 나눈 기적을 보여 주시면서 복음의 영성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체험하게 하여 다. 그때 특별히 제자 빌립을 영성의 실체적 체험을 주기 위해 예수님이 관점으로 실천적인 질문을 하시었다. 제자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먼저 물으신것이다. 예수님은 질문을 빌립에게 믿음을 통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지에 대한 차이를 스스로 알게 한 것이다. 이런 빌립은 예수님이 떡을 나누어진 이후에 산을 옮기는 믿음을 체험하였다. 결국 제자 빌림은 하나님의 능력과 무한함을 경험하면서 한계가 없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리의 갈망이 있다. 이 갈망이 질문이 되어 구도자가 된다. 결국 구도자가 되는 모습은 창조주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 위한 새창조 역사이다. 그러므로 청소년, 청년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질문을 체험으로 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창조주를 찾게 하는 구도자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브루타 방식의 통해 만들어 가는 방법을 도구로 하고 있다.
하브루타는 유대인이 시작한 다음 세대에 교육하는 대화식 교육 방법론이다. 하브루타의 방법은 성경 교육에서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면서 종합적인 사고를 주는데 도움을 준다. 하브루타는 기존의 교회에서 주는 일방적인 주입식 보다 좀 더 다양한 경험을 준다. 예를 들어 성경 본문을 공동체안에서 짝을 이루어 질문, 대답을 통한 실제적 교육의 효과를 준다. 질문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생각의 전환은 질문을 하는 데 있다. 우선 질문을 하면서 무엇을 아는 지 무엇을 모르는 지를 알게 된다. 그 다음에 많은 질문속에 관점이 차이를 이해하고 대화, 토론, 논쟁하면서 실제적 배움을 가진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복음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계속에서 일어난 관점의 차이로 접근하면 그 은혜가 장작불이 타듯이 더 강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관점으로 차이가 오면서 빌립이 느꼈던 산을 옮기는 믿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을 이해 해석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적용하는 과정을 실천적 활동으로 만들 수 있다. 이웃에 대한 공감 능력 분만 아니라 이웃이 질문의 파트너가 되어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공동체적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 가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도를 통해 서로간의 격려로 이해하고 복음이 능력이 확장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하부르타의 상호 작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적인 어려움을 이기게 한다 특히 청소년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적 어려움으로 상처가 생기어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한다. 관계를 통해 알아가는 메타인지는 4가지가 있다. 첫 번째 내가 아는 영역과 남들이 아는 영역이 있다. 두번째 내가 아는 영역과 남들이 모르는 영역이 있다. 세번째 내가 모르는 영역과 남들이 아는 영역이 있다. 네 번째 내가 모르고 남들도 모르는 영역이 있다. 그 중에서 하부르타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영역을 알게 하여 좀 더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 되게 하는 것이다. 자기는 모르는 데 다름 사람이 아는 것을 통해 충고와 권면을 받아서 변화되는 자화상을 가진다. 또한 나는 알고 있는 데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을 하브루타 방식의 질문과 응답으로 알게 한다.
나는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는 것은 하브루다의 방식으로는 힘들고 결국 거꾸로 교실에서 교사들의 공동체적 질문을 통해 공동체적 학습과 스토리로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거꾸로 교실은 한마디로 학생이 선생을 거꾸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즉 선생님이 질문을 만들어서 공동체적으로 학습을 스토리보드로 만들어 선생님 한테 영상을 만들 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가르치듯 이해를 시키게 되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알게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는 질문은 결국 공동체적인 과정을 통해 알아간다면 거기서 만들어진 지혜는 장작불만큼 효과가 크다. 영성은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각자가 주신 관점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소통 방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성경교육에서 쓰이는 하브루타와 거꾸로 교실을 적용하여 대 질문과 소 질문들을 가지게 하는 것이 좋다. 대질문은 거꾸로 교실에서 하고 소질문은 하브루타로 하면 효과가 크다. 대질문에 대한 것은 오직 성경 교사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대 질문에 대한 공동체적 본질을 창조주 하나님을 연결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소질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질문으로 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중생케 하는 새창조의 법칙이 있다. 즉 복음을 통해 거듭나기 위한 것은 산모가 고통을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원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정체성에 대한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사막에서 진리를 찾아 가는 구도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과 같다. 정체성의 대 질문인 “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청년과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질문들을 좀 더 객관화 시켜서 그 질문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유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소 질문을 가지고 하브루타를 통해 청년과 청소년들이 일대일로 대화를 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왜 나는 부모님을 선택할 수 없지?” “왜 나는 태어날 장소를 내가 선택하지 못하지?” 등의 소질문을 가져야 한다.
이런 하브루타의 대 질문과 소 질문을 통해 청소년들이 서로의 질문을 하고 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하브루타는 이런 방식으로 서로간에 질문을 통해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메타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메타 인지는 어떤 것을 모르고 어떤 것을 아는 것인지 자기가 아는 것이다. 이런 메타 인지의 4가지 순서를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아는 지를 알게 한다. 순서는 처음 마음을 열기가 시작이고 다음에는 내용 파악을 진행하며 내용 연구가 심층적으로 이해하며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의 개념을 알게 하는 개념이 하부르타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메타 인지가 질문으로 통하면 6하 원칙에 의해 질문에 의해 서로 폭발이 일어나는 테 그것 중에 모르는 부분이 터지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 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하브루타를 진행한 후에 대질문에 대한 거꾸로 교실을 어떻게 성경 교사가 수업을 하는 지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대 질문과 소질문의 차이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브루타를 끝낸 아이들이 공동체 5명에서 10면 사이에 모여서 대질문에 대하여 공동체적 학습과 응답을 하는 지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저 소질문을 통해 이루어진 하브루타를 하는 이유와 거꾸로 교실의 공동체적 학습과 하브루타 학습법의 개념 차이아 어떻게 나는 지 어떻게 활동하는 지에 대한 이해를 도와야 한다. 청소년들은 공동체적 학습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미리 예습을 해야 되는데 하부르타를 소질문으로 하면서 그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개인끼지 1:1로 질문과 대화식으로 상호 이해와 지식과 지혜를 어떻게 얻는지 방법을 좀 더 확대시키어야 한다. 결국 하부르타는 공동체 학습을 위한 예습의 효과를 가지게 된다.
하부르타는 1:1로 하기 때문에 비공개로 하고 거꾸로 교실은 공동체 학습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야하는 영역을 좀더 확대 하는 것을 하브루타와 거꾸로 교실과 융합하게 하는 것이 이번 성경 교사 양육 과정 교육의 코칭 방법이다.
거꾸로 교실은 미국에서 Flipped school 로 시작된 것이며 한국에서도 많은 학교가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 끼리 직접 선생님이 문제를 통해 공동체적 학습을 제시하면 그에 대한 결과를 동영상이나 다른 응답 방법을 통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 성경교육 방법론은 하브루타와 거꾸로 교실을 융합하여 새로운 교육 방법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 교육 방법의 이름을 거꾸로 영성이라고 하고 교회에서 진행하도록 이 교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 방법은 성경 교사가 미리 만든 교재나 가르치는 청년이나 청소년 심지어 성인들이 미리 동영상이나 교재를 통해 온라인으로 학습자가 미리 집에서 미리 학습하고 와서 교회에 와서 기도로 시작하고 하브루타로 일대일 질문과 대답을 진행하고 마지만으로 분반 공동체를 만들어 공동체 질문을 같이 만들어 가는 데 있다. 집에서 미리 학습해온 지식이 지혜로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의 통로를 통해 복음이 능력이 발휘가 된다. 이런 하브루타와 거꾸로 교실의 질의 응답과 토론은 거대한 교회의 실천적 프로젝트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수업의 주도권을 청년 청소년들과 참여자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 교사와 청년 청소년은 교회에서 좀 더 일방적인 성경 교사의 주입식 강의 보다는 주관적이며 실제적인 영성을 가르치며 제자로 구도자로 복음의 스토리를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나게 된다.
거꾸로 영성이 좀 더 많은 형태로 발전하게 할려고 지역 교회간에 공동체적 성격으로 교육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 실천적 학습은 결국 이웃을 품기 때문에 이웃인 지역 사회에 어떻게 교회가 영향을 주는 지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성경 교사들의 네트워크로 서로간의 관심과 발전을 어떻게 질문과 응답이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록 거꾸로 영성의 교육 방법론은 교회 공동체에서 가정 지역 나라로 좀 더 다양해지고 실천적 실제적 사명을 실현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교회의 부모님들이 공동체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진행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소명을 제대로 인식하는 부모님들이 모여서 성경 교사를 지원하고 교회의 거꾸로 영성을 가르치는 데 지원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좀 더 많은 교회가 부모님들의 모임을 만들어 거꾸로 영성을 공개하고 어떻게 다양한 그룹과 교육 자료의 공유 및 인터넷 플랫폼 같은 시스템으로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지역에 교회의 부모님들과 사역자, 성경 교사들이 다양한 워크샵, 연수, 세미나를 통해 부모님들을 포함한 성경 교사 그룹이 활동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음 세대에 공감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저희 올인원 미션 그룹은 온라인 플랫폼을 도입하여 “Allbuilder.org”를 만들었다. 이런 체험의 공유를 통하여 성경 교사들이 거꾸로 영성인 하브루타와 거꾸로 교실을 진행하면서 필요한 좀 더 다양한 경험을 부모님들과 청년, 청소년 성경 교사의 교육 코칭을 진행하게 하였다. 성경 교육 시간에 교육의 주도권을 청소년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청소년들은 지식을 미리 접하게 하는 도구로 청소년들의 인터넷과 모바일에 거꾸로 영성의 지식을 접하게 하였다. 성경 교사가 인터넷에 올린 교재나 동영상을 미리 올려서 부모님과 청소년들이 인지를 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이 부모님과 선생님을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거꾸로 만드는 구조가 중요하다. 이것은 인터넷 중독으로 힘들어 하는 청소년들을 새 길을 만들어 줄 것이다.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모든 청소년들이 하부르타와 거꾸로 영성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알고 회복되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 한 청소년들이 가진 소속감을 가지며 안정된 기쁨의 용량을 늘리며 확대될 것이다.
또 한 거꾸로 영성은 영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영성은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좀 더 많은 청소년들이 비전을 가지게 되며 중독을 이기는 사고력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지금은 MZ 세대는 사고력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고 인내와 난이도가 깊은 생각은 거부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과정 성경 교사들과 교회에서 알아서 어떻게 하면 청소년과 청년들이 관심을 일어나게 하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즉 스토리를 통한 시, 소설, 연극 , 영화 같은 것을 청소년들이 공동체로 만들게 되면 소속감과 안정된 기쁨을 줄 수 가 있다. 이런 과제 수행하는 단계에서 창조적인 것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공동체 과제를 수행하면서 성경적 스토리를 하나님의 복음의 스토리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결과를 가지고 온다. 이렇게 되면 성경 말씀을 하나의 진리로 분석적인 과정이 생겨서 예수님의 비유한 포도 나무 가지에 붙어 있게 된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응용적인 과정 또한 청소년 청년들이 직업을 가지는 이유와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래서 본 거꾸로 영성 과정은 여기 원칙은 4가지 가 있다. Creative창조, Collaboration협업, Communication소통, Consider 질문을 통한 생각 4 C가 있어야 한다. 창조물을 청소년들이 자기 주장을 보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공동체 학습은 여기 4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창조적인 것은 사실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다. 믿음을 주는 것은 복음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에게 소그룹으로 협업하고 소통하게 하여 생각을 해석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프로젝트를 하려면 전체를 같이 연결하는 공개적 방법론이 필요하다. 성경 교사는 이런 과정을 성경 전체가 어떻게 흐르는지를 파노라마 같은 전체 스토리 보드를 만들 수 있게 하면 된다. 파노라마 같은 스토리 보드를 만들려면 성경구절을 찾아야 한다. 그 때 청소년들이 성경을 스스로 찾기 시작하는 과정이 일어난다.
이런 부모님과 성경 교사, 청소년이 올린 거꾸로 영성 프로젝트를 보려면 온라인 플랫폼(allbuilder.org)로 이번 사역에서 교재를 올려서 교육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렇게 하면 코로나로 힘들어 하는 지역 교회가 복음으로 청소년들에게 공개적으로 연결되게 된다.
지금의 코로나 이후 상황은 지역교회가 초대 교회처럼 힘들다. 바울과 같은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 영성은 많은 고난 속에서 제자들은 소명을 받은 삶으로 목숨을 바치었다. 소명이 목숨을 바칠 만큼 되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우연이 아닌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성경 교사는 정체성과 소명, 사명이 있어야 한다. 소명을 받은 삶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사랑을 주고 받으시길 원하신다. 이런 생각을 다음 세대 성경 교사 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부모님들도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마음속에 있으면 섭리로 여기어 지고 소명과 사명으로 여기어 진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을 아는 부모님과 다음세대 성경 교사는 제사로써 의 사명과 소명이 있어야 한다.
성경의 언어는 사상과 인격을 가지고 있는 데 그 인격은 제자들을 사랑하사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다음 세대 성경 교사들은 예수님이 만나려는 사람들을 만나고 예수님과 관계를 경험하고 체험하게 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써 그 영혼의 질문을 말씀으로 이세상에서 실천적으로 체험하게 해야 한다. 이런 실천적 교육은 유대인이 몇 천년을 이어 온 교육 방법 하브루타가 적합하다. 특히 다음 세대에 “나는 누구인가” 대한 영혼의 대 질문을 만들어 거기서 파생되는 소 질문으로 청소년들의 생각을 서로 이해시켜야 한다. 이 질문에서 나온 공감을 거꾸로 교실의 프로젝트로 공개적으로 확대시키면 청소년들은 회심을 하며 믿음의 통로가 세워지는 것이다.
성경 교사가 거꾸로 영성을 통해 이런 공개적 그룹 모임으로 확대를 시켜 주며 프로젝트로 학습을 만들어 주면 좀 더 실제적 체험으로 할 수 있다. “Allbuilder.org”는 이런 청소년들에게 온라인으로 이런 그룹을 만들고 소통을 시키면서 공개적 확대를 시키는 것은 플랫폼 도입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써 코로나로 이후로 힘들어 하는 지역교회의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자주 가는 뉴질랜드 해변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나그네 같은 이민 생활에 지쳐서 잔디밭에 누워 가족들과 쉬고 있었다. 나른한 햇살에 피곤함이 몰려와 잠깐 잠이 들었다. 그 가운데 나무가 하늘 위로 이상하게 빛이 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잠에서 깬 나는 도대체 내가 잠을 잤는지 잠을 안 잤는지도 모른 채 나는 환상을 본 것 같았다. 나그네의 쉼터가 되는 나무 그늘 밑에서 필자는 하나의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성령의 빛이 수많은 은혜가 되어 나무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무성한 나무에서 삼십 배 육십 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는 것이었다.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그 빛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비추라 하시는 것 같았다.
바로 그 빛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였다. 그 하나님 나라를 알리라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잔 뒤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나의 눈에 실제 나무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스마트 폰 사진으로 찍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문득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되었느니라(마가복음 4; 3~9)
이 광경을 눈을 뜨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그 나무를 보게 하시었다. 씨가 자라 믿음의 뿌리가 자란 것을 보게 하였다. 그 믿음의 뿌리에서 무성하게 자라 꽃이 피고 열매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에 대한 것은 믿음의 뿌리가 결국 생명이 있는 나무가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씨가 뿌려진 밭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 씨가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려서 가지와 꽃과 열매를 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환상은 무엇일까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아이들에게 믿음의 뿌리를 어떻게 심어주는 것이 좋은 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울처럼 물을 주는 것이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것일 까 생각도 하면서 기난긴 소명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주신 팔복의 두 번째 마음이 생각나게 하시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을 받을 것이다라고……
질문) 나는 누구를 궁휼을 여긴 다는 것인가? 나는 어디서 긍휼를 받는 다는 것인가?
그 이후에 필자는 청소년들을 궁휼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궁휼한 마음이 질문에 많은 생각에 답을 찾고 있었다. 그때 한참 성경 교사로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나무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령의 빛을 비추는 환상임을 깨달았다. 무지개가 그 나무를 감싸는 듯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길을 예배하게 하신 것 같았다.
지금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려운 지식처럼 성경을 보고 복음을 듣지만 나무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쉽게 세상을 유혹 쉽게 빠지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성경 말씀을 이해한다 해도 세상 지식을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와 어려움으로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이 아파하는 영혼을 보고 필자는 긍휼을 느꼈다.
특히 믿음의 초보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 만 이해하지 영성의 지혜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직접 필자가 청소년과 청년들을 제자 훈련시킨 후에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쳐 보니 이해가 되었다. 이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새로운 영성훈련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특히 무엇인가 성경을 전체로 숲처럼 통일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스토리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게 할려면 성령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스토리를 만들게 하고 증인이 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복음의 스토리가 된다. 이 스토리가 있는 것이 성경이고 성경을 이해시켜 주는 것이 예수님의 영인 성령 하나님이다.
이 구원의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부르심으로 믿음을 주시고 성화를 위해 칭의를 주신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여 성화를 통해 예수님을 닮게 하신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형케 하시며 십자가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 예정되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은 재림 하시어 영생의 소망과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화롭게 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새창조 하시고 믿음의 스토리를 만들며 증거를 체험하게 하고 증인이 되게 하신다. 아래의 내용은 필자가 만든 하나님 나라 구원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하나님 나라
기쁨의 나라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섬김의 나라를 위하여 유대의 왕이 임마누엘 아기로 태어 나시었다.
칭의의 나라를 위하여 죄없는 인간으로 성장하시었다.
영광의 나라를 위하여 나귀타고 오시었다.
사랑의 나라를 위하여 가시멸류관을 쓰셨다.
의로운 나라를 위하여 보혈의 십자가를 지시었다.
믿음의 나라를 위하여 땅에 있는 무덤으로 들어가셨다.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부활의 기적을 만드셨다.
소망의 나라를 위하여 그 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은 창조 하시고 임마누엘 하시며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며 재림을 하실 것이다. 믿음은 아브라함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죽은자를 살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 이 믿음이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상에서 왜 믿음을 보는 지 이해가 된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아는 힘과 능력은 보이지 않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지식으로만 성경을 읽으면 레위기에서 막힌다. 보이는 것만 추구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보이지 않는 믿음은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 하나님이 이끌고 가신다. 성경에서 믿음의 눈을 밝히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마음의 눈으로 밝히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일어난다. 성도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 하나님의 눈으로 지혜와 계시가 같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열어서 보여 준다는 뜻이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계시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성을 목표로 한다. 이런 믿음의 영성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보이지 않는 증거로 떠 받치는 것과 같다. 지혜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처럼 바라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실상을 기반으로 한다.
아버지께서 주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그 관점이 되어 성경을 읽으면 성도의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 그 지혜를 기반으로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부르심의 소망과 풍성한 기업의 영광을 알게 하고 증인의 스토리를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다. 사람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믿어 지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부르심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믿음의 통로를 통해 믿음의 영성이 성장한다. 그 믿음의 영성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안다. 또한 하나님의 힘과 위력이 어떻게 믿음에 따라 역사하는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영성 형성을 말한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계시는 성령의 관점으로 질문하면서 체험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영성을 성장하게 한다. 영적 성장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증거가 생기는 과정이 있다. 새창조의 부르심은 영혼의 질문은 응답을 성경에서 찾아 이해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회심하고 비전을 갖으며 말씀을 해석하고 영성훈련으로 적용되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성령 관점 관계 원리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통해 이 세상에 오셨다. 아들의 관계를 통해 이 세상에서 스토리를 만드시며 하나님의 관점을 보이셨다. 이런 성경 말씀이 하나님과 영적인 아버지 관계의 구조로 이해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육적인 이성의 지식으로 성경을 보면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사람들 특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관계를 통한 성령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영성훈련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망과 영성 즉 하나님의 비전이 얼마나 성도의 기업 안에서 풍성함과 능력으로 나타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증인이 되고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관계와 관점으로 연결되는지 지혜를 갖도록 질문으로 스스로 찾아가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세상의 향한 필자의 과시하는 욕심과 교만이 아니길 빈다. 이제부터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기도를 드리면서 시작해 본다.
시편 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하나님이 이루시고 네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질문)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당신이 할 일이 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길을 맡겨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었다. 그 길을 가면 우리의 의가 빛같이 나타나고 우리의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하신다고 하였다. 독생자를 내어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이 죄로 인해 죽어야 될 존재를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며 부활하게 하신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거하면 죄가 용서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 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가 빛같이 나타나신다고 하시었다. 사람이 가진 허물과 죄의 대가를 예수님이 대신하여 지불한 것을 알아야 만한다.
질문) 만약 성경에 예언 된 이런 분이 있었다면 과연 그분을 믿겠는가?
질문) 지금 예언 된 것중에 몇 가지가 이루어졌는 가?
구약 성경에 이 계획의 모든 것이 나와있다. 성경에는 죄의 대가를 지불하실 분께서 태어나실 것이며 그 이전에 미리 선지자와 시편을 통해 어떻게 태어날지 돌아가실지 알리었다. 세상의 역사에는 성경의 기록대로 그분의 탄생과 성장과 그 죽음과 부활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모든 것을 끝내 시었다고 하시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며 다시 오신다고 하시었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예언하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수백 가지 예언이 성경 속에 있으며 그 예언이 정확하게 지켜졌다. 또 그분의 예언이 성경 속에 있고 사람의 구원을 계획하고 있는데 믿지 못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계획을 미리 이야기해 놓은 구원 계획서이다. 이 모든 구원 계획서의 하나님의 계획 하에 이미 이루어졌다. 시간마저도 그분의 계획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이미 이루어진 계획과 앞으로 이루어질 계획증 모든 사람의 구원 계획이 적혀 있다. 생명 책에는 구원 계획서에 의해 구원되는 사람들이 이미 적혀 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 책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책은 우리 사람에 의해 적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전부터 계획하고 선택하고 적으셨다. 그 은혜로 선택된 사람은 자기의 의지로 부르심에 선택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함으로 실행하는 것을 계획하고 계신 것이다. 성경을 읽고 말씀과 성령에 증인에 의해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시며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모으듯이 하나님이 부르고 있다.
즉 구원계획서의 근본인 성경에 의해 모든 생명 책에 이름이 있는 자들이 반응하며 성령의 인도로 그 길을 안내한다. 생명책은 우리가 볼 수 없지만 성경책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성경이란 구원 계획서에 진정화 신령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러므로 성경책이 생명책과 연관이 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되는 사람이 있는 데 바로 생명책에 이름이 이미 올라간 사람이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이미 생명책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런 예정된 구원론은 과거로 향하고 있다. 미래로 향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았던 과거의 삶이 구원으로 향하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더 은혜로 눈물을 흘린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제자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갔다 오겠다고 하셨을 때 “죽은자는 죽은자들에게 맡겨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이미 예수님 또한 생명책에 올려진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성경은 이런 모든 생명책에 올려진 사람들이 영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계획하셨다고 하시었다.
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고 하신일은 창조, 임마누엘, 십자가, 부활, 재림이다. 이것을 연결 하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계획과 스토리가 된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하나님과 끊어진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도록 새창조시키는 역사가 있다. 이것은 교회로 부터 말씀을 듣고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단계이다. 말씀을 통해 부르심으로 믿음을 주시며 회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구도자로 써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새창조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의 임마누엘 역사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의롭다 칭하신다. 성령의 임재는 결국 교회로 부터 제자훈련을 시키시고 성령 비전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알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으로 듣는다.
하나님의 십자가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성도가 예수님과 같이 죽는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을 시킨다. 교회로 부터 더 깊은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을 시키는 성화의 단계는 말씀을 성령 관점으로 해석하고 기도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증거를 남긴다.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는 성도가 십자가를 지나 새사람으로 써 부활하게 하시는 소망을 가지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까지 가지게 하신다. 그래서 교회와 완전 동화되면서 소명과 사명으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적용하혀사람들에게 충성 스런 증인이 되게 하신다.
앞으로 오실 하나님의 재림역사는 예수님이 재림하면서 새 땅 새 하늘에 충성스러운자들과 순종하는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면서 영생의 나라로 옮겨 가게 하는 것이 구원의 마지막 스토리이다. 요한 복음과 요한이 적은 모든 서신서는 그 영생을 알게 하기 위해 적었다고 목적까지 적었다. 영생을 주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 계획을 알고 성경책을 어떻게 읽느냐에서 성경말씀을 어떻게 가르치냐 성경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가 구원받는 자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이 계획을 모르고 가는 사람은 어두운 밤 빛이 없이 운전하는 것과 같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말씀을 보고 듣고 적용해가야 한다. 즉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고 가르쳐야 한다. 처음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하시었는 지 알면 믿음의 흐름을 알수 있다. 지끔 까지는 사람들이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었는지를 알게 하였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아버지 하나님이 하신일을 창조, 임마누엘, 십자가, 부활, 재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한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역사가 우리한테 믿음을 주시고 칭의를 주시고 성화를 시키시며 부활을 예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령 관점으로 기본원리로 말씀을 듣고 보고하게 되면 결국 회심하는 구도자가 된다. 이 때 사람이 중생하게 되며 새창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기 위해 복음의 스토리 진리를 듣는자로 만든다. 다음 단계는 성령 하나님이 말씀을 해석하며 생활속에서 증거하고 기도자가 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면 믿음의 스토리를 입으로 시인하는 증인이 되게 된다. 성령 하나님이 예수를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이 하신일인 임마누엘, 십자가, 부활 재림을 증거하신다. 믿음은 이런 하나님이 하신 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시인하면 칭의가 이루어지고 성화가 이루어진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부활이 예정되었고 예수님이 재림할 때 영화롭게 한다. 즉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외어서 시인하는 것이 아닌 믿음의 스토리로 받쳐 지는 것이다. 마음에 믿음이 생겨 소망으로 증인이 되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믿음을 가지면 의에 이르고 성화를 이루며 구원을 받는 천국의 열쇠를 갖게 된다. 천국의 열쇠는 구원받는 자 가지는 열쇠이지면 결국 이것 조차도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 믿음의 열쇠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어떤 것을 행하여 였는 지 알고 마음에 믿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을 통하여 성령 관점으로 마음에 기쁨이 있으며 그 기쁨으로 소망, 사랑, 사명이 생기어 입으로 시인하는 스토리가 생겨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유가 인생의 목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소망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과 연합되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비전을 가지게 한다. 영이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부르심의 이유와 믿음 회심과 칭의 성화, 영화하게 되는 목적의 중요한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 원리이다.
성경은 사람의 생각으로 읽으면 안된다. 그냥 인본주의 적 생각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 져 읽을 때 마다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는 책과 다를 바가 없다. 성령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기 위해 성경 말씀을 기본으로 삼위일체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낸다. 창조, 임마누엘, 십자가, 부활, 재림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이 역사를 성령 관점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하나님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계시된다. 성령이 주신 관점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관점이 되어서도 성경의 문화와 상황을 알게 한다. 이것이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다.
이것을 성령관점 기본으로 가면서 그 모든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성경을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획서로 다가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시어 당신의 이름을 생명 책에 적게어 놓고 부르시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적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 예수님인 성자 하나님의 관점, 성령 하나님의 관점이 되서 하나님의 계획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야 된다. 성경을 읽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이 성령 관점 관계 비전 원리이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비전이 되는 원리가 말씀 뜻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 경고하신 내용이 많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천국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대로 사는 자라야 천국을 볼 수가 있다고 하시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고 그 뜻을 따라야 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재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주는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결국 그렇게 성경책을 읽다 보면 당신은 예수님처럼 닮아 가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16-1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믿음은 누가지를 믿음으로 고백하면 된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두번 째는 하나님 예수님이 무슨일을 하셨는 지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된다. 첫 번째 믿음의 고백은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다. 천국 열쇠를 가지는 것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데 있다. 첫 번째 고백은 성경에 나와 있다.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시인하는 베드로가 사 복음서에 나와 있다. 예수님이 주인되시며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인간이 되심을 고백하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오게 한 대답이었다. 예수님이 이 고백을 통해 천국 열쇠를 준다고 하시었다. 이 고백한 믿음의 반석위에 교회를 짓게 다는 말을 하시었다. 그 만큼 이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 고백을 알게 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베드로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이 고백하게 한 것이다. 결국 성령 하나님의 관점이 아버지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베드로가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성령 관점은 결국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한다. 그래서 천국열쇠를 갖는 것이 성령 관점 관게 기본 원리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하나님이 하신 일을 고백하는 것은 사도 신경에 나와 있다. 사도들이 핍박을 받으며 고백하였던 것이 사도신경이다. 이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도들이 역사적으로 증인이 되었을 때 고백했던 내용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 임마누엘 역사, 십자가의 역사, 부활의 역사, 재림의 역사가 고백이 있다. 이 하나님의 역사를 내가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 된다. 창조 신앙, 임마누엘 신앙, 십자가의 신앙, 부활의 신앙, 재림의 신앙이 있다. 이것을 한 꺼번에 고백하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왜 사도 신경을 외우고 고백하는 지를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청소년도 이것을 외우라고 해서 외우는 뜻도 이해도 못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 위한 천국의 열쇠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게 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듯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창조 신앙)
그 외아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임마누엘 신앙)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십자가 신앙)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부활신앙)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재림 신앙)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아멘.
시편 90:1-2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창조 신앙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고백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천지를 만들었다. 천지를 만들기 이전에 계셨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무한하다. 이 세상 천지에 있는 모든 것 산, 땅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심지어 살아 있는 것들이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다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세계까지도 믿는 것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었다는 믿음이 입으로 시인되는 것이다. 그 분이 누구시냐는 것을 사도 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다. ” 그 외아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임마누엘의 신앙을 보여 주신 것이다.
질문)성경 전체에 흐르는 비밀 같은 성격 같은 원리는 무엇일까?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배하도록 만드셨다. 그렇다면 성경이 사람들에게 계시 될 때는 성령의 관점으로 읽어 야 된다. 성령의 감동으로 만든 것은 성령의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이렇게 성령의 관점으로 읽고 난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하나님 마음을 가져야한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에서 아들로 오신 것처럼 하나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하나님의 관계 원리가 같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성령 관점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송하고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이런 행위를 교회에서 하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예배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되도록 만들었다. 이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처럼 하나님이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들을 보낸 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 원수 관계가 회복되면서 모두 다 예배 하시길 바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 시길 바라신다. 사람이 생명을 풍성하게 얻고 풍요로운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면 예배자가 되면 된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예배 자로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것을 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예배하도록 만들었는데 죄 때문에 영이 죽어 예배자의 삶을 살지 못하였다.
우리가 예배 자로서 회복하려면 먼저 영이 살고 그 영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삶이 중요하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영적 예배이다. 이렇게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가 바로 관계 회복이 시작이다. 그 영적 관계 회복의 원리는 성경에서 나무의 기본 줄기와 같다. 마치 성경을 읽을 때 숲에서 전체를 보고 호수로 뻗어 있는 시냇가 같은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부단히 생각하여 보았다. 숲에서 호수로 안내하는 시내 같은 것이 있다. 즉 인간과 하나님의 영적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원리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원대한 하나님의 뜻 안 에서 작은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 비전 원리라고 하고 싶다. 성경의 비밀 원리가 성령 관점 관계 비전 원리로 작용되는 것은 각자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은혜와 비전은 서로 다르다. 구원은 같지만 성령으로 하는 모든 역사는 사람마다 다르다. 마치 수돗물이 원천의 물에서 여러 수도관을 타고 오는 것과 같이 여러 갈래로 성령이 주는 은사와 비전은 각각 다르다.
이런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원리 원리는 성령의 은사와 비전을 통해 각각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이 다르게 나타 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만들었으니 성경을 읽은 사람도 성령의 은사로 감동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 교회에서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필자 같은 미천하고 작은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게는 가 하지만 좁은 생각을 가진 필자가 느끼고 추측한 것은 각자의 비밀이 되었기 때문에 성령 관점 관계 비밀원리라고 부르고 싶다. 즉 성령 관점 관계 원리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과의 영적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사람의 몸이 산 제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시었다. 이 연합을 위해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말씀에 있는 생명수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원리에 성령과 생명의 원리에 코칭의 원리를 가미하여 말씀을 질문과 응답을 통해 삼위 일체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시키는 데 있다. 즉 창조주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의 상대를 중심으로 존재하시면서 상대의 관점의 입장을 바꾸어서 관계적으로 순종하면서 연합된 일체로 존재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의한 곳에는 임재하 지 않으신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죄가 없고 의롭다고 칭한 후에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칭의이다. 하나님은 영이니 이러한 서로의 관점의 입장을 성령을 통해 사람에게도 적용시키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영적인 예배의 원리로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은 처음에는 서로 상대방을 사랑으로 긍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해주며 그들을 이해하시며 용서하시었다는 것이다. 처음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동물들을 데리고 나와 그들을 부르는 이름을 그대로 동물의 이름을 정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런 성령 관점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죄 때문에 사람의 영이 죽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므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었다. 이것을 믿는 사람 안에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관점을 이해 시킨 것도 성령 관점 관계 원리가 된다. 더 나아 교회를 만들고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 예수님의 공동체적 사역인 교회의 관점의 이해가 일치되게 하신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는 공동체적 원리로 예수님을 나타내서 교회가 가족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며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예배 적 삶을 통해 반사시킨다. 그 예배 적 삶은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피조물이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계시되는 것이 때문에 비밀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대가를 치루신 성자 하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 그 죽었던 사람의 영이 예수님의 영 즉 성령 하나님을 통해 그 사람에게서 영이 다시 살아난다. 성령 하나님이 사람의 영을 살리고 같이 내재하게 되며 성경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 죽었던 영이 성령 하나님 임재와 성경 말씀을 통해 다시 살아났음으로 성령 관점의 관계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예수님 안에서 얻는 이것이 바로 중생 이다.
그리고 다음은 성화의 과정을 겪게 하신다. 이때부터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 회복되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성화의 과정이 일어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바로 성화의 과정 속에 일어난다. 이 성화 의 과정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 하나님과 같이 성도가 새창조되며 역사하신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도 같이 역사했다.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도 삼위 일체의 하나님은 영을 통해 각자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사람은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하면 관점의 이해가 생긴다. 성화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일어나기 때문에 각기 믿는 사람마다 성령 관점으로 성경 말씀을 보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성령의 열매가 맺혀진다.
마치 나무가 성화의 과정으로 살아서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면 계속 예수님과 닮아 지게 된다. 예수님처럼 삶을 살고 예수님이 말씀이 성령으로 삶으로 예배로 기도로 습관이 되어 성령의 열매 사랑과 인내와 소망 같은 성격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하게 회복되게 된다. 그래서 성령 관점 관계 원리가 된다. 또 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는 삼위 하나님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순종이 일어난다.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면 십자가의 피로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느끼어 진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란 것을 알게 되어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거룩한 성격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성경을 보면서 그대로 우리에게 투사시키시길 바라신다. 이것이 믿는 사람 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성격을 표현하시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신다.
그렇다면 사람이 복음을 통하여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이다. 성령 하나님의 기본은 믿음으로 부르심과 관계회복에 있으며 그 결과는 성도의 회심이다.
두 번째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 단계가 있다. 이 단계는 성령 하나님이 부르심을 믿음으로 받은 성도에게 임마누엘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성령의 은사와 비전을 가지는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하게 되며 점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진리를 듣는 자가되어 제자 훈련을 받는 단계가 된다.
세번 째는 성령 관점의 관계의 해석 단계이다. 이 단계는 성령 하나님이 제자로서 삶을 살면서 더 깊은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을 이룬다.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해석해주고 직업을 통해 다른 이웃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깊은 영성 형성을 하며 칭의에 대하여 중생에 대하여 해석하고 증거하게 하는 그리스도 영성 형성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기도와 예배, 설교를 통해 말씀을 해석하는 힘이 생긴다. 성령 하나님이 해석해 줌으로써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며 이전에 받은 칭의와 중생의 은혜가 더욱 생명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영성 형성을 충만하게 한다.
네번 쨰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의 적용 단계이다. 이 단계는 성령 하나님이 소명과 사명을 받도록 인격적으로 이끄시고 그 소명과 사명을 통해 순종의 종이 되도록 하는 단계이다. 충성 스런운자로 교회와 완전히 동화되어 성령의 열매가 충분히 맺어지는 단계이다. 각 단계별로 자세한 설명을 다음 절에서 해보겠다.
성경에서 많은 질문과 답을 찾기 전에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어떠한 은혜의 자원을 주셨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 세대나 다음 세대에 문화나 관습이 변화 되어도 변하지 않는 복음의 진리 같은 은혜의 자원을 주셨다. 바로 영성이다. 참된 영성은 성령하나님을 통해 받은 자원을 알고 온전히 그 분께 맡기는 데 있다. 그것은 성령 충만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령의 임재를 느끼면 사람들은 죄를 알게 되고 회심을 하게 된다. 그분이 가진 생각과 뜻을 온전히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 성령 충만함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랑으로 오시었고 그 사랑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야 한다. 그러나 내면에는 자기를 주장하는 수많은 옛 본성이 그 사랑을 밀어내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밀어내고 원래의 본성 즉 옛 사람으로 살게 한다. 그 때마다 예수님의 주신 의의 옷을 입은 새사람으로 계속 싸워야 한다. 이미 승리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니 승리는 우리 것이라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부르는 것이 바로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다.
사탄은 정죄의 영이라 부르심을 받은 청소년들을 힘들게 하며 세상의 걱정에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한다. 영적 싸움에서 쓰러지면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가치 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죄한다. 정죄의 마음이 들어올 때마다 믿음의 말씀으로 이겨내야 한다. 이것이 영적 백신을 맞고 난 후에 일어나는 죄에 대한 항체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로마서의 글은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적게 한 글이다.
예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음 새사람을 입으라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청소년들 조차도 그들의 옛 사람이 예수님께 죽었는데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의 구습을 그대로 받고 있다. 심지어 매일 인터넷에서 야한 동영상과 게임을 즐긴다. 청소년들은 여러 같은 죄를 습관적으로 계속 반복한다. 이것이 중독이다. 아무리 죄를 자백하고 나서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을 믿지만 다시 돌아서면 같은 죄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믿지만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못 믿다는 것이다. 죄로부터 해방을 얻었지만 죄로부터 깨끗한 거룩함은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의 용서와 거룩함과 깨끗함은 구별된다. 만약 죄를 지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회개를 하면은 용서를 받는다. 그렇지만 그 이후부터 옛 사람이 주는 습관을 가지게 되어 다시 죄를 짖게 되고 거룩함과 깨끗함을 못 받는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이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은 바로 육에서 온 옛사람이다. 청소년들이 중생한 이후에도 옛 사람과 옛 습관에 사로 잡힌다는 것이다. 그들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으로 야한 동영상을 보거나 잘못된 것을 접하고 난 후 오염되어 깨끗하지 못 한 모습 때문에 스스로 자괴감이 많이 드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게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옛사람의 처리가 아주 중요하다. 그러려면 새사람의 관점을 보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영적 백신에서 나오는 죄에 대한 항체 형성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 백신은 비유 지만 마치 백신을 맞아서 항체 형성으로 인하여 바이러스 코로나가 들어와도 싸워서 이기는 것 같은 원리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 써 영성 형성이 중요하고 그 영성이 결국 죄와 싸워서 이기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옛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종교는 옛 사람을 고난과 속세를 떠나 옛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 있다. 다른 종교가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바로 옛 사람을 고쳐서 구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옛 사람을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에 있다. 옛 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믿고 새 사람의 관점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옛 사람에 대해 노력이나 행위로 죽이려고 한다. 믿음을 가진 청소년과 청년들이 죄가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은 이 옛사람의 처리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력해도 죄가 다시 살아서 옛 사람 때문에 오염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옛 사람이 죽었고 오염에서 해방된 것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본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나 우리들 자신의 노력과 억지로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기독교 영성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성령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옛사람의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 조차도 믿음으로 가야 한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믿기위해서는 새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새 사람의 관점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이 보신 눈으로 성경을 보고 예수님께서 보신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적용해야 한다. 이렇게 새사람으로 믿음이 굳건하게 성장 시킬 때 확실하게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믿게 되는 영성이 생기며 부르심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성령 관점 관계 기본 원리다. 이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는 바로 옛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고 새사람으로 사는 지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부르심을 받도록 살게 하는 영성 형성 훈련이다. 마치 영적 백신의 항체형성으로 죄와 싸워서 승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영성 형성 훈련이다.
그리스도의 영성 형성을 만들어 가는 길은 성령 충만함으로 받아서 새사람의 관점으로 살면 그 성령의 능력으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성령 충만함 속에 생명의 양식이 들어오고 그로 인해 새사람의 관점은 더욱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입으면 새사람으로 충만해져 죄로 인한 옛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질문)죄와 사암의 법칙에서 절망과 두려움으로 중독이 걸리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어떻게 하면 생명의 냄새를 가지게 할까.
옛날 사람의 선조 아담과 이브에 사탄의 꾀임에 빠져 죄가 들어왔다. 죄 때문에 영이 죽게 되고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아담과 이브뿐만 아니라 모든 후손들도 모두 다 영이 죄로 인해 죽어 있었다. 에덴 동산에 쫓겨난 것은 죄를 지은 상태로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 안에 죄가 영원히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쫓아 냈다.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영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다. 셋 계열이 일어날 때까지 하나님에 대해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 즉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육으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성경에 적고 있다. 아벨은 자신과 첫 소산을 같이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인 아벨 자신 마음을 예배로 드린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들도 후손은 영이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순종하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
그런데 셋과 후손 에녹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 에녹은 무두셀라를 낳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였다. 영이신 하나님이 에녹에게 임하고 에녹은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았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온다. 에녹과 에녹의 손자 노아이다. 에녹은 죽음을 맞지 않고 하늘로 데리고 가시었고 노아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홍수의 심판을 대비하는 방주를 만들었다. 결국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노아 가족만 남긴 채 그 때의 사람들은 모두다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 떠나 관점 차이로 생기는 악을 행하며 불순종하는 인간들을 더 이상 두고 보실 순 없었다. 하나님이 되려 했던 아담과 이브처럼 그 후손들은 자신만의 선과 악을 인간이 판단하여 생기는 죄가 너무나 극에 달했다. 이것이 불 순종의 죄가 된다. 이 죄 때문에 모든 아담 이후의 우리의 선조들은 죽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망의 권세 때문에 이들은 완전한 하나님과의 단절되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죄로 영이 죽은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세상을 인식하는 것을 오직 육의 관점 즉 정욕으로 스스로 죄에 오염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다. 사탄의 유혹에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는 영이 죽어 죄가 지배하는 육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였다. 사탄의 거짓말인 눈이 밝아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될 것 같은 거짓말에 속아서 육은 죄에 오염된 관점만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여 숨어 버렸다. 그들의 눈에는 벌거벗은 몸은 악으로 보인 것이다.
이제 아담과 이브의 후손은 이 원죄 때문에 죽음으로 가는 죽은 영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시 사람들의 영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었다. 사람 스스로 영을 살릴 수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인간의 영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 선행을 하더라도 이미 죽어 있는 영은 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완벽한 인간이시며 완벽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과 같이 육체를 입고 십자가에 인간의 죄의 대가를 사랑으로 지시며 공의를 드러내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영을 믿는 자에게 보내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다. 그 예수님을 믿는지는 십자가 때문에 죄에 대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영으로 살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입고 예수님을 살리신 영이 믿는 자 안에 있게 된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원래 공의 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원래 완벽 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용서하신 분이다. 성령하나님은 사람들 중에 임하셔서 공의와 사랑을 증거하시었다. 이런 성령하나님의 증거는 하나님의 선함이 성도 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고 회개를 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영이 죽은 사람들을 다시 원래의 사람에게 성령의 숨결을 넣으셔서 죽었던 영을 살게 하고 생명을 주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또 성령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증거하며 관점을 회복하고 예수님이 가지신 영생을 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성령을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보내 시고 함께 동행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시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님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고 예수님 관점을 이해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는 교회로 부터 말씀을 듣게 하고 사람들을 회심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구별하여 부르시고 거룩하게 만들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게 만드신다. 이 원리가 복음 안에 들어 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며 부활하시고 하나님과 화해 자의 역할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시다. 이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믿는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칭하시었다. 그리고 의인이라 칭하신 사람들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관계 회복되게 하시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하게 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는 회심하며 믿음을 가지게 한다. 믿음은 회개와 같이 온다. 내가 죄인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미래를 향하고 있고 회개는 과거를 향하고 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영으로 난 사람들을 말한다. 그 영으로 난 사람들 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있다. 그 예표가 바로 교회이다. 성경 관점 관계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역사적인 변화의 능력을 가진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관점을 다시 살리시게 하시어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인간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하시며 동일한 성령의 성격을 가지게 만드셨다. 사람의 개별적 자아나 정체성안에서 성령님은 인격적인 관계로 함께 하신다. 여기에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칭의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되는 시작을 만든다.
칭의 된 청소년과 청년들은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이 주신 정체성을 알게 된다. 이 정체성은 성령 하나님을 만나서 참된 은사와 비전 꿈을 주신다. 성령님의 이런 인격적인 관계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성령관점 관계 비전 원리이다. 우리의 주체성이나 정체성을 그대로 두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성령님이 임재하여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도 또 따른 보혜사로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 결코 강제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똑 같은 사람은 없듯이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서로 다른 하나님 나라 존귀한 백성으로 만드신다. 거기에 영적 성장을 시키 시기위해 세상을 바라보는 비전을 주신다.
성령관점 관계 비전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꿈을 주시고 비전을 보게 하신다. 이 성경을 볼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비전을 갖게 된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지면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비전을 가지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관점 관계 비전 원리의 영성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정체성을 가진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것에 가장 기초적인 원칙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꿈을 제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이것이 성령이 주신 비전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안에 성령 하나님이 들어가 그 형상를 살리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되고 비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제자의 영성은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회복되게 하는 삶으로 꿈을 가진다. 많은사람들에게 전도와 선교를 하고 싶어하며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그들의 죄에서 용서와 사랑을 받게 하고 싶어하는 꿈이 생긴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가고 비전을 가지면서 실행하는 과정에서 생명수의 은혜를 느낀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고 관계 회복의 기적을 믿을 때 실체가 생명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성령관점 관계 비전 원리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이유를 알게 한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계획하고 예언을 이루어시는 지 비전 원리를 성경 말씀으로 증거를 경험하게 된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그 사랑이 보인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이러한 말씀은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 원리를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교통하심이 교회 무리와 제자의 무리가 은혜의 기본 줄기를 만드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주신 은혜가 넘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넘쳐 이웃 사랑으로 형성된다. 여기서부터 사랑을 이루는 성령의 교통이 시작된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 교통은 헬라어로 코이노이아로 쓰인다. 코이노이아는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사랑과 은혜로 깊은 교제를 나누며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주신 성경을 아들의 관계로 보면 그 말씀이 살아서 비전과 생명으로 온다. 그 생명은 사랑으로 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이웃을 사랑하는 성령의 교통 코이노이아가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의 비전이 같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성도안에 생명되신 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적용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올바르게 먹고 소화를 시키며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영이 새롭게 되는 비전을 가지고 자라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런 비전의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청소년과 청년들은 영적으로 성장게 된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이 내안에서 새 언약을 주신 것과 같다. 내 안이 성전이 된 것이며 내가 교회가 된 것이다. 말씀이 비전을 가지게 되면 내안에서 실체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예수님 관점의 비전을 가지며 말씀안에서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게 된다. 마치 씨가 나무가 되어 삼십배 육십배 자라는 것과 같다. 이런 성령관점 관계의 비전 원리는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하는지 구원의 기초를 세상에 제자로 써 알려 주는 방법론이다.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좋은 비전의 습관은 마치 세상의 마른 땅에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그 메마른 땅은 이 땅의 끝이며 예수님이 주신 대 위임 명령과 같다. 세성의 끝나는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하시었다. 선교가 가진 교회의 무리에 하신 명령은 거의 교회 정체성과 같다. 이것이 교회로 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제자가 가지는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은 전도와 선교로 이방의 땅에 교회 공동체의 씨를 심는 것과 같다. 그 씨가 잘 자랄 려면 땅이 기름 지어야 한다. 땅이 기름질려면 매일 거름을 주고 뒤엎어야 한다. 성령관점 관계의 비전원리는 성경의 말씀을 예수님 영의 관점으로 읽고 듣고 보게 하면서 세상을 향하는 꿈을 갖는 데 있다.
그러면서 성령 하나님이 주신 꿈은 이방의 땅에 교회를 만드는 것에 있다. 그 교회의 씨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겨지는 것이 제자들의 꿈인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자들은 거름을 주듯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성령 충만을 만들어 가게 하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명의 비전이 성경에는 많이 있다.
이러한 성경 비전은 거대한 숲과 같다. 성경을 읽을 때는 숲에서 적용할 수 있는 성령관점 관계의 비전을 알게 하는 방법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 코칭 원리로 만들어 가야 한다.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은 성경의 스토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힘이 된다. 이것은 성경의 거대한 숲을 보는 힘이 생겨서 길을 찾고 그 길이 비전이 되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거대한 숲에서 지름길만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름길을 찾다가 숲에서 길을 잃고 방황을 한다. 세상의 원리로 지름길을 찾아보지만 결국 길을 잃고 만다. 성령관점 관계의 비전 원리는 하나님이 지름길에서 방황하다 지쳐 쓰러진 초신자들의 영혼을 위해 만들었다. 믿음을 가지었지만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영성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전의 영성을 가지는 방법이 되었으면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을 통해 응답을 찾을려고 영혼의 비타민처럼 힘이 되어 작은 시골 교회처럼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영생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적혀 있다. 이해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영생을 주신 성령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 결국 예수님을 믿고 성령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만이 성령하나님이 안내하는 유일한 길이며 영생으로 이해되고 있다. 복음을 가지게 되는 구원 계획서 성경은 그 분의 생명 책과 영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 계획서 성경은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고 하나님 나라 대사와 제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대사는 하나님 나라를 대표한다. 하나님의 대사는 제자가 되는 속성이 있다. 복음의 스토리를 증거하고 증인으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당신이 예수님처럼 닮아 가게 된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며 성령 충만하게 된다. 그 하나님이 모든 개인을 창조한 이유와 선한 목적을 찾아간다. 이것이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게 되는 임마누엘 신앙이다.
임무누엘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비전을 주시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비전의 시작은 하나님의 관점을 적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성령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면 그 성령 하나님이 그 비전을 이끌고 간다. 성령 관점이 성령으로 행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하나님은 진리를 듣게 하는 밑그림으로 제자의 비전을 만들어 주신다. 그 밑그림은 바로 제자가 성경을 보고 만들어야 하나님의 뜻이 된다.
갈라디아서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러므로 그 비전에 대한 내용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만약 구체적인 비전의 내용이 없다면 좀더 기도를 통해 예배를 통해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성령 하나님이 인도하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약속은 사람이 약속하는 행동의 양식인 계약서로 하는 것이 좋다. 그 비전은 점점 더 나그네 같은 제자의 삶으로 변화시킨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계약할 때 그 당시 짐승을 반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를 지나는 형태로 진행하였다. 그 당시 근동지방에서 일어난 계약을 그대로 아브라함과 했다. 인간이 하는 계약 관계를 인간의 관점으로 계약하시고 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를 쪼개게 하시었다. 아브라함은 이런 동물들에 둘러 싸여 하나님의 약속을 잊을 수가 없었다.
믿음의 아브라함이 이해할 수 있는 계약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고 순종하는 삶으로 나그네가 되었다. 나그네된 사람들을 대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이삭에게 하나님의 소명을 전수하였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제자가 되는 사람은 예수님과 계약을 통해 비전 선언문을 계약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제자가 살면서 자주 보이는 곳에 비전 선언문을 두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면 성령 하나님이 그 비전의 계약을 생각나게 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 청소년들에게 제자의 비전 선언문을 만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가 시켜서 다른 사람의 비전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로써 비전 선언문이 중요하다. 무엇이든지 당신이 되고 싶은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만들면 된다. 이 제자 비전 선언문 계약에 의해 많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 함께 하는 곳이 어딘가 바로 제자들이다. 이 계약이 아브라함의 계약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나그네 같은 제자가 된다. 단순히 청소년 청년 때만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가 제자의 삶으로 바뀐다. 이런 삶은 임마누엘의 삶으로 예수님과 같이 동행하면 된다.
그 비전을 가지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읽고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해 제자 비전 선언문을 쓰는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과 같이 동행한다. 하나님의 뜻과 나그네 같은 제자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는 스토리텔링이 있게 된다. 비전을 가지며 제자가 되는 과정은 수많은 사탄의 방해 공작이 있다. 그 스토리텔링이 제자 훈련을 받고 난후 간증하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진리를 듣지 못하게 사탄은 수많은 방해 공작을 한다. 간증하는 제자들이 대부분 이야기하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가 끊기지 핞고 제자의 삶을 살게 함을 감사한다.
그러므로 충분히 당신은 이미 구원의 약속 안에 있는 제자가 된다. 이것은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통해 믿음이 먼저 생기며 그 믿음으로 행위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이 진리를 듣는 자로 교회로 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을 받는 것이다. 이때 천국에 당신이 쌓아 놓는 보화가 점점 많아진다. 끝까지 예수님 안에서 그 비전을 가지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 이 비전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소명으로 평생 제자의 삶을 살게 된다.
다음 세대를 향하여 성령의 관점 즉 예수님의 영으로 성경을 가르쳐야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복을 한다. 먼저 청소년과 청년들은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첫번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하나님의 관계 회복이 먼저이다. 성도가 성화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이 되는 이유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에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가르치더라도 하나님의 관계회복 때문에 믿음이 끊어 질 수 가 없다. 이 영성형성을 이루는 십자가 십앙을 세대에서 다음 세대를 이어 가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 관점으로 성경 말씀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은 세상에서 어떤 고난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청소년과 청년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혈기가 있다. 모든 것이 죄악으로 물들인 세상에서 그들은 그 혈기의 원인조차도 모르고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 청소년과 청년들의 영혼에 원래 있어야 할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죄와 사망의 법칙에서 죄 때문에 육의 혈기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도 육 적인 단죄의 눈으로 본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단죄를 하여 자살까지 생각한다. 이렇게 방황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은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세상을 육의 눈으로 보게 되어 점점 많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에 빠진다. 이런 혈기를 이기는 것은 청소년과 청년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영이 찾아오면 된다.
청소년과 청년들의 마음속 성전에 성령 하나님이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이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 생긴다. 아버지 하나님이 자녀를 이끌어 보호 하 듯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성벽이 생긴다. 육신의 부모님들이 해야 할 일을 청소년과 청년들의 마음속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한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세워진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 원리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다음 세대인 자녀로 회복하게 하며 진심이며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목표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 원리를 알고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과의 교제에서 오직 청소년과 청년만이 받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와 계시이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청소년과 청년의 마음에 생명으로 자리잡는다.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당신의 아들 됨을 알고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청소년과 청년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의 비전 선언문을 실천한다. 이 비전을 가지고 살 때 말씀이 세상을 바라 보는 가치관으로 바뀐다. 이렇게 청년과 청소년들은 성경 말씀과 성령 하나님이 주신 사랑 비밀을 이웃에게 전하게 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사랑한 것 같이 이웃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게 된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더 깊은 영성 형을 이루게 된다.
세상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해석하게 되어 청소년과 청년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긴다. 또 십자가의 사랑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성령 관점 관계 해석원리이다. 이를 통해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비전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이웃을 사랑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눈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2차 소명의 직업을 가지게 된다. 많은 청소년들이 무엇을 할지 모르고 힘들어 한다. 그러나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 원리로 2차 소명의 직업을 가지는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된다.
이 때부터 청소년과 청년들의 보는 비전은 첫째 아들이신 예수님 관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 관점 눈으로 본 성경 말씀 생각나게 하고 세상을 해석하며 말씀으로 세상을 적용하게 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해석하여 세상이 많은 고난이 와도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때 두려움이 없어지고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자녀로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청소년과 청년만이 느끼고 보이는 비전과 꿈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직업의 소망이 생긴다. 이것을 주님과 공유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리고 이런 친밀한 관계로 이 청소년과 청년들은 모든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은 알지만 세상의 고난의 문제를 해석하기가 힘들어 한다. 성경이 주신 지혜를 세상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도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다. 성경을 세상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근본 이신 예수님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해석을 해야 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지신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는 부모님들과 성경 교사들이 성경을 읽고 세상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용어를 써서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의 지식만을 준다.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가만이 있으라고 하고 밥을 먹여 준다. 많은 부모님과 성경 교사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을 생각하여 직접 요리하고 만들어서 청소년과 청년들의 입에다 먹여 준다. 이들은 성경 교사가 준 지식을 받고 적을 뿐 세상으로 나가면서 잊어버린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안에 있을 때 충분히 발휘가 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밥을 먹는 방법을 알려 주어야 독립적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이 밥을 어떻게 짓고 어떻게 먹는지 안다. 복음을 받은 청소년들이 성령 관점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기도하면서 세상에 이기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말씀 해석하면서 기도자는 되는 것이 어떻게 밥을 짖는 지 아는 것과 같다. 기도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는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며 그 말씀 해석을 통해 기도자 되어야 한다. 어쩌면 고난이 있는 가정과 교회는 그래서 기도처가 된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문제를 기도할 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며 더 깊은 영성을 형성한다. 하나님은 고난을 이용해서 철을 담금질하듯 단단하게 한다. 이런 영성의 원리를 가정과 교회에서 알려주면 아이들은 무너지지 않는다. 교회의 성경 교사와 부모님은 청소년들에게 그 지혜를 성경에서 어떻게 찾아 갈지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단순히 지식만을 주는 성경 교육의 형태는 진리와 영성을 가르치지 못한다. 마치 산에서 아름다운 숲에서 나무의 종류만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성경 전체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름다운 숲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예수님의 피가 성경 전체에 서로 관통되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가야 한다. 많은 초보 신앙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어느 한 부분만을 읽고 단순이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부분에서 QT를 통해 묵상을 하지만 숲에서 나무만을 보고 숲을 판단한다. 마치 코끼리 꼬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털로 된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어쩌면 많은 초신 자들이 이러한 우를 범하지 않을 까 걱정된다. 초신 자나 청소년과 청년들이 매일 한 부분만을 읽고 가르친다면 어쩌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주는 것은 단순한 교훈 이상을 넘지 못한다. 성경의 거대한 숲을 먼저 해석해야 한다. 먼저 성경의 거대한 숲을 해석하고 길을 찾은 다음에 지나가는 길에 나무를 보면 그 나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을 원하고 있다. 당연히 부모님과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 지금의 청소년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최 우선 과제이다. 청소년들은 이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랑자이다. 그런 청소년들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정체성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만을 따지고 보이지 않는 것은 허상이라 생각한다. 사탄의 유혹에빠진 세상은 보이는 것 만을 추구하게 한다. 사탄은 청소년들에게 성적, 외모, 부자가 최고가 되라고 속삭인다. 세상은 결코 이런 가치가 최고가 아니다. 그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면 결국 끝없는 욕망의 죽음으로 끌고 간다.
또한 청소년들에게는 진화론의 굴레가 쒸어져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은 우리 사람을 원숭이 자손으로 바꾼다. 짐승과 같은 존재로 바꾸면서 양육강식의 원리를 가르친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고 어떻게 구원하였는 지 아는 지금 세대는 이것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며 사탄의 거짓말이다. 보이는 것만을 믿게 하는 이 이론은 청소년들이 성장해서 믿음에서 멀어지게 한다. 결국 청소년들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교회에 안 나오게 하는 이유가 된다.
청소년들에게 보이는 것만을 쫓는 양육강식의 결과와 순위로 따지는 세상과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 영적 세계관의 싸움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선지자들의 증거를 알게 하면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주는 것이 바로 부모님과 성경 교사, 교회 공동체가 할 일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수님의 증거를 전하는 것은 부모님과 성경 교사들의 의무이다.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된다. 오직 예수님만 가르치도록 성경의 숲을 보게 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증거들을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 지 하신일을 알려 주어야 한다. 창조, 임마누엘, 십자가, 부활, 재림의 역사를 신앙으로 바꾸어줘야 한다. 성경에는 이 하나님의 역사가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말씀을 해석하고 기도자로 키워야 한다. 절대로 세상에 율법으로 가르치어서는 안된다. 세상의 보이는 규칙으로 성경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 영적인 것을 육 적인 것으로 가르치면 안된다. 영적인 것은 영으로 가르치고 해석하는 방법을 알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 영적인 관점과 기도를 통해 거대한 말씀의 숲에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오신 예수님의 형상이 되게 해야 한다. 그 생명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구원의 확신이 들면서 많은 이웃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의 길로 안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 원리이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계시로 주시며 은혜로 영성을 주신다.
성경을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분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통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신성을 통해 역사 속에서 태어나시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당신이 십자가에 지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운명을 알았다. 절대로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우리와 똑같이 숨을 쉬고 인간과 똑 같이 살다가 가신 분이다. 십자가에 지신 무게를 우리와 똑 같이 느끼고 손에 박힌 못을 너무나 아파하신 인간이다. 완전한 인간이시며 육으로 오신 하나님 절대 하나님이시다. 이 두 가지 성격이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당신이 예수님의 관점을 생각할 때 잊어 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관점을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 회복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 번째 당신이 성령 관점 관계는 성경의 인물의 관점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그 상황이 되면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를 대입하여야 한다. 당신은 그 상황에 무엇을 느끼었을 까 생각해야 한다. 위의 그림처럼 구약의 역사서, 창세기, 출애굽기 등은 바로 먼저 이런 관계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두 번째 다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의 인물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성격 즉 기존의 성경의 통독을 통해 느낀 하나님의 성격을 당신에 대입하여 그 성경의 인물을 보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선지 서나 잠언 등 비유를 들거나 대상 인물이 없을 때는 먼저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어야 된다. 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인간에게 했는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그 관계 속에서 다음에 당신의 관점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말씀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 과정이 된다.
세 번째 당신이 신약을 볼 때는 많은 부분을 관점의 이해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신약 성경은 우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관점을 먼저 더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세상에서 평안과 풍요를 누리는 것이다.
우선 당신이 예수님이 되었을 때 다른 성경의 인물을 보는 관점과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관점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관점은 당신이 아버지를 생각하면 된다. 가족을 생각하면서 서로 간의 아버지의 관점을 이야기했으면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아버지를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당신의 아버지 상이 하나님과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신은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당신을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 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당신의 육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학대하거나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의 인생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원수로 느껴 질 때 당신은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칠 때 육신의 아버지가 용서가 되고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또 그리고 당신의 아들 딸이 자라나면서 당신의 당신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며 아버지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이 가족을 이런 이유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 아들과 딸을 생각하게 하는 부정과 모정을 이끄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마음을 대입시키게 하기 위해 이러한 가정을 만드신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관점 원리를 발견하는 하나님의 작은 나라이다. 여기에 사랑과 긍휼과 은혜가 있다. 이런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사탄이다. 이런 사탄의 공격을 이기고 그렇게 중요한 가정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진정한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있는 데 이것은 당신이 아들 딸을 보는 관점으로 본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는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 관점이 있다. 이렇듯 인간 세상에서 보는 관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의 관계가 원천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흉내 내는 정도가 될 것이다. 더 그 사랑은 깊고 넓다. 그리고 신약에서 나오는 이웃은 당신이 형제라고 보면 된다. 같은 아들 딸이라고 느낄 때 당신이 관점에서 당신은 형제처럼 그 들을 대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대 명령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바로 형제와 같이 느끼고 사랑으로 그들을 보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 앞에 서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제일 신비하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분이 죽음을 통과하게 하게 하신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을 시킨 성령이 우리한테 적용이 된다. 이 죽음을 통과한 영이 우리 영으로 들어오는 것이 성령의 임재이다. 즉 예수님의 영이 우리한테 적용되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날이 정해저 있다. 이것이 부활의 예정이며 소망이 된다. 재림은 하나님의 역사 중에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재림은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소망하고 있으며 이것 또한 앞으로 일어날 예정이다. 부활과 재림이 말씀으로 증거되어 성도들에게 예정이 되고 소망이 된다. 이것이 부활과 재림의 신앙이다.
이런 소망이 되는 성경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성의 양식이 된다. 부활과 재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그 믿음이 우리 한테 소망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은혜로 다가온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그 주권에 어떻게 순종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은혜를 주셨는지를 알게 한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의 영성 형성에 무엇인가를 말하고 계신다. 이 관점을 가지고 충성스러운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충성스러운 자는 그동안에 습관으로 만들어진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에 적용한다. 결국 증인이 된 사람은 이웃을 향하여 사랑의 증인이 되고 그들에게 소명과 사명을 전한다. 이 때 그들은 교회의 삶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이다. 복음 전도할 사람을 생각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증인으로 써 부활과 재림을 증거한다.
이 이웃에 전도할 사람을 찾아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증거들은 성경의 모든 부분을 다 할 수 없지만 어떻게 말씀을 전할지 고민한다. 어떤 방법으로 전도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방법과 각 증거들의 경험을 스토리 텔링 신앙고백의 토대로 전도를 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 이렇게 쌓인 증거들을 생활하면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전도와 선교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좀더 많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점을 이해한다.
이것이 습관화되면 성령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세상을 해석하며 당신이 가지는 직업을 통해 비전을 적용하는 단계로 넘어 간다. 모든 성경은 성령 관점의 적용 원리를 통해 당신이 가진 직업, 삶, 취미를 통해 이웃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다. 필자가 만든 성령 관점 관계 양육시리즈는 4 번째 책은 성경의 적용 원리를 어떻게 직업을 가지고 그 직업에서 일어난 지식을 성령 관점으로 적용했는지 적었다. 필자의 직업 IT를 통해 적용한 것이다. 이제 당신은 당신만의 직업을 통해 성령 관점 성경 적용 원리를 만들 수가 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우리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에게 어떻게 영광을 돌리지가 중요하다. 그러려면 말씀을 묵상하고 QT를 하면 직업을 가지는 삶과 당신의 일상의 삶을 적용해야 한다. 이것을 영성 일기라고 하고 싶다. 영성 일기는 이것을 통해 우리 삶의 목적이 생긴다. 영성 일기는 성경 한 장 한 장 당신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데 흐름을 묵상하면서 적용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영성 일기는 성경의 구약에도 예수님이 묵상 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로 통일성이 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구약을 묵상하고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실제 성경의 인물의 관점에서도 묵상을 해야 한다. 실제로 다양한 관점의 묵상은 당신의 영혼을 살찌울 것이다.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묵상을 하고 난 후 당신만의 노트에 꼭 적어서 적용 해야한다. 누구도 당신이 될 수 없다. 당신만의 직업을 가지고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매일 영성 일기를 적다 보면 묵상 속에서 성령이 당신에게 변화를 시키는 것이 생길 것이다. 나 자신의 영성 형성을 위하여 이것을 받아서 적어야 한다.
영성 일기를 쓰면서 기도로 묵상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하면 나를 변화시키는 첫 번 째는 바로 회개이다. 보통 서로 다른 물질이 만나면 화학반응을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과 내 자신의 영혼이 만나면 무엇인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나의 영혼에게 성령이 깨닫게 한다. 당신만의 색깔로 당신이 느낀 회개를 적으라. 당신이 다시 죄를 지을 때 당신 자신에게 위안이 될 것이다. 전체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 예수님의 관점,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인물의 관점을 넣을 때 저절로 당신에게는 기도와 회개의 시편들이 나올 것이다. 때로는 성경의 몇 파트를 통째로 읽고 그것에 대해 묵상하면서 또 하나의 기도문이 만들어 질 수 가 있다. 당신의 시편을 만들 수 있고 당신만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었을 때 당신은 작은 예수로 가는 길을 가게 된다. 영성 일기에 이 모든 것을 적어야 된다.
그 다음 당신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할 때 당신이 가진 것에 감사를 드린다. 구원에 감사, 자식에 감사, 사는 모든 것에 감사, 내 달란트에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다. 이것이 예배이다. 당신만의 색깔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한 다양성을 무척 좋아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말씀과 온 땅에 충만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바벨탑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곳에 있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각기 다른 언어를 주시고 다양성을 추구하신 것이다. 인간들이 모든 자연과 모든 살아 있는 짐승을 다스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을 각자의 생활 문화, 예술, 노래, 그림, 음악, 글 등으로 표시할 때 하나님은 좋아하신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예수님을 믿는 성령에 들어가 각자의 색깔로 각자의 직업으로 각자의 달란트로 각자의 믿음으로 각자의 성화로 각자의 예술로 각기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작은 예수들이 탄생하는 것을 보시면서 당신의 묵상 시간에 같이 계실 것이다. 정말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성화되는 초기에 있다. 그리고 점점 더 당신의 마음에 성령님이 하시는 데로 따라 하게 되는 자연적인 습관 기도와 회개, 감사의 시간이 더 중요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소망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이지 않은 증거를 가지기 위해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은 성령의 열매를 가지게 한다. 성령의 열매는 익으면 스스로 씨가 되어 다른 사람한테 성령의 은혜를 전한다. 마치 밤송이가 익어서 벗겨지듯이 씨앗이 땅에서 죽어 다시 새 생명을 얻듯이 당신은 무엇인가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다른 영혼을 위해 아파한다. 성령의 열매는 성숙하고 무르익으면 무엇인가 표시를 낸다. 악한 세상에 당신의 성령님은 예수님의 복음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친구를 만나도 예수님을 증거하며 거리에 사람을 만나도 예수님의 복음을 생각할 것이며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증인으로 행동을 할 것이다. 다른 영혼을 구하는 일이 세상의 최고 값진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며 당신 삶의 최고 목적이 되게 된다. 세상의 좁은 길로 가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세상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선포하고 당신이 만든 제자 비전 선언문을 실행하면서 하루하루를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천국 같은 세상을 걸어 갈 것이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성경의 비밀 원리가 보인다.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나타나느냐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만물은 이제 벌거벗을 것 같이 하나님 앞에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성경에 우리가 보는 관점으로 드러나게 만드신다. 이것이 우리의 비전 선언문으로 드러나고 적용되어야 한다. 어떻게 드러나는 지 보는 것 즉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적어 야 한다. 드러나는 것은 관점의 차이에 의해 죄가 될 수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예수님 같이 만들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성품을 드러났을 때 기뻐 춤 추실 것이다. 그분과 하나됨을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맞은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로마서 1:16 -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런 복음의 영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고 하였다.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영성으로 사는 삶이다. 복음의 정의는 영성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영성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을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영광으로 나에게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성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이것을 우리 영성생활에서 적용해야 한다.
영성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먼저 시작하면 안된다. 영성은 하나님이 드러낸 의를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저주가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에 드러났다. 사람의 저주를 대신 받는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바로 사람의 죄를 대신하게 하고 심판하게 하였다. 사람대신 예수님에게 행하여진 심판 또한 하나님의 의이며 사랑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그것을 믿는 사람 속에서 대신 의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이 사람 속에서 드러나기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 오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의가 사람에게 관계 속에서 사랑과 공의로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에게 삶으로 적용시키 시었다. 그렇게 하므로 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 관점 관계의 적용원리이다. 이 적용 원리로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몸이 죽든지 살든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그분을 존귀하게 여기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는 사람의 영성은 바로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고 말씀을 묵상하며 세상에 적용하는 지 알게 한다. 이 성경의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사용되지 않는 언어를 쓰면서 성경 지식을 알리려고 한다. 성경이 왜 이해를 할 수는 없는 지 납득이 안 간다고 그들에게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 한다.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성령 하나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나아 가게 하신다. 기도가 성경의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시키며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 친밀하게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며 관계와 관점을 통해 성경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이해시키신다. 또 한 그 분의 목소리는 인격적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예수님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관점이 그 친밀함 속에서 생긴다.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친밀한 대화 기도는 그 만큼 중요하다. 예수님의 관점이 되면 모든 것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아 가게 한다.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이 성도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로 회복된다. 기도는 구원의 확신과 소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 서 마음의 평안이 생긴다. 기도는 바로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찾아 가며 적용하는 길이다. 성경 말씀은 영적인 것이므로 성령 하나님께서 영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지혜와 소통을 통해서만 성도를 만지신다. 하나님과 소통은 바로 기도이며 성령이 임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말씀으로 전하는 소통된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의 적용을 가지고 있다. 기도를 통해 어떤 사람은 사랑의 말씀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한다. 어떤 사람은 지혜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관점을 이해한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죄를 짊어 지신 아들의 고통을 그대로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성경을 보면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에서 출발하여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게 하고 기도와 응답으로 증거하게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성경 말씀의 지혜조차 없이 성령님의 기도를 드리니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마음에 기초한 이성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면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성은 기적적인 믿음의 삶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분을 그저 피상적인 하나님이라 부르며 우리 속에 생명으로 받아들이 지 못한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성의 판단을 통해 지식으로 받아드리려고 하여 결국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 충만을 방해한다. 이들은 말씀을 듣는 것과 삶이 분리되어 가고 삶으로 못 보이는 것을 스스로 비관까지 한다. 이들에게 평안이 있을 수 없으며 말씀의 실체가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 복음의 능력이 기도를 통해 일어날 수가 없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는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의 실체를 가지고 변화시키는 분은 성령 님이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기도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계시에 따라 마음의 빛이 밝아지고 하나님을 알게 한다. 내가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소망으로 기도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부름 심의 빛은 성령과 함께 기도를 드리며 그 기도의 응답이 영혼의 응답이 된다. 이 기도를 통해 성경에서 응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마음의 빛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여기 마음의 빛이란 바로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찾아 가는 영성을 말한다.
마태 28:16-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이 주신 대위임 명령은 믿음의 비전을 통해 이루어가는 성령 관점의 관계 원리로 보는 제자의 원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에 제자 도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자이며 그 백성의 속성인 예수님을 닮아 진리를 찾아 가는 구도자가 된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이며 말씀을 듣는자의 삶 자체이다.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사탄의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린 승리자이다. 사망을 이기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다시부활을 하시었다. 이로 써 예수님은 모든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었다. 예수님은 죽음에 구속된 완전한 인간으로서 첫 번째 승리자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시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창조자의 권세이다. 즉 사람을 새창조하는 역사가 예수님한테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믿으면 옛 사람이 새사람이 되는 권세가 예수님한 테 있는 것이다. 재 창조 된 사람인 성도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다. 세상으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하시었다. 그 분께서 대 명령을 내리시었다. 명령에 실행하고 응답하는 것이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났다. 우리가 순종할 때 예수님께서는 함께 하신다. 즉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다는 것이 제자의 삶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예언이 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위임 명령을 교회의 현실에 맞추어 제자양육 프로그램에 맞추었다. 이런 결과로 제자도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통일성과 연속성에서 떨어졌으며 프로그램의 하나로 여겨 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삶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분리하여 해석되어 왔다. 이렇게 분리하는 제자의 개념은 그 결과 성도가 가진 교회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마태복음의 초대 교회의 히브리인들은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며 연속적으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남은 자 히브리인들은 제자도가 평생을 헌신하는 연속적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더욱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에 비전이 생기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연속적이며 비전을 가지고 삶 전체로 보여지는 그리스도인 영성형성이 가능하였다.
그런 연속적 비전은 진리를 듣는 자로 써 삶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성령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게 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비전으로 하였다. 연속적 비전을 가진 초대 교회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과 문화에 맞게 되어 진정한 제자로 삶을 살았다.
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른 히브리인들은 다른 것에 제자가 된 상태였다. 즉 수건을 두르게 된 것처럼 율법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들의 눈을 가리었다. 예수님이 맹인을 눈 뜨게 하시면서 말씀하신 영적으로 눈먼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다는 것은 성령 관점으로 비전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성령 관점의 비전이 없어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인 초대교회 히브리인들은 성령의 임재로 거듭났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그들은 삶으로 제자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였다. 제자들이 구전으로 전한 것도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제자도는 교회로 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안에 있었다. 여기에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통일되고 연속적인 삶으로 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히브리적 사고가 만나서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제자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 누구도 제자가 한순간의 프로그램으로 단순하게 끝난 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고 진리를 듣는 자로 살았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고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인 제자의 삶으로 적용시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교회들은 성경의 신학적 해석을 헬라 관점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삶에서 제자 도를 분리하여 예수님의 대 명령을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이런 헬라 관점으로 만든 신학적 바탕에서 제자 도를 생각하면 결국 안 된다. 이런 헬라 관점의 제자 도는 이성과 경험을 위주로 하는 바탕이 있기 때문에 분리된 의식으로 제자 훈련이란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 위임 명령 구절이 가지고 있는 적절한 해석은 마태의 공동체가 가진 히브리적 공동체 상황의 통일적이며 연속적인 삶으로 제자 도를 생각하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 유대인이 가진 히브리적 사고 방식이 성령 관점 관계의 연속적 비전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렇게 하므로써 그리스도인 가져야 할 제자 도의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을 이해한다.
히브리적 사고의 해석으로 예수님의 세가지 큰 명령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두번째는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며 가르치라. 세 번째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기서 첫번째와 두 번 째는 마치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과 그것을 땅에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제자로 키워야 하는 데 있다. 이는 제자 화가 좀 더 큰 상황인 그리스도의 속죄, 부활, 승천, 영화를 포함하고 연속적이며 예수님 안에서 통일성이 확인된다. 예수님의 몸이 교회 인 것도 그 제자 안에서 통일성이 완성된다. 여기서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되었을 때 이루어질 교회의 소명을 말하고 있다. 이것 또한 예수님의 소명이다.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는 분리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갖는 소명과 사명이 예수님 안에서 통일된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제자 란 단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실제로 묘사한 말이며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로 예수님 안에서 통일된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73번 마가복음에는 46 번, 누가복음에는 37번 등장하면서 초대 교회의 제자 영성 형성을 세워준다. 이 단어 자체는 히브리 식 여행이란 뜻에서 “ 뒤를 따르는 “ 이란 의미로 삶의 여정을 갖고 있다. 초대 교회에서 새롭게 되는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모델로 삼아야 하며 그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고 삶으로 살아 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의 과정에서 세례와 가르침은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는 중요한 명령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제자 도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영적 양식을 먹이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해 영적인 삶에서 믿는 것 순종하고 이해하고 행동하는 헌신의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여기서 제자는 대가 지불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순종하고 헌신하는 공통적인 요소가 결국 대가 지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가지도록 선물을 주시는 것과 같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가 성령 관점 원리로 함께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예수님 안에서 있는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의 권능을 위임받는 것과 같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제자들이 같이 받는 다.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제자 훈련의 삶의 소명을 주도록 권능을 위임하였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것은 성령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모든 제자 훈련에 있다. 이는 성령 관점은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예수님의 뒤모습을 십자가를 들고 따르는 여행이 포함된다. 성령 세례가 바로 그 기름 부은자의 권능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표현해야 한다.
위의 같이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의 비전원리를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지고 대위임 명령에서 나오는 것을 분리하지 말고 따로 프로그램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과 함께 했을 뿐이다. 선교와 전도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함께 하면 된다. 그들이 함께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과 함께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내안에 예수님을 표현하면된다.
이렇게 초대 교회는 단순하게 제자의 삶을 사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여정으로 만 보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삶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게 하시고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일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이다. 지금 교회에게 초대 교회에서 했던 방식으로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마누엘 역사를 그대로 전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성도들과 함께 살면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도록 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회로 부터 제자를 훈련하는 것은 성령 관점 원리로 교육을 해야 한다. 세가지 대위임 명령은 기본으로 예수가 복음 전도를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와 제자 훈련을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원리로,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을 성령 관점 관계 적용원리로 만들어 연속적 제자의 삶을 성령 관점 관계원리로 진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분해해서 소개하지 않으면서 연속적인 성령 관점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마치 초대 교회의 오순절 성령의 임재 모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성령 관점은 가진 사람은 히브리적 사고처럼 성령의 임재가 연속적으로 공동체적 삶을 예수님에게 맞추어서 온유한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믿고 충성스 런 제자로서 삶이 통일되고 성령 관점의 연속적인 영향을 주면서 성장하게 된다. 성령 관점의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와 말씀으로 듣는 자가 되고 성령 관점의 해석을 가진 자는 기도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인의 온유한 품성과 정체성에 통일된 영성 형성이 이루어진다.
많은 교회가 코로나 이후로 힘들어 한다. 신학적 관점이 해석하는 제자의 개념이 헬라 적 관점으로 분리하여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보는 이성이 첨가되면서 제자가 가지는 영성의 힘이 빠지게 된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제자 훈련이 끝나고 성도들은 제자의 가르치고 뒤를 따르는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는 데 제자로써 훈련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에 나가는 성도는 제자의 영성 형성이 힘들어지면서 다른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도하는 것이 힘들어 지는 것이다. 제자의 본질을 모른 체 영적인 수준이 제자 훈련이 끝나게 되면 영적 목마름으로 더 많은 성도들이 다른 교회의 좋은 프로그램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이것은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제자의 의미를 몰라서 사람들이 연속적인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여행자의 삶으로 바뀐다. 성경의 숲을 여행하고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제자도 영성의 삶에서 성령의 증거를 드러내며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제자의 삶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제자 도의 영성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꼭 성경을 읽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이신 예수님을 매일 느끼면서 영적 형성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성경의 숲은 아름답다. 그 안에 있는 호수는 더욱 아름답다. 성경을 해석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마치 여행을 하 듯 성경의 숲을 보는 방법이 좋다. 분리해서 보는 것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여행을 하는 것처럼 연속적인 파노라마 처렁 여행을 하는 것이 좋다.
이제부터 성경을 어떻게 연속적으로 여행하듯이 적용하는가 알아보겠다. 성경에는 길이 있다. 수많은 길이 나 있지만 인격적으로 이해하시고 안내 할 수 있는 분이 있다. 예수님으로 향하게 하는 안내하는 영이 있다.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우리의 죽은 영을 생명으로 살게 하시고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안내하는 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통해 다시 태어난 영적인 생명에 양식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인간은 오직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와 하나님과 마음을 연결을 시도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여행하는 사명자의 기초가 된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이 자라는 것과 연결된다. 그런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지식을 알아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성격을 유추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성경을 읽는데 목적 없이 재미로 읽고 난 후 성경이 나 한 테 주는 메시지를 생각 안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성경을 읽고 듣고 이해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성령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 속에 있어 안내하실 것이다. 그 성령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의 영성의 상황을 아시고 성경으로 읽고 복음을 증거 되게 한다. 결국 그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부어지고 인격적인 관계를 삼위 일체 하나님과 관계 형성이 되게 된다. 그 근본이 바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복음이 가지는 본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야만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된다. 이것이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이다.
첫 번째 단계 성경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길은 예수님의 핏 자국을 찾는 작업과 같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그 핏자국은 하나님의 의의 자국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같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주권을 찾으려면 처음은 정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독을 통해 성경의 길을 찾아 읽는 것이 좋다. 마치 숲을 볼 때 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전체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숲으로 보고 길을 안내하는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 안에 있는 것이다. 열대림에는 무성한 나무가 있고 추운 지방에는 앙상한 나무가 많다. 추운 지방에 있는 나무가 앙상하게 있어 숲의 길이 보인다. 열대의 나무는 무성함이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성경을 무겁게 순서 적으로 읽을 때 무성한 가지가 있는 것처럼 숲 전체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성경 전체를 보고 길을 찾는 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의 길을 찾은 후에는 계속적으로 QT를 통해 일고 나무가 무성하게 하면 그 숲이 길 따라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첫 번 째 거꾸로 영성인 하나님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성경을 전체로 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통으로 읽는 것은 속독으로 하면 좋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내는 데 목적을 두고 하나님의 모든 마음을 알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적어 내야 한다. 몇 가지 당신이 알아내는 하나님의 성격을 알아낼 것이다.
필자가 초기에 성경을 통해 느낀 하나님의 가장 큰 성격은 하나님은 공의와 평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로마서에 잘 나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서 등에 잘 나와 있다. 우선 처음부터 창세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두고 로마서와 요한복음을 읽게 되면 좀 더 하나님의 뜻과 거꾸로 영성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신약을 읽으면서 구약의 인용 부분을 체크하고 그 구약 구절을 같이 읽어 준다. 그런 후에 다시 구약을 창세기에서부터 읽으면서 신약에서 언급된 부분을 같이 읽게 되면 언약의 길이 어떻게 흘러오는지를 알게 한다. 그리고 다시 신약을 읽으면 구약과 신약에서 흐르는 피와 언약의 길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어째 든 당신이 알아내는 하나님의 마음과 성격이 당신이 가진 영성의 기본으로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고 두 번 째 거꾸로 영성은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면서 기도를 드리고 어떠한 분이 신지 거꾸로 상상을 해야 한다. 우리의 상상은 많은 것을 알아낼 것이다. 한가지 단서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부활 체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관계성으로 완전한 회복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똑 같은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창세기에 나와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결국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닮아 가는 길이 목표이다. 신약에서만 예수님께서 나오시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이번 단계의 목적은 영이신 하나님의 성격과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격을 좀더 많이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였는지 생각하고 예수님의 관점으로 그 상황에서 당신이 무엇을 말하였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거꾸로 영성 훈련의 기초가 된다.
세번 째 거꾸로 영성 훈련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당신을 바라 보아야 한다. 한가지 당신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 고백과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이며 단단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굳어진 마음은 방향의 전환이 어렵다. 부드럽게 되지 않으면 회개도 안되고 고백도 안된다. 회개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고백이 이루어 진다. 이렇게 육신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영이 우리 마음에서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 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 말을 하게 하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 고 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의 이런 고백 위에 교회를 짓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새로운 영이 우리 안에 임재하였고 그 마음 안에 성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베드로가 고백을 한 것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 고 자연적으로 고백하여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당신이 가지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그 믿음 안에 있을 때 모든 구원이 시작되고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당신은 알맹이 없는 열매처럼 빈 껍데기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 기본 원리며 부르심을 통한 회심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구도자의 길로 들어서며 회심하게 하는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다. 성령은 진리를 입증한다. 성령은 예수님의 진리 안에 있게 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것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로 가능하다. 진리를 알게 되면 자기 자신의 상태가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바로 회심이다. 그러기 위해 탕자의 관계 회복 방법론 7R을 써서 구체적으로 성경 전체의 스토리 보드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그룹을 지어서 성경이 어떤 구조로 탕자 같은 죄인이 관계 회복이 되는 지를 알게 하면서 청소년 스스로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심은 사람에게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회심한 사람들이 삶의 방향이 바뀌지 않은 것은 회심이 감정적으로 이루어진 것밖에 없다. 영성으로 회심해야 만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의지가 필요한 부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 임재로 새 창조가 되는 것이 바로 회심이다. 전혀 없던 새로운 마음에서 살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성령 하나님의 수단은 말씀으로 인을 쳐서 증거를 보이신다. 사람이 어떤 논쟁의 거리가 없이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인데 결국 성령 하나님은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로 안내를 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로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로 진행되는 1단계를 전하여 하다.
그러므로 전도와 부르심의 단계 사회적 연계 망을 통해 접근하여야 한다. 우리 시대와 비슷한 문화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의 초대교회는 다른 사람에게 항상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정 단위로 환영공동체를 창조하고 그들과 연계된 사회적 연계 망으로 아웃 리치를 했다. 오늘날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연계 망을 가지고 아웃리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코로나의 시대에 이탈리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접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많아 진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고난 속에서 회심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많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이다.
전도의 가장 우선적인 방식은 가정 같은 친밀한 관계로 전도의 문을 여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이 고난이 있고 가난과 병으로 힘든 것을 아는 긴밀한 관계는 결국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에게는 결국 사회적 연계 망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처음에 병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고쳐 주시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회적 연계망을 연계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난이 온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먼저다.
누가복음 11:8-10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면 어떤 사람도 도와준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사람이 기도로 구하면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먼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부르심의 원리가 사회적 연계망이 교회에게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연계망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한후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회심하게 된다. 여기서 사회적 약자는 기존의 사회적 연계망에도 연결이 안된 사람을 먼저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호수 같은 바다도 건너셨다. 이웃을 사랗하는 성령 관점의 눈은 바로 이렇게 봐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만난 병자들은 이미 수많은 시도로 치료를 원했지만 사회적 연계망으로는 그들은 치료가 힘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에게 찾아 갔다. 그리고 치료하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이러한 형태의 부르심으로 전도의 연결 망을 만들어야 한다. 성령 관점으로 예수님께서 오실 자리를 마련하고 아웃리치하는 형태로 접근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특히 부모님이나, 성경 교사, 교회 선배와의 청소년의 일대일 관계와 영적 사회적 공동체를 위한 아웃 그룹을 세워주는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불안정한 시기이며 매일 매일의 공부와 친구 때문에 힘든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때 부모님과 성경 교사가 그들에게 쉼을 주어야 한다. 연극, 영화, 댄스 무엇이든지 좋다. 청소년들이 즐겁게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사회적 연계 망을 구축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후 청소년들에게 성경의 말씀의 틀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처음부터 주입되 성경의 지식은 청소년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거꾸로 영성 훈련은 하부르타와 거꾸로 교실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브루타로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그룹을 통한 토론을 진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많은 질문을 만들게 하고 전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대질문인 공동체 질문에 대한 응답을 성경의 틀이 만들어 공동체가 같이 이해되도록 스토리 보드를 만들게 하는 것이 좋다. 이 때 질문으로 청소년들에게 영혼의 치료를 하듯 응답을 성경에서 찾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 교사가 만든 성경 관점 원리의 전도 교재인 청소년들의 일대일 코칭을 위한 교재가 제공되어야 한다.
또한 성경 관점 기본 원리인 부르심과 회심의 단계는 가정 공동체를 통한 예배를 지원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성령 관점의 증거를 만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성령 관점 관계 기본 원리의 전환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데 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믿음의 신앙공동체에 몰입함으로 그 공동체 안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렇게 예수님 관점으로 해보면 거기서 얻어지는 증거가 나오고 이를 보고 대화의 창을 열게 된다. 우선은 교회 공동체가 청소년부와 가정 예배를 지원하는 이웃그룹들과 함께 먹고 모이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마치 가정교회의 모습 같은 형태로 어른들이 만들어주어 아이들끼리 진행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때 부모님은 성경 교사와 함께 보조로 스토리 보드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도록 한다. 그러나 절대로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며 성경을 스스로 알아보게 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거꾸로 영성 훈련 플랫폼 교육이다. 교회가 플랫폼을 통해 거꾸로 영성 훈련을 성경 교사, 부모님이 성경 교사와 같이 공동체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주일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전할 수 있다. 그들이 공동체 플랫폼에 연동시켜 구성원으로써 성장하게 해야한다.
처음에 만난 약자와 병자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궁휼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었다.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느낌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 죽었던 그들을 살리면서 예수님의 관점은 그들을 긍휼이 여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의 성숙된 신앙울 가진 성경 교사들은 모든 청소년들으 궁휼이 여기어야 한다.
예수님은 처음 만난 안드레 제자에게 “와서 보라” 하시었다. 결국 듣고 보고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사랑하는 지를 보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가정에서 이 사랑을 보여 주고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 라고 하였다. 결국 복음은 전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증거를 가지고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로 부터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듣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법을 추구한다. 사람중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 간다. 그 증거가 쌓이고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성경 공부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공동체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초보 신앙인들에게 와서 듣게 하고 보게 하는 예배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도록 연계망을 연결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증거를 교회의 연계망에 흐르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가난한 한 영혼에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한 양을 비유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이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많은 교회가 부흥의 개념을 성도의 숫자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많이 주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로 소유의 복을 먼저 생각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성도가 많은 것을 추구하다 보면 돈이 많이 들어오고 좋은 건물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부요한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증거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준다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도가 많고 돈 많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부흥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성도가 없고 돈이 없는 교회는 선교룰 하는 것을 성도들이 많이 들어오면 한다고 한다. 결국 돈이 없으니 선교를 못하니 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것은 존재의 부요를 모르고 복음의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눌 때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 하시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한 영혼이 회심한 것 두고 천국이 잔치를 연다고 하였다.
이것이 존재의 부요가 이루는 기쁨이다. 교회와 가정은 세상에 맡겨진 청지기이며 한 영혼을 생각하는 하나님 마음을 전해야 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도 한 영혼의 중요성을 나눌 때에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성령 관점을 가지느 사람들이며 가정과 교회가 계속 청지기로써 연속성의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또 한 성령 관점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듯이 떄를 따라 한 영혼인 이웃을 사랑하고 각자의 달란트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증거를 삶으로 예배로 보여 준다. 교회는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도돠 선교로 한 영혼인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교회가 보여주는 진짜 예배는 말씀을 선포하고 진리를 행동화한다. 이렇듯 성령 관점의 증거가 하나님 나라의 핵심으로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이 첫 번째 말한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는지 라 하시었다. 예수님이 전한 이 복음은 하나님 나라 천국 복음이다. 이 모든 것은 천국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천국을 빼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빼서는 안된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를 청소년들에게 주어야 한다. 회심은 성령의 기름부음과 권능으로 일어난다. 회심하는 마음은 결국 교회로 부터 말씀을 듣고 한 영혼을 생각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 결과로 나온다. 이 시작이 성경의 말씀을 통하게 한다. 첫 번째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 주는 회심의 과정은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은 구도자로 가는 재창조의 과정이며 성령의 임재가 되게 하는 데 있다. 이 과정은 회심하며 구도자로 가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인 지 성경 교육을 통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한다.
두 번째 성령 관점 관계 비전 원리는 제자가 되는 비전을 가지는 거꾸로 영성 훈련이다. 믿음으로 회심이 이루어진 청소년들이 진정한 복음을 아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칭의로 말한다. 하나님 관점에서 죄들의 용서이며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고 하나님과 화해가 되는 것이다.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용서가 이루어진다. 용서의 확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칭의의 수단은 회개로 이루어진다. 믿음으로 의를 의롭다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전제가 안된 것으로 의롭다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보혈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거룩한 백성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선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거룩한 삶에 동행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수레가 가는 두 바퀴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것을 인도하시는 분이다. 성령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다. 성령 하나님은 조용히 변화를 일으키신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 코이노니아의 교제를 하신다. 이 교제를 통해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가지는 비전을 주신다. 이것이 성령 관점의 비전의 영성 훈련이 된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비전의 과정을 주시면서 조용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한다.
성령 하나님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육체의 정욕으로 제자가 되겠는 다는 욕심이 있으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닌 나의 추종자들을 나의 제자들로 만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역자나 교회 가정에서도 일어난다. 내가 주인이 되어 제자를 기르고 나의 추종자로 만들기 위해 제자를 만든다. 자기는 부인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혹을 받는다. 과거 히브리에서는 관습적으로 제자는 스승보다 능가하기를 바라고 제자들은 스승을 따랐다. 스승도 그러한 제자가 따를 때 언젠가는 자기 보다 한수 위의 제자가 되길 바랐고 그들이 자기 추종자들을 제자 화기를 원했다. 결국 사람은 제자가 누구를 따른 것은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스스로 추종자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 찾았다. 제자훈련의 첫번째 서약은 오직 예수의 제자만 되겠다는 의미이다. 그 과정은 성령 관점 관계 비전 원리에서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이 비전 단계는 진리를 듣는자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기가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칭의를 통해 성령 하나님의 임재가 있게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받게 된다. 즉 성령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닮아 1차 소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성령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신앙 고백 스토리 텔링을 말하게 한다. 말씀의 진리를 듣게 되는 데 그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으로 말씀이 임하게 된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고백하게 한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스토리로 알게 되고 말씀으로 신앙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스토리텔링의 신앙 고백이다. 이것을 고백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반석위에 교회를 만드신다고 하신 것은 그만큼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은 아주 중요하다. 즉 베드로 개인이 반석이 된 것이 아니라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위에 교회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이 디딤돌이 되어 교회가 만들어진다. 결국 교회는 같은 신앙 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모여 있다.
그러나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한 제자로 살지만 완전치 못하다. 바로 베드로가 이 신앙 고백을 한후에 사탄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듣는 다. 아직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존재이며 성화와 과정이 필요하다. 임마누엘의 신앙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서 말씀을 주시고 계속 듣는 자로 만드신다. 베드로는 말씀을 듣는자로 있었지 말씀을 해석하는 단계를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주님을 만류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성화의 과정속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구분하고 기도로 말씀이 해석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다시 용서하신 예수님이 세번 사랑의 질문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고 해석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누구인지도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이 제자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의 스토리 텔링 신앙 고백은 아버지 하나님이 직접 고백하도록 하게 하신다. 그러니 제자로써 가지는 비전의 모든 과정이 은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1: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런 베드로가 나주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말씀을 해석하며 지도자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베드로가 오순절이 성령이 임하기 전에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의 예언된 죽음을 시편 69 편과 109편 예언을 해석하였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고 해석하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아마도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으로 부터 제자가 되는 과정을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가롯 유다가 배신한 것이 예언을 이룬 것이기 때문에 시편의 예언대로 제자를 다시 뽑았다. 이에 제자들은 제비 뽑기로 제자를 선출했는 데 제자의 후보자는 다음과 같은 자격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늘 날 제자라고 하는 사람도 같은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사명과 소명 비전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 한 사람이 자격 조건이었다. 그 자격 조건 중에 제비뽑기로 제자로 뽑는 과정이 있었다. 즉 예수님만을 추종하고 함께 동행하면서 진리를 듣고 비전을 가진 사람중에 예수님의 제자로 뽑았다. 제자는 말씀으로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하면서 모든 것이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이 된 사람과 부활을 믿으며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된다. 결국 제자는 예수님 만을 믿는 것과 예수님 안에 소속되는 것,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필수적인 성령 관점의 관계 비전의 증거를 통해서 보여 진다.
제자 영성 훈련은 예수 닮아 가기 영성훈련이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가능하게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있게 한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성도의 상황을 이해하고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인격적 관계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과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친밀한 교제를 하는 과정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 기도를 하게 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말씀을 계속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다. 결국 제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로 계시기 때문이다.
청소년이나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관계 회복이 이루어진다. 청소년과 청년의 딱딱한 마음이 연하게 되는 과정이다.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의 내주로 부모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게 한다. 또한 이런 과정으로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는 지도 알게 하신다. 이런 과정을 관계 회복 방법론 거꾸로 영성 훈련 7 R을 통해 할 것이다.
그렇게 훈련을 하므로 자기의 정체성을 알게 한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예수님이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과정을 진행할 때 천천히 성도의 마음에서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신다.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 때 성도는 믿음으로 반응하면 된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된다. 그 분의 능력은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증거하는 지 그 분이 주신 은혜로 세상에서 제자 영성을 키워 나게 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각각의 성도들이 모두 다 성령 하나님을 임재를 경험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데 모든 성령 하나님은 하나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받은 성령의 모습이 각자의 재능과 달란트에 따라 틀리게 나타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능력과 달란트를 아시고 인격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맞추어 기다리시고 기도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교회는 각자가 방향이 틀린다고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몸을 만드는 것과 같다.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은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어떤 사람은 귀의 역할을 어떤 사람은 입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각 지체가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바로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때 성령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달란트가 있음을 알고 비전을 주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씀의 비전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도의 비전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모두 다 비전으로 주신다.
그 중에서 청소년들이 가진 비전은 직업을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지금 수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모른다. 성령 관점 훈련의 거꾸로 영성 형성 훈련은 바로 직업의 비전을 주신다. 청소년들에게 직업의 꿈과 비전을 성령 하나님이 주신다. 청소년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지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 자기의 직업으로 어떻게 영광을 돌리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고 달란트를 개발하게 하신다. 이것은 거꾸로 영성 훈련이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 달란트를 개발하고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알게 하는 기초이다. 그리고 거꾸로 영성 훈련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를 알아 가는 과정이 예수님 닮아 가기 교육의 일환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전 선언문은 아주 중요한 훈련이다. 되도록 구체적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청소년들이 만든 비전 선언문은 같이 플랫폼으로 공유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 소속인 부모님과 성경 교사, 친구들과 같이 공유하는 의식을 만들어 서로 간에 힘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거꾸로 영성 훈련을 통하여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과 성령 하나님은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소속되고 행동하는 생활과 몰입시킴으로 제자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생활의 몰입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실재를 성령의 관점으로 구체화시키도록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커뮤니티가 지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주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이 성령 하나님이 지상에서 이루신 것은 하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진 것과 같다. 결국 교회 공동체가 이 역할을 하도록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소속되고 행동하는 예수님의 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경 플랫폼 교육이다. 성경 플랫폼 교육은 집단 지성 네트워크 교육 플랫폼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즉 성경교사, 부모님, 사역자. 지역 교회가 같이 잃어버린 한 양을 찾아서 전체적 영성 형성의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이 교육을 받고 자라서 청년이 되면 성경 플랫폼 교육을 하는 성경 교사가 되는 것이다. 거꾸로 영성 형성 교육은 바로 성경 플랫폼 교육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 성경 플랫폼 교육을 통하여 교회의 예배와 가정예배를 통해 제자의 비전을 가지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부모님도 성경 교사로 참여해야 한다. 부모님이 성령 관점을 가르치고 가정예배를 통해 청소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워야 한다. 성령 하나님의 관점의 비전을 가진 예배는 진리를 말하고 성경의 스토리를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성도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 성령 하나님에게 보여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에게 무엇을 믿고 어떤 비전을 가지고 제자가 되고 있는가를 소속감과 행동으로 말하게 한다.
교회공동체에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을 하게 되면 결국 성령 하나님의 임재로 성도가 교통하는 집단 지성 네트워크가 생성된다. 성령의 임재한 모두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한다. 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스토리가 생긴다. 그 스토리를 청소년 청년 공동체에서 같이 이야기하면서 통일되는 선교와 전도의 비전을 갖게 되게 된다. 결국 제자들이 가진 비전은 공동체 안에서 통일되고 연속되는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
성령 하나님이 임재한 사람은 신앙 고백의 스토리를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듣는자인 성도는 스토리를 말하고 전하기도 한다. 신약에서 나온 집사인 스데반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드러냈다. 그는 공개장소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령의 임재로 그들에게 심판과 구원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스데반이 구약을 스토리로 이야기한 것은 성령하나님이 스토리를 만들게 한 것이다. 그것을 증거하는 것은 들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성령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스토리를 이야기 한것이다. 그래서 귀로 진리를 들어도 분간하지 못하고 눈이 멀은 바리새인들은 돌을 들고 스데반을 순교자로 만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교회에서 성도들도 성령 하나님이 주신 신앙 고백의 스토리를 주신다. 그 스토리를 교회 공동체안에서 공감하고 전파하기 시작한다. 가정예배나 목장같은 셀 단위 예배에서도 신앙고백의 스토리를 설교한다. 한 사람이 들어도 짦은 시간을 이야기하고 간증해도 설교이다. 이 신앙 고백 스토리텔링의 설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를 한다 해도 각각의 성도들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안내가 있다. 그들이 느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속감은 같이 나타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의 임재로 한 설교는 제자를 좀더 믿음과 그리스도인 삶의 모범을 세우고 각자의 간증으로 더욱 소속감은 강해진다. 또한 멘토링과 소그룹을 통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은 많은 색깔을 가지지만 결국 합쳐지면 무지개가 되듯이 모두 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제자를 훈련시키게 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원리 단계로 써 말씀을 해석하면서 신앙 윤리와 삶의 방식을 통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과정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말씀 훈련은 예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듣고 해석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성경 말씀의 모든 것을 예수님 관점으로 기도하며 해석하고 습관화시켜야 한다. 이 습관을 통해 모든 세상 사물과 이 시대를 보는 시각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한다. 정말 성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으로 해석하게 한다.
특히 십자가의 신앙을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 죽으신 십자가를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간구하고 기도해아 한다. 십자가 신앙의 해석은 하나님의 입장세서는 용서이며 은혜이다. 용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자기의 의를 드러내면 안된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자기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다시 살아난 것을 해석해야 한다. 십자가 신앙이 주는 해석은 자기가 옛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성령 하나님이 임재한 사람이 새 사람이며 구원받은 존재인것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해석해야 한다. 이것을 성화라고 한다. 자기의 옛 사람을 고쳐서 성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새 사람은 완전히 예수님 안에서 새 존재 되는 것이다. 많은 성도가 여기에서 무너진다. 옛 사람의 죄는 그대로 있는데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새사람이 되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새사람이라는 생각은 안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옛 사람의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니 옛 사람의 죄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계속 힘들게 한다.
이럴 때 존재적 신앙의 증거를 마음에 가지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증거는 하나님 관점에서 세상 해석하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증거만을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해석하게 하는 존재적 믿음의 증거가 생긴다. 이 보이지 않는 증거가 밑에서 받쳐서 자기 자신을 해석하면 바라는 것들의 소망이 생긴다. 비록 죄에 물들은 옛 사람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은 존재이고 예수님 안에 새사람으로 써의 존재이다. 예수님의 의를 전가 받아 죄의 심판이 지나가는 존재로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안의 영생이 우리안에 있으므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존재적 증거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에게 하신일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 나에게 하신 일을 해석할 때는 보이지 않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받쳐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하신 역사를 믿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역사는 창조, 임마누엘, 십자가, 부활, 재림이 있다. 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은 보이지 않은 증거가 다. 그래야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받쳐주는 단단한 믿음의 증거가 된다.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은 이 두개의 창을 성령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성령 하나님은 제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인식할 수 있도록 존재적 믿음의 증거를 가지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다. 그냥 우리 보고 아들, 딸이 되라고 하신다. 성화도 존재적 믿음의 증거를 가질 때 새사람으로 당당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케 하는 것이다. 당신 하나님과 똑 같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헌신을 하며 아들이 되어 구원 사역에 동참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존재적 믿음의 증거는 그리스도인 가질 영성 형성과정을 가지게 되는 데 성령 관점 관계 해석 원리 과정을 통해 만들어 간다. 어떻게 보면 성화의 과정이며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 과정이라고 도 할 수 있다. 바울이 생각한 진정한 영성은 은사이지 회득 되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우리의 영성 형성에 주어지는 증거이며 기본이다. 영성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과 진리를 따라 하나님 은혜에 의해 확립된다. 한마디로 영성은 Doing 아니라 Being이다. Being 영성은 말씀을 해석하고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영성으로 말씀 안에 거하게 될 때 이루어진다. 더 깊은 영성은 결국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 해석을 위해 기도하는 것 만이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은 이런 자세로 살 때 말씀 해석의 증거를 가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된다.
성경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물이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는 존재의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사울은 Doing이 먼저였던 사람이었다. 존재적 믿음인 Being 하지 못하니 그에게는 시편이 없었다. 그를 묘사한 것은 질투하는 왕으로 만 표현하고 있다. 반대로 다윗은 Doing 보다 Being 먼저 여서 그가 쓴 수많은 시편을 볼 수 있다. 그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Doing 아니라 Being의 기도하는 존재였다. 그 가 본 것을 기도하면서 시편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가 미친사람이 되어 목숨을 구걸할 때도 Doing 아니라 Being이 된 존재였기 때문에 그에게 나타난 마음을 해석하면서 기도로 쓴 시편을 만들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을 살인하는 죄를 지어도 다시 일어났다. 이런 어둠에서 빛을 받아 Doing 아니라 Being으로 기도하면서 회개를 하고 바로 일어났다. 그의 죄악과 회개를 성경 말씀속에 넣은 것을 성도들은 해석해야 한다. 성경에 다윗이 죄가 드러난 것을 보고 성도들이 죄를 따라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자기를 해석하고 죄를 회개한 Being의 영성을 배우라는 것이다.
성령 관점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어둠에서 빛을 보는 것과 같다. 말씀이 영혼에서 빛으로 오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신 진리가 보여야 한다. 그래서 진리를 보게 하는 은혜는 성령 하나님을 주신 이유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 안에서 본 말씀은 성도가 신의 품성에 참여한 기회가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게 만들며 말씀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를 먹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성경 말씀에는 예수님의 피와 살과 비유하시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날 저녁에 포도주와 떡을 먹으면서 비유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으시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성형성을 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해석하고 제자들도 그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 많은 제자들도 자아를 버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사람으로 되는 과정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이 가지고 있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함께 죽어 가는 과정이 해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영성에서 좀 더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은 세례이다. 끊임없이 세례는 예수와의 임재 성에 대한 이미지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대해 죽고 끊임없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 생명과 세례 속에서 살도록 부름 받았다.
로마서 6:3-15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이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면 죄를 지어도 상관없느냐하고 묻는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죄를 지으리오?” 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야기한다. 그 당시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죄를 너무 쉽게 지는 것에 한탄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해석은 결국 십자가로 인해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이 여겨지는 믿음이 존재적 증거를 갖게 하는 것이다. 성도가 죽은 것은 옛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여기고 새사람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다고 여기는 믿음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잘 못 해석하는 것이 옛 사람이 다 죽었으니 죄도 죽었다고 생각한다. 죄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래서 죄를 짓는 성도는 힘들어 한다. 옛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죄의 지배를 벗어난 존재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은 성령하나님의 임재를 받는 자녀의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죄에 대하여 싸우는 존재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과 멀어지게 하기위해 수많은 유혹 생각을 성도들에게 넣는다. 성도들이 죄의 생각을 잠깐 하는 것은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죄를 품는 것이 바로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준 것이다. 이것은 마치 뻐꾸기 알을 품는 오목눈이 새와 같다. 오목눈이 새의 둥지에 뻐꾸기 알을 넣을 수는 있다. 여기서 오목눈이 새는 두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뻐꾸기 알을 품느냐 품지 않느냐이다. 만약 오목눈이 새가 그 뻐꾸기 알을 품으면 뻐꾸기의 새끼를 키우는 존재로 내어준 것이다. 그러면서 전에 있던 모든 오목눈이 알과 새끼는 뻐꾸기 새끼에 의해 다 떨어져 죽게 된다. 오직 오목눈이 새는 뻐꾸기가 자기보다 4배 이상 크고 자랄 때까지 자기 새끼로 알고 키워 주는 것이다. 다시 다자란 뻐꾸기 새끼는 다른 오목눈에 새를 탁란 시킨다.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준 것이 바로 이것을 비유한 것이다. 결코 성도들은 사탄이 준 뻐꾸기 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사탄은 뻐꾸기처럼 예수님과 멀어지는 생각을 집어넣어 품게 하고 지체가 불의의 무기로 뻐꾸기 새끼를 먹이게 한다. 위의 구절이 해석되는 불의의 무기는 사탄이 마치 뻐꾸기 새끼를 먹이는 도구로 성도들의 지체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보다 덩치가4배 이상 큰 뻐꾸기 새끼를 키우는 오목 눈이 새를 보면 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준 꼴이 된다.
반대로 우리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로 생각하면 성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죄를 이세상에서 몰아 내는 도구로 우리를 쓰신다는 것이다. 성경교사로 사역자로 복음을 인도하는 의의 도구로 성도를 쓰신다. 이 같은 성도는 어두운 세상에서 예수님의 빛을 반사시킨존재로 해석하면 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은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적 인식이 필요하며 철저하게 죄와 전쟁을 치르는 전투병에 비유한다. 이 전투병은 의의 무기가 매일 삶으로 죄와 싸우는 흔적이 생긴다. 때로는 사탄이 쏜 총알 자국이 생기고 때로는 사탄의 칼에 부상을 입은 자국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에 보이지 않는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자국은 예수님이 주신 성령과 생명의 법안에서는 완전하게 치유되고 보호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의로운 옷을 제자가 입는 것이다. 사람의 의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옛 사람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삶으로 사는 모습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옷 입은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율법 아래의 있다는것은 Doing을 하는 형태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은혜 아래에 있는 존재는 Being 하는 존재 새사람으로 예수님의 의로운 옷을 입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거대한 기차가 천국으로 가는 것을 어떤 작은 수레가 있어도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기차길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 가는 영적인 삶의 모범이 된다. 이것은 세례의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례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회복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세례는 사슬에 사망으로 가는 사탄의 종들이 그리스도의 영성회복으로 사단과의 결박 끊게 되는 상징이 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영성 형성 회복으로 제사장으로 만든 기름 부음과 관계가 있다. 또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에서 성령 임재로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지고 대속의 승리자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한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떨어진 떡이라고 하시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이렇듯 영적으로도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떡 같은 육적 양식을 소화하듯이 영적 양식을 소화하는 것은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성경 말씀은 영적 양식을 먹는 행위와 같으며 해석하는 것은 소화하는 것과 같다. 모든 음식이 재료와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정성으로 맛 있는 음식이 된다. 그런데 먹는 사람들이 몸 상태나 소화하는 것이 제대로 되어야 그 음식이 양식이 되어 몸으로 들어오게 된다. 소화되는 모든 음식이 몸에 이로운 것이 되고 성장하게 된다. 그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이 마치 양식을 먹고 사람이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 인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의 영적 양식으로 기초가 이루어진다.
이렇듯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세개의 축 역사적 배경, 문학적 메시지, 신학적 진리를 통해 해석한다. 그 중에서 신학적 진리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축을 담당한다. 성경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할 때 해석의 축이 생긴다. 그 축은 단지 사람에게 사람으로 전하는 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신 말씀으로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적 인식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부과한 것이 아닌 성경에서 해석을 끌어낸 것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이 변함이 없이 신뢰할 만 것이 되는 것은 바로 성경의 무오 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 자체의 자증적 성경과 조화되면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본질을 그대로 가진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도 성령 관점의 관계의 해석에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응답은 말씀을 통하여 하기 때문에 기도 중에 일어난 하나님의 응답은 그런 해석의 능력에서 나온다. 성령 하나님이 이 해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는 것이 거꾸로 영성의 제자 훈련에서 기도를 통한 해석 훈련이다. 기도의 영성 형성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세례 이전에 세례 받으려는 사람도 가능한 영성 훈련이다. 제자가 가지는 그리스도의 영성 형성은 모든 기도를 포함한다. 제자가 가지는 기도의 내용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의로운 옷을 입고 세상에서 깨어 있게 하는 훈련이다. 깨어 있는 것은 성경 말씀과 기도의 예배 생활 동안에 영성 형성에 일어나는 해석과 말씀의 해석 세상의 해석에서 나온다. 제자가 가지는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에서 성령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떻게 악을 벗고 그리스도 옷을 입을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네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사명의 단계이다. 이것은 성령 관점 관계 적용원리라고 한다. 이 단계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신앙중에 부활과 재림의 역사를 토대로 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부활과 재림을 적용시키신다. 성도들의 부활과 예수님의 재림이 소망이 되서 소명으로 사명으로 적용된다. 이것을 제자들에게는 성령 관점 관계 적용하는 것이며 소명과 사명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 해지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영성 형성의 중요한 단계이다. 여기서 성령 열매는 진짜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성령의 열매를 보고 알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그 때까지 성도와 같이 함께 하며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열매를 수확하신다. 그 수확하는 날이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이다.
신약의 사 복음서에는 성령의 열매 수확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온다. 특히 예수님께서 가라 지에 대한 비유를 하시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이 말씀은 여기에 적용하면 아주 간단해진다. 밀과 보리를 수확하는 씨를 뿌릴 때 가라지도 같이 자란다. 밀과 보리의 씨앗은 영이요 가라지는 육인 것이다. 육의 씨앗인 가라지가 아무리 밀과 보리를 맺고 싶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것이 구분되는 것은 육으로 난 것은 평안이 없고 사랑도 없는 가짜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볼 때는 너무나 비슷해서 구분할 수가 없다.
지금의 교회는 가라지 제자의 영성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만 추구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사람들이다. 종교적 행위를 통해 안위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 십자가, 부활과 재림이 소명과 사명으로 적용이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저 주위 사람들의 칭찬만을 갈구하는 사람들이다. 부활과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소명과 사명을 적용하게 하고 순종하는 영이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보다는 예수님의 의만을 추구한다. 거룩한 성령하나님이 눈물로 기도하면서 회개하게 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의만을 의지하는 영성을 가진다. 그렇게 되면 그 성도는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고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열매로 불순종한것인지 순종한 것인지 알수 가 있다. 진정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은 거룩한 의에 순종하는 것을 성도들에게 성령 관점으로 적용하는 훈련을 한다. 종교를 따르고 불순종한 성도는 결국 가라지가 되어 마지막날 재림하실 때 거두어 불사른다고 하시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재림 때까지 그 냥 가라지를 두라고 하신다. 가라지를 뽑을 때 진짜 보리가 진짜 밀이 뽑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는 수확 때에 버려진다.
이 단계는 성령 관점의 적용 원리가 사명과 소명에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 끝나는 날까지 같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이 단계는 예수님과 마치 한 몸처럼 동화되고 동행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소명을 가지게 되고 사명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가지는 의에 종이 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은사를 펼치고 세상에서 직업의식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하는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 관점의 가지는 의에 종이 무엇인지 제자로서 교회 일원으로 서 가지는 사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서 사명을 가진 것은 성령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 사명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참여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늘이 스스로 도운 사람들을 돕는 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스스로 사명을 가진 것이 아니며 스스로 방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사명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증인으로 부름 받은 소명 아래서 사는 것이다.
마태복음 25:15
성경에서 중요한 달란트의 비유에서 시작한 말이 각각의 재능대로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사와 능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각각의 재능대로 은사와 능력, 직업을 받았지만 받지 않은 것처럼 묻어 두었다는 것이다. 달란트를 비교하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한 달란트는 숨겨 두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직업이 사람들에게 비교되어 작게 느껴 저도 직업은 사명과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한다. 한 달란트의 작은 직업이든 역할이든 맡겨진 모든 것을 재능대로 받으면 충성스럽게 증인으로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직업을 가져야 한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보면 모세는 늙어서 힘 빠진 80세에 소명과 사명을 주셨다. 나이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을 80세에 주셨는지 그 이유가 있다. 이미 모세는 왕자에서 도망친 모세의 삶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는 이미 세상에서 쓸모 없는 양치기로 40년을 살게 되고 있을 때이다. 그 삶이 결국 약할 만큼 약 할 때 하나님의 사명을 주었다. 그가 늙고 쓸모 없다고 생각할 떼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사실 모세는 혈기 왕성한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자신만의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굽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하였다. 결국 혈기 왕성한 자기의 사명을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 자기의 뜻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먼 광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이후에 40년을 양치기로 지냈다. 세상의 사명은 스스로 제일 강할 때 사명을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약할 때 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가진 사명과 사람이 생각하는 사명은 다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상에서 의존하는 것을 모두 제거한 후에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가 기대했던 왕자의 신분 조차도 필요없었다. 하나님이 직접 사명을 이루기 때문에 모세는 순종하는 자세만 필요한 것이다. 순종하는 모세를 만들기 위해 고난을 주신 것이다.
그렇듯 제자들도 힘들 때 고난을 가질 때 사명이 온다. 제자들의 소명과 사명은 제자가 세상에서 가장 자기의 뜻을 주장하고 강 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의지하는 것이 없어 질 때 하나님이 직업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고난과 역경을 주신다. 이 때 제자들이 성령 관점의 훈련을 하면 하나님의 뜻이 보인다. 성령 관점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 도록 제자가 가진 힘을 빼고 세상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할 때 소명과 사명을 주신다. 교회 공동체에 완전히 동화되었을 때 소명과 사명이 주어 지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가진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이 되었을 때 소명과 사명이 적용되는 것이다.
이때 제자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사명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적용되는 예수님의 증인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제자가 소명과 사명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증인이 된 제자들은 요한 계시록에 두 증인까지 나오게 된다. 여기서 두 증인은 바로 교회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앞으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세상에 사명자로 충성스러운 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지안에 붙어서 증인으로 전투병으로 세상의 악과 싸우는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가지는 언젠가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제자의 사명은 삶 중에 대위임 명령을 잊지 않고 성령 하나님의 관점으로 전도와 선교를 적용하는 사명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발수 있다. 제자가 가지는 영성 형성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패턴 속에서 살도록 부름 받고 있다. 제자훈련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평생 가지고 있는 소명이며 사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기 때문에 신성한 사명이 된다. 각자 제자들을 공동체의 세상에 빛을 발하는 선을 위하여 교회 안에서 은사를 발견하고 사용하도록 부름 받았다. 교회안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예배하는 모든 것들에는 은사들이 있다. 교회의 예배는 거대한 악단과 합창단이 연주하는 것과 같다. 악기 하나하나가 성도의 은사들이며 연주자들은 지휘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연주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궁휼의 마음을 가질 때 예배는 삶으로 연결된다.
교회에서 훈련받은 이런 모든 제자들은 긍휼의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하며 성령으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부름 받고 그들에게 가서 그들의 필요성을 알게 한다. 그러면서 세상에 가진 직업적인 소명과 사명을 제자들은 세상과 교회의 일로 구분하지 않게 한다. 제자가 가진 직업에서 비전과 꿈을 향한 계획이 나온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에서 인내와 소명으로 좀더 실천적으로 진행되는 직업에서 제자가 가진 정체성으로 보여 진다. 일이 예배이며 모든 노동은 하나님의 아래에서 사명을 가지게 하는 스승이다. 제자들은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도록 부름 받았다. 가정, 직장, 이웃 등 모든 곳에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을 통해 직업이 가진 사명을 발견해야 만한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며 직업이 가진 사명과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자의 삶과 통일되고 연속적으로 진리와 영이 있는 예배가 된다.
이러한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진 과정과 성령 관점 관계 원리 합쳐서 성경 교사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교재로 만들었다. 모든 교재는 플랫폼을 통해서 공급하며 교재는 모두 같이 만들어 갈 것이다. 교회공동체가 부모님들과 같이 성경 교사 훈련을 같이 한다. 지금 한국에는 청소년부 가 없는 교회가 많다. 이런 교회들을 위하여 누구든지 성경 교사들 맡도록 성경 교육 코칭 교재를 만들었다. 교회에 있는 청년이나 청소년부에게 복음 전달하기 회심의 과정인 성령 관점 기본, 비전, 해석, 적용을 위해 4가지 전도를 성경 교육 코칭 교재를 써서 준비시켰다.
첫 번째 단계의 복음 전달하기로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 라는 교재를 썼다. 이 과정은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로 교회에서 복음을 듣는 과정이며 재창조의 과정이다. 이것 중에서 골라 성경을 토대로 영혼의 질문을 모아서 성경교사, 학부모, 사역자를 위한 코칭 교재를 만들었다. 이 과정은 복음을 듣도록하여 회심하는 청소년을 위하여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을 영혼의 질문을 토대로 설교를 진행하였다. 청소년이 회심하게 되면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신앙 고백 스토리 텔링 설교 제목으로 “ 나는 누구인가?” 이다. 모든 신앙 고백 스토리 텔링 과정에서 7R의 방법론으로 거꾸로 성경 분반 그룹을 정해 아이들 스스로 스토리 보드를 만들어 영상을 만들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교재 중에서 수 많은 질문을 선택하여 선생님은 교재에 있는 내용을 영상으로 이멜로 보내서 아이들이 분반 그룹하기 전에 읽고 보고 오도록 유도하면 된다.
두번째 단계인 제자 훈련 교재에서는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르친다. 많은 질문중에 몇가지를 뽑아 예수님이 누구이시신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신앙 고백 스토리 텔링 설교로 작성 하였다. 이 과정은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원리원리로 비전을 가진 제자를 만드는 것이다. 칭의를 통해 믿음이 굳건하게 되고 제자로써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였다. 그래서 정확하게 예수님이 나에게 하신일과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청소년들에게 설교 하였다.
세번째 단계인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 교재는 “이신칭의” 라는 제목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은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원리원리로 십자가 신앙을 어떻게 가지는지 가르치는 것이다. 교재에서는 해석하는 원리로 증거를 뽑아 교회에서 필요한 코칭을 시작 하였다. 여기에 적은 교재를 발췌하여 주로 신앙고백 스토리 텔링 설교 형식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과정은 로마서를 진행하는 것이다. 사실 로마서는 이신칭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의 원석으로 들어 있는 성경말씀이다.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에 로마서의 이신칭의가 모든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준자로 쓰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매주 로마서를 1장씩 총 16주에 걸처셔 진행하였고 로마서 7장에서 코로나 봉쇄를 만나 중단하게 되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시간에도 로마서 통독할 수 있도록 파일을 카톡으로 공유하고 로마서의 중요한 요약부분을 카록으로 보도록 유도 하였다.
첫 번째 복음 전달하기 회심하는 단계이며 성령 관점의 부르심의 기본 단계이다. 회심의 단계는 하나님이 하신 일중에 예수님 안에서 재창조를 하신 것이다. 재창조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회심을 통해 세상 나라 백성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 교사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이 필요하다.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은 바로 설교이다. 제자가 회심하고 성경 교사가 되어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하면서 증거를 가지고 증인으로 사는 것은 제자의 소명과 사명이다. 이 제자의 소명과 사명은 전도와 선교를 통해 복음의 스토리를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 교사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 설교를 통하여 청소년, 청년들이에게 하나님 나라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사역자만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도 성경 교사도 설교를 해야 한다. 가르치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몇명이든 상관없다. 심지어 한명이라도 상관없다. 예수님은 한명의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하시었다. 설교는 개인의 스피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가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이런 것은 성령 관점으로 접근하고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 처 럼 당당해야 한다.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은 비전을 가진 제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세상을 향한 소통의 도구이다.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의 설교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통로이다. 제자의 삶속에서 비전과 소명을 가진 자만이 십자가와 부활, 재림하신 예수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비전은 복음의 능력을 믿는 데 있다. 영적 소경은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전을 가진 사람은 영적으로 보고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다. 성령 관점의 눈으로 성경 교사는 제자에 임하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신감 있는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의 설교를 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복음을 전달하는 회심의 단계는 “하나님은 누구이신 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 위주로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라는 교재를 만들었다. 우리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거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라고 증명한다. 질문을 통해서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부르타를 중심으로 어떻게 질문과 응답을 하는 지 알게 한다. 청소년들에게 회심을 하는 질문을 만들게 한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질문과 응답이 어떻게 진행하여 보았다.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 좀더 다양한 코칭 형태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서 질문과 응답으로 청소년들의 피드백을 통해 받고 질문을 생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 하브루타 방법이다. 질문도 생각이 필요하며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힘이 있다. 질문하는 힘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의 구성요소 중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전도는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부르타의 질문도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야한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지룸을 하도록 하지만 점점 더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가 찾아 오며 진리를 찾는 구도자가 된다. 만약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 막히면 성경 교사나 부모님들이 교회나 가정에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질문을 계속 제시해야 한다.
두번째 제자훈련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의 단계이다. 교재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를 통해 제자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도록 유도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질문하신 것을 그대로 청소년들에게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알게 해야 한다. 이러한 청소년과 청년들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 남은 영에서 나게 하는 것이다. 영에서 나서 영으로 살게 하려면 말씀을 듣는자의 비전을 갖게 해야 된다. 영이 가진 비전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도 예수님께서 비전을 주신 것이다. 이런 사람들 낚는 비전은 영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며 베드로에게는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의 기초가 된다. 신앙 고백이 영적인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예수님과 임마누엘의 스토리가 생긴다. 당연히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기쁨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 사역을 믿고 미래의 삶이 지금 현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비전과정을 하면서 교재에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질문과 응답으로 코칭을 많이 해보았다. 하부르타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자신의 목표와 비전의 방향을 세운다. 부모님과 성경 교사는 각자의 응답을 듣고 공감을 명료화 하게 하며 인생의 비전을 찾도록 하면 된다. 그 비전은 성령 관점으로 말씀을 읽으면서 스스로 사명 선언서와 행동 계획을 작성해보라고 격려하면 된다. 그러나 성경 교사나 부모님, 사역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셨던 유언은 가르치고 제자 삼으라 하셨다. 누구의 제자인 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이다.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게 하고 대가를 치르도록 비전을 선언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참 믿음의 결과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한다.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은 믿음을 마음에서 입으로 시인하는 단계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한 참 신앙을 가지고 입으로 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 그것이 구원의 천국의 열쇠이며 키이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하나님이 되는 단계이다. 이것을 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의 메시지가 우리의 의지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믿게 하는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령 관점 관계 비전 원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성령 하나님의 목소리로 말씀을 듣는자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성령 하나님은 그분의 제자가 되도록 예수님을 증거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청소년과 청년들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게 된다. 믿음을 통해서 시작된 그 생명은 믿음을 통해서 성화되고 계속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셔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신다. 나와 함께 계셔 모든 삶을 제자로 써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신다. 내가 그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는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신앙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스토리 텔링을 만드신다. 이것은 제자의 삶을 전체로 스토리 텔링 하게 하신다. 제자의 삶 전체의 스토리를 영화 같은 십자가의 이미지로 형상을 하게 하신다. 이런 제자의 삶은 칭의된 존재로 의에 종이 된다. 성령 하나님이 이미 신앙 고백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 스토리 텔링을 통해 비전을 갖게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만드시는 데 모든 것을 주신다. 심지어 내가 죄를 지었어도 내가 예수님의 의에 옷을 입고 의에 종이 되자 계속해서 나를 성장시켜 주셨다.
세 번째 단계의 교재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 이신 칭의’는 좀더 다양하게 로마서를 통해서 영성 형성의 길과 성장을 모색하고 있다. 로마서에는 이런 영성 형성에 도움이 되는 이신칭의에 대한 하나님 증거가 이루어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코로나의 팬데믹 이후로 늦어지고 있지만 시간이 주어지면 교회에서 계속 로마서의 이신칭의를 계속 같이 공부하며 증거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청소년과 같이 지내면서 코칭하게 될 것 같다.
청소년들이 가진 상황적인 것들이 많이 좋지 않다. 코로나 같은 팬데믹 이후로 구원의 문은 더욱더 좁혀지는 것 같다. 성인들조차 온라인 예배에 힘들어 하는 데 감수성 많은 청소년들은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교 또한 온라인으로 진행하여 더욱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 같다. 이제 이런 청소년들에게 기성 세대는 좀 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거꾸로 영성 훈련을 해주어야 한다. 청소년은 지금 복음을 전달하는 가장 귀중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은 성령 관점으로 영성을 키워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의 삶은 무엇이며 그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 지를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을 배우는 데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했던 방법을 적용하여 복음을 전달하고 제자를 훈련하며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을 도우고 그리스도인 소명과 사명을 가지게 하는 전체적인 구조로 이루어 졌다. 계속적으로 교재를 쓰고 그 중에서 적용 내용을 발췌하여 좀 더 다양한 실천적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네번 째 교재는 정하지 않고 계속 변하게 할 것이다. 정하지 않은 교재는 수 많은 성경 교사와 부모님들이 만들어 채워 줄 것이다. 수 많은 교회가 청소년과 청년을 가르치고 제자로 만들 때 계속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으로 만들어진 교재가 어떻게 증거가 되고 적용 되는 지를 알게 할 것이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코칭 하는 교재를 중심으로 다양한 질문과 답을 유도하였으며 청소년들이 복음을 전달받기 쉬운 개념을 영적인 백신이나 생명수 같은 개념을 많이 차용하였다. 언젠가는 부모님들과 사역 자들이 이 교재를 중심으로 성경 교사가 되는 거꾸로 영성 훈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필자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제자 훈련 후에 무엇을 해야 될지에 대한 방황에서 이것 저것을 해보면서 많은 영적인 방황을 한 것 같다. 사실 제자 훈련 후에 많은 신앙적 말씀의 갈급 함이 많아 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처음 사랑의 시간이었다. 그 시기에는 많은 꿈과 비전을 가지고 교회에도 열심히 성가대와 청소년 교사를 병행하면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영적인 갈급 함은 많이 희석되면서 말씀과 기도의 기근으로 영적인 방황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자훈련이 가진 훈련은 마치 졸업장을 주어진 것처럼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끝나게 된 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는 처음 가졌던 꿈과 비전이 많이 희석되게 되었다. 결론 적으로 보면 회심한 후에 비전과 꿈이 제자 도의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필자를 다시 제자의 삶에 끌고 오시게 한 것은 거의 소명이 사라지고 인생에서 영적인 빛이 사라질 때 다시 찾아오셨다. 그리고 필자를 신학을 공부하게 하고 성경 교사였던 시기의 소망과 사명을 다시 살리시고 지금까지 이끄셨다. 뉴질랜드, 한국, 미국의 교회들에서 중독 세미나를 하며 청소년 사역에 집중하고 필자의 사명은 점점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필자는 결국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런 필자의 직접적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 훈련을 가지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의 과정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 관점의 영성 훈련이 필요함을 느끼었다. 먼저 하나님을 증거하는 훈련과 예수님이 주신 제자의 관점과 칭의를 회복해야 한다. 회심하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예수님의 영성에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을 해야 한다. 사람의 지식으로 영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과 기도로 영성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의 관점에서 거꾸로 예수님의 영성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거꾸로 영성 훈련의 기본이다. 이와 같이 개인의 영적 성숙을 위하여 제자 도의 핵심 요소 중에 3가지 지표인 성경 말씀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회심한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훈련의 생각과 관점으로 사람들을 위한 제자 양성이 아니라 한사람의 영혼 구원을 생각하는 예수님의 관점으로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꾸로 영성 훈련은 제자 도의 세가지 지표 성경말씀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중심 가치로 훈련과정을 만들었다.
지금 이 세대에게 주는 다음 세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안에 있다. 코로나 같은 팬데믹이후로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청소년 사역부를 맡으면서 이 루 말할 수 없는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성경의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의 말씀을 따른 순종의 마음으로 청소년 사역부를 맡았다. 최대한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매일 매일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이해하게 하는 지 고민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의 성도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고 사명을 느끼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복음을 듣게 하며 회심하고 제자로서 영성을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 청소년들을 위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주신 복음으로 회심하게 하도록 예배로 인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청소년들이 예수님과 삶으로 동행하게 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형성되는 것이 청소년 사역의 목표로 하여 초대 교회의 제자 훈련이 연속적으로 청소년에게 영향을 주는 제자 영성 훈련을 계획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려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령 관점이 필요하고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 같이 예수님 관점의 원리를 어떻게 영성 훈련하고 어떻게 적응하는 지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 제자 영성 훈련을 위해서는 청소년들에게 로마서에는 이신칭의에 대한 하나님 증거가 이루어지 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역 지에서 제자 영성 훈련의 목표, 도구, 실천 과정과 교재의 미래 방향을 어떻게 할 것인지 서술하여 보겠다. 또한 청소년들이 로마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성경을 본다면 많은 청소년들이 복음을 통한 영성 형성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청소년 예배 설교를 통한 로마서를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야 된다.
다음 세대인 청소년들은 진리가 없는 교육의 시대, 진정한 의미가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 영성이 없는 사랑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 교회 청소년부에 다니던 청소년들이 대학교에서 믿음을 잃어버린 사례가 너무 많다. 마치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 교회는 똑 같이 주입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사람들의 노력으로 영성을 주입시킨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 진정한 회심 후에 그리스도 영성의 형성을 주지 못하고 많은 성도들이 회심 후에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평생의 삶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필요한 시기에 단기간 제자로 만들어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는 제대로 된 비전과 사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이 안되어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의 삶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는 이것 보다도 더 삶으로 보여지고 연속적이며 평생에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어지는 것을 바라고 있다. 히브리적 사고로 복음을 받은 제자는 인생의 여정으로 생각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제자 프로그램이 없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없어도 히브리 적 관점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로 살다가 죽었다. 심지어 많은 제자들은 순교하였고 세상에서 이름없이 죽어갔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았다.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는 인생의 여정이 제자의 삶과 여정으로 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런 초대교회의 영성은 어떻게 이루어졌을 까 고민하면서 그들의 방법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단계별로 적용하는 거꾸로 영성 훈련의 개념을 찾아보았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의 여정을 목표로 하였다. 이것이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의 관점을 거꾸로 생각하도록 하여 제자 영성 훈련을 적용하여 보았다. 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거꾸로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 영성형성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 명령인 제자 도에 순종하기 위해서 필요한 관점을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면서 제자들을 성경 말씀에 거하게 하는 것이 바로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다. 이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방법의 단계들은 초대 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참고하여 현대 교회에 맞도록 적용하였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가지 있다. 첫 번째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게 하심에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백성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을 예수님께 보낸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원받는 것이 절대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 의로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자기 의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하나님이 구원을 정하지 않으시면 안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시다.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은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 다. 바울이 전도한 기록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같은 복음을 듣고도 믿어지는 사람이 생기었다. 그것을 믿는 믿음도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두 번 째는 창세기부터 예언된 사탄을 멸하기 위해 오시었다.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들은 결국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창세기에는 이 사탄의 머리를 부수이시는 분은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 여자 혼자서 처녀로 임신한 하고 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성경은 정확하게 몇 천 년전에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잡고 그 기능을 못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수님은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사람 최초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것이라고 하시었다. 결국 사탄이 물려 사망으로 갔던 사람들이 부활로 살아나는 것이다. 사탄의 머리에 있는 뱀의 독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부슨 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세번 째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시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이다. 마태복음의 시작과 끝에는 예수님이 왕됨을 이방인이 인정하는 구절이 있다. 처음 예수님이 태어날 때 예수님의 유대인의 왕이라고 동방에서 동방박사 이방인들이 찾아와서 예물을 드렸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기 위해 달리실 때 본디오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게 하며 그것을 인정하였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무엇인가 메세지를 주게 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탄생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의 죽는 골고다 언덕까지 한가지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은 이방인까지 인정하는 왕중에 왕이시라는 것이다. 태어날 때 부터 십자가에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왕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까지 유대인의 왕이라고 달리신 이 모습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왕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역사적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이 나라를 들어 가려면 십자가의 예수님이 왕이라는 팻말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제자들의 무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들고 예수님이 왕이라는 팻말을 통과하면 된다. 제자들이 믿음으로 그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목적을 같이 동행하는 제자는 프로그램으로 제자 훈련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지고 은혜로 확정 지어지는 개인의 영적 성숙이 중요하다. 이런 개인의 영성 형성이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관점으로 서로 사랑하며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은혜와 진리를 가진 제자로 써 성령의 열매를 맺는 연속적인 삶을 살게 하는 데 있다. 이런 청소년 성경 교육 목표로 청소년 사역을 좀 더 많은 교회가 참여하도록 오프라인 세미나와 온라인의 인터넷과 모바일로 준비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사용법을 잘 알고 익숙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과 모바일 중독이 좋은 만큼 반대적인 요소로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아주 심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청소년들이 가진 호기심과 일상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풀 곳을 찾아 위안을 삼기 위해 선택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많아지면 점점 더 위로보다는 또 다른 세상에서 주는 따돌림 등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인터넷과 온라인 모바일의 모든 것에서도 사람이 쉴 수 있는 영적 진리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 선택의 순간에 진리라는 기준을 바라보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하더라도 좀 더 유익한 내용으로 삶을 충만하게 하는 내용을 보는 것이 좋다. 어떤 청소년들은 어느 특정한 사이트에서 게임에 빠져 하루 종일 중독증세를 보이면서 먹고 자는 것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학교를 가는 것도 잊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위해 태어난 인터넷이 인간을 망치고 있다. 청소년들은 진리를 모르고 속고 있는 것을 모른다. 중독 증세로 잠을 자지 못하고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점점 더 우울증에 걸리고 결국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것은 사탄이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속이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선택을 유도한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스마트폰 사용 문제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지만 청소년들은 스마트폰 안의 사이버 공간을 포기할 수 없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메타버스와 게임, 메신저 같은인터넷 영역과 같은 제한된 영역에서 청소년들은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활발하다. MZ 세대 알파 세대같은 다음 세대는 자기들만의 소통언가 있고 전혀 다른 문법을 가진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기성 세대는 그러한 디지털의 만남과 메타버스 공간에 집착하는 것에 중독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심지더 지금 어른들도 비판하지만 청소년, 청년들과 같이 SNS 같은 곳에서 중독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어떤 어른 들은 많은 SNS에서 자유를 취하고 있다. 기성세대와 다음 세대가 충돌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혀 다른 소통 방식이 기성 세대는 대면적 문화의 소통방식을 통하고 다음 세대는 비대면적인 소통박식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 왔다. 이것은 무엇인가 시사는 하는 것이 있다. 청소년들은 온라인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두 세대의 소통은 똑 같은 데 좀 더 도구가 디지털화 되었는 것인데 그것의 차이만을 인정하면 된다.
문제는 스마트 폰 중독현상이다. 지금의 중독 현상은 플랫폼 기업들이 상업적인 광고나 돈을 버는 것에 위주로 했기 때문에 그들이 중독을 일이키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한 다는 것에 있다. 많은 플랫폼은 독접적 지위를 활용해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보게 하고 계속해서 광고를 보게 해야 돈을 버는 독점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독점적 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즉 다음세대가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는 좀 더 다양한 방식의 플랫폼 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독점 방식의 플랫폼이 아닌 협업하고 상생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교회가 이런 형태를 취하고 세상을 향해 창조적인 플랫폼으로 중독을 피하면서 공동체적 학습을 통해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형태의 학습을 하면 된다. 그 학습의 과정을 다양한 플랫폼에서 볼 수 있도록 창조적인 컨텐트를 만들게 되면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플랫폼 교육이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다.
이렇게 독립적 청소년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결된 세미나 공간을 교회가 만들게 되면 청소년들은 중독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다음 세대와 어른 세대가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부모님과 성경 교사, 교회가 뭉쳐서 같이 연합되어야 한다. 성경 적인 진리의 방법으로 선택의 기준을 가르치는 교육적인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에게 성경 교육 방법과 전도를 통해 암흑에서 빛을 보게 해야 한다. 또 한 코로나로 이후로 교회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다. 많은 교회의 예배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같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일들이 성경에 나온 대로 시대를 분별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은 점점 더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인터넷과 모바일에 적용하는 성경 교육 플랫폼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 모든 교회가 중독을 이기는 세미나로 협업하고 온라인으로 성경 교육을 협업하는 플랫폼으로 다음 세대에 인터넷을 통한 복음 전도에 힘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육과 전도 플랫폼인 ‘‘Allbuilder’’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이 플랫폼은 청소년들에게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 플랫폼은 중독이 아니라 창조적인 컨텐트를 누구든지 만들도록 하였다. 여기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같이 학습하면서 좀 더 다양한 공동체가 연결되도록 하였다. 각각의 청소년들이 개인화 SNS를 만들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와 학교, 기성세대가 협업하면서 연합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하므로 써 기성세대와 청소년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도록 준비하고 있다.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과정은 수많은 가정의 부모님이 이 교육을 통해 자녀를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되도록 하였다. 이제 부모님은 자기 자녀를 가르치고 더 나아가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을 알고 싶은 사람도 교육을 받으면 좋다. 여기에 해당되는 성도는 너무나 많다. 너무나 많은 성도가 어떻게 제자훈련을 받고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으로 성장하는 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제자 훈련을 받고 좀 더 많은 은혜를 구하고 싶은 사람도 상관없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에 좀더 많이 성경을 보고 듣고 해석하게 하는 과정을 만든 것이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한 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게 한다.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한다.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기 시작했다. 오순절 성령이 오신 이후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하나 하나 알게 되었다. 성령 하나님은 구약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을 보게 한다. 예수님 또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하게 받으셨으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이것을 본 제자 들은 예수님을 본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비전이 되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틀이 된다. 성령과 능력을 사람에게 부어주시었다.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뜨거운 신앙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마음이 기쁘고 보람이 생긴다.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는 주권이다. 하나님의 나라른 성령의 능력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경계를 넘는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개인과 민족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온 유대와 땅끝을 언급하면서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관점의 훈련은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경계를 넘어 적용되는 모든 것이다. 목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증인이란 말이 이단이 썼던 용어여서 많은 교회가 쓰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부탁한 말은 내증인이 되라고 하였다. 여기서 증인은 사실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체험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제자 들이 예수님을 증거한 것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의 증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로 부터 복음을 들은 전도자가 성령 관점으로 재 창조가 되고 말씀으로 신앙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하며 말씀의 증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바로 증인된 삶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을 받지 않았는 데 전도를 한다.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님과 함께 임마누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전도를 할 수가 없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십자가의 믿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하고 인격적으로 관계가 이루어진 상태가 되어야 전도가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성 형성을 이루고 비전과 소명과 사명을 가지게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 영성형성을 이루게 하는 과정 거꾸로 제자 영성 형성 훈련과정 및 성경 교사 양육 과정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두개의 과정이 아니라 거꾸로 제자 영성 형성 훈련을 하게 되면 성경 교사의 양육 과정이 마쳐 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본원리는 성령 관점 관계 원리라는 교육방법론을 통해 모든 교재와 과정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을 알고 어떻게 훈련을 받고 성장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모든 교육은 성장하는 데 목표를 가지고 있다.
처음 단계부터 구도자, 듣는 자, 기도자, 충성스러운 자로 연결된다. 단순한 회심이 아니라 한 사람을 구도자로부터 말씀을 듣는 과정, 제자가 되는 과정, 더 깊은 영성 형성의 과정, 교회의 삶에 완전히 동화 되는 과정에 전체에서 거꾸로 영성 제자 화가 되는 구원 과정 요약을 해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훈련을 통해서 각각의 훈련에 통한 과정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다음과 같다.
‘Allbuilder’ 성경 교사 교육 플랫폼 -성령 관점 관계 원리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과정과 성경 교사 양육과정 시리즈 = 부모님, 성경교사, 청년
1.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보는 성경의 기본 훈련 / 구도 자/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법= 4주
2.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보는 성경의 비전 훈련 /듣는 자/1차 소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4주
3.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보는 성경의 해석 훈련 / 기도 자/ 2차 소명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4주
4. 성경의 관계 해석 원리를 통한 영성 형성 훈련/헌신 자/ 성령 능력 의지 /힘의 부여 / 성령
충만/헌 신자=4주
1권. 예수님 관점으로 본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 /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 양육 교재
2권. 예수님 관점으로 만드는 비전과 꿈 / 성령 관점 관계 비전원리 양육 교재
3권. 예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 / 성령 관점 관계 해석원리 양육 교재
4권. 예수님이 관점으로 성경을 적용하는 원리/ 성령 관점 관계 적용원리 양육 교재
여기에 나와 있는 각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통일되고 연속되도록 하였다. 각 단계가 나누어 저 있지만 결국 예수님의 관 점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고 연속되도록 하였다. 그럼으로써 현대 교회가 초대 교회의 히브리적 사고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게 하였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성령 관점으로 좀 더 통일되게 하여 현대적인 교회에 적용시키었다. 결국 현대 교회에 부족하게 된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하여 제자의 통일된 삶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제자 도가 되고 성경적인 거꾸로 제자 도 영성 훈련의 형성 단계가 된다. 각 단계는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을 좀 더 현대적인 교회에 적용시키어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전체적인 제자의 삶을 요약하면 첫 번째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 단계이다. 이 단계는 부르심의 단계이며 회심과 구도자의 길로 들어서는 재 창조 되고 교회로 부터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 단계의 목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법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원리 단계는 예수님의 은혜가 성도에게 전가되는 단계이며 칭의의 단계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느끼며 성도는 진리를 듣는 자가 되어 제자로서 비전을 갖게 되는 단계이다. 교회로 부터는 제자가 되는 과정이며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가지게 된다. 이 단계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세번째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원리 단계이며 성화 단계를 말한다. 이는 믿음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의 단계이며 기도와 말씀 해석을 통해 십자가의 영적인 해석을 통해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를 가지며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는 자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해석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들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즉 옛 사람인 자아 보다는 새사람이 되어 성령의 은혜를 통해 더 깊은 영성 형성을 가지고 온유해지는 단계이다. 이 단계의 목표는 내가 가진 달란트와 직업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의 적용원리 단계로써 부활 예정과 예수님의 재림으로 우리를 영화롭게 만드는 영화의 단계를 말한다. 이 과정의 목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아는 데 있다. 이는 제자로써 예수님과 함께 충성스럽게 동행하는 자이다. 이런 제자의 삶을 비전을 가지고 연속성을 통해서 거꾸로 제자 영성훈련의 근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와 있는 모든 과정은 헬라 적인 이성관점으로 분해하지 않고 성령 하나님의 임재로 통일 되게 하였다. 오직 성령의 인도로 제자의 관점을 통일되게 하면서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을 목표로 성경 교사와 제자를 훈련하는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존의 많은 교회가 가지는 단지 회심 자의 수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이 된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데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부터 기인하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프로그램 방식으로 기존의 제자 영성 훈련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좀 더 많은 훈련 방법을 오픈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하부르타 방식과 거꾸로 영성 훈련으로 공동체 훈련을 하면서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할 것이다. 이 성령 관점 관계의 교육을 통해 제자가 예수가 명령한 대위임 명령인 것을 청소년과 청년들에 가르칠 것이다.
부모님들이나 성경 교사, 사역 자들이 여기에 나와 있는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의 거꾸로 영성 훈련을 통해 직간접으로 성경 교사로 써 참여하며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면 된다. 우선 시간은 각 단계별로4주씩 하지만 시간은 각 주당 8 시간이다. 여기에는 실습하는 시간과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으므로 비대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시간 조절을 통하여 교사를 양성하는 교회에서는 교사 기초 양육과정으로 하면 된다. 각 단계별 교재에는 질문과 내용이 있으며 질문은 미리 교재를 읽고 와서 토론하는 형태로 나눔 수업을 하면 된다. 질문이 교재에 나와 잇는 것은 기본이지만 나와 있지 않아도 서로 공동체로 거꾸로 영성이나 하부르타를 통해 질문과 응답방식으로 하면 된다. 거꾸로 영성은 성경 전체의 스토리 텔링을 진행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스토리 보드를 만들어 각각 발표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성경 교사 양육 단계는 기초적인 교육방법이 성경 말씀이 교육 사역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다시 보면서 모든 거꾸로 영성 훈련의 전도 과정을 자세하게 다시 한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초심자나 청소년들뿐 만안이라 부모님들과 성경 교사들은 하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말씀을 통하여 예수처럼 닮아가도록 꺼꾸로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 옛날 믿음의 선조들이 했던 영성 훈련과 비슷하지만 이영성 훈련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이나 받기 이전에 조금이라도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거꾸로 영성 훈련을 통해 예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영성 훈련을 하면 된다. 성경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면 그의 은혜가 믿음의 통로로 이어진다.
먼저 초대 교회에 이루어진 영성 훈련을 적용한 단계는 여러 단계로 이루어 져 있다. 복음을 전달하는 단계, 제자 훈련하는 단계,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 단계, 소명과 사명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거꾸로 제자 영성 훈련 과정인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적용해보려 한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의 교육전도 방법론으로 하는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의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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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builder’ 모바일 다음 세대 전도 플랫폼:
성경 교사 전도 교재 시리즈- 청년, 청소년들에게 영혼의 질문을 통한 전도 양육 문답서 시리즈
1권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 /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 전도 교재
2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원리 전도 교재
3권. 그리스도인의 영성 이신칭의/ 성령 관점 관계 해석원리 전도 교재
4권. 성화와 탁란/ 성령 관점 관계 적용원리 전도 교재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가진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을 마친 성경 교사들이 직접 각 단계로 전도를 진행하도록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질문과 응답이 있는 교재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도와주는 것은 플랫폼으로 서로간에 도움이 되도록 연결하고 공유하도록 만들 것이다.
누구나 성경 교사로 써 참여하면서 직접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도 하는 교재들을 카테고리로 준비하고 있으며 플랫폼을 통해서 계속 업데이트를 할 예정이다. 이 교재들은 기초만은 만들고 많은 교회에서 실시한 내용을 추가적으로 교재에 넣어서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를 만들어 갈 것이다. 초안은 처음에 기본은 교육 플랫폼에서 하지만 계속적인 업데이트와 수정은 성경 교사가 된 부모님들이 참여를 통해서 전도 과정의 교재를 만들게 할 것 이다. 이는 성경 교사로 써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으로 점점 다 같이 참여 하는 형태로 발전 시켜 나갈 것이다. 성경 교사 양육 과정과 전도 과정의 각 단계별로 전도의 사례를 맞추어 만들어진 교재이다. 양육 과정의 교재는 성령 관점의 관계 원리를 통한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었다.
시간 배정은 양육 과정과 같은 형태로 각 단계별로 10주씩 하지만 시간은 각 주당 8 시간이다. 여기에는 실습하는 시간과 토론하는 시간이 있으므로 비대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시간 조절을 통하여 교회에서는 청소년 전도 과정으로 하면 된다. 각 단계별 교재에는 질문과 내용이 있으며 질문은 미리 교재를 읽고 와서 토론하는 형태로 나눔 수업을 한다. 거기서 나오는 스토리 보드를 만들어 각각 발표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또 한 전도 교재는 주로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통한 응답의 형태로 교재를 썼다. 이 교재를 통해 청소년들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많은 전도의 문이 열렸으면 한다. 그리고 여기에 수 많은 질문이 나올 것이다. 위의 인터넷 플랫폼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을 성경 교사들과 같이 더 교재로 만들어서 준비하도록 할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달하여 회심하게 하는 단계이다. 복음을 전달하는 것은 씨를 영혼의 밭에 뿌리는 단계이다. 거꾸로 영성 훈련의 씨에서 생명이 일어나면 성령 하나님의 성령 세례와 인재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어 회개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원리로 복음을 전달하는 단계라고 한다. 이 과정의 목표는 회심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올 수 있도록 질문과 응답의 설교 코칭 위주로 진행하도록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라는 전도 교재를 만들었다. 여기는 거꾸로 영성 훈련 교육의 기본 교육 방법을 제공한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를 통한 가이드로 질문과 응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무엇인가를 한장 짜리 종이를 가지고 성경을 정리하면서 탕자의 관계 회복 7R의 원리에 따라 스토리 보드를 만들고 그룹으로 토론하여 만드는 것이다. 질문은 여러가지 만들어져 결국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통해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연극이든 영상으로 만들도록 한다. 성경을 전체로 이해하고 복음을 이해하는 원리와 관계 회복의 원리가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훈련으로 가는 기초 단계로 회심을 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관점에서 가장 기본적인 시작을 알리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하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회개하는 마음이 들어 회심하게 원리를 만든다.
두번째는 성령 관점의 관계 비전 원리로 제자 훈련을 단계를 말한다. 교회, 예배, 성경 말씀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씀 안에서 비전을 갖게 한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도록 유도한다. 결국 예수님이 누구인가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며 그 때 비전이 자신에게 보여 진다. 이런 비전을 7R 관계 회복 방법론을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질문과 응답을 그룹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각자 비전 선언서를 만들어 사인을 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이 있다. 이 때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비전을 응원하고 키워주는 역할을 하면 된다. 절대로 부모나 성경 교사의 비전을 아이들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 청소년들이 가진 비전이 결국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제자의 비전과 꿈을 주면서 제자의 삶을 살도록 안내를 하신다. 성령의 도움으로 예배 말씀과 기도 과정을 통하여 제자가 되는 것을 응답 받아 훈련하는 과정이다. 전도 교재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교재로 제자가 가져야 할 충분한 훈련을 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말씀을 해석하고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비전을 알게 하는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이 성령 관점 관계의 비전 원리의 과정이다.
세번째는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원리 원리 단계로써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 단계이다. 이 단계는 신앙 윤리와 삶의 방식을 통해 영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과정을 만드는 단계이다. 이 과정은 제자 훈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안내를 통해 예수님 안에서 말씀이 해석되어 삶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영성이 형성되기를 이끄신다. 성령 하나님이 말씀을 해석하게 하고 삶으로 증거를 만들게 한다. 결국 성도는 해석되는 복음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된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이 얼마나 자유로운 형태의 적용되는 가를 말하고 있다.
계속 강조하지만 성령 관점의 해석 원리 단계는 스데반과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해석하였던 설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 것 또한 관계 회복 방법론인 7R을 써서 성경 전체의 해석을 청소년 스스로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마치 스데반이 바리새인 앞에서 구약 전체를 설교 하듯 말하게 해야 한다. 스덴반의 설교 안에는 그가 가진 비전이 설교 안에 녹아 있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복음이 진리임을 선포하게 하는 것이다.
그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칭의와 중생의 과정을 정확하게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옷인 칭의는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옷을 입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으며 새로운 존재의 생명으로 태어난 것을 해석하는 단계로 이른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과 부활로 칭의와 중생의 원리를 해석이 되고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성 이신칭의” 라는 교재를 만들었다. 이것은 성령 관점 관계 해석 원리 과정을 만든다.
네번째는 성령 관점 관계 적용 원리 단계로 교회 공동체를 통한 은사 발견, 그리스도인 작업의 소명을 갖게 하는 예수님과의 동행 훈련이다.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를 직업과 사명 은사에 적용하면서 예수님과 동행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 대한 돌봄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의 제자로 동화시키면서 인생의 여행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단계는 성화의 단계로 써 교재는 ‘성화와 탁란’ 이란 교재로 사명을 받지 못하는 탁란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 하고 좀더 많은 직업 적인 소명을 성경 교사 여러분과 함께 같이 교재를 만들었으면 한다.
이 교재 또한 청소년들이 직업을 가진 선배와 공유하면서 어떤 것이 비전을 이루어지면서 플랫폼을 통해 서로 공유케 할 것이다. 그러므로 써 청소년들이 직업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을 성경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갈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 3:2~1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오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이제 하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 같이 예수님 관점의 원리를 어떻게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하고 어떻게 적응하는 지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필자는 많은 것을 얻었다.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 주는 것은 성령의 통로다. 무엇이 성경인지 무엇이 성령을 받는 것인 지 교육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예수처럼 닮아가는 영성 훈련과 같다. 옛날 믿음의 선조들이 했던 영성 훈련과 비슷하지만 영성 훈련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통해 질문하고 응답하면서 공동체 훈련을 진행한다. 공동체 과제를 주는 큰 주제 질문과 거기에서 파생된 질문을 통해 하부르타를 개인 마다 신앙 고백의 스토리 텔링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 소 질문을 통해 하부르타를 진행하고 마친 성도들이 다시 모여 대질문을 통해 공동체 과제를 같이 만들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과제가 스토리 보드를 만들게 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신앙 고백 스토리 텔링이 서로 엮어지게 된다. 영상이든 pt 든 그들이 만든 결과물은 세상에서 증거로 남게 된다. 여기에 참여한 성도들은 각자의 성도들 안에 있는 성령 관점을 이해하고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된 증인이 된다.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이나 받기 이전에 조금이라도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영성 훈련을 통해 예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영성 훈련을 하면 된다. 성경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면 그의 은혜가 믿음의 통로로 이어진다. 어떻게 믿음이 만들어지 아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받을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이 된다. 예수 닮아가기 거꾸로 영성 제자 훈현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증거하는 지 그 분이 주신 은혜로 키워 나게 하는 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령님은 하나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받은 성령의 모습이 각자의 재능과 달란트에 따라 틀리게 나타난다.
이것을 성령하나님이 증거하시면서 인도하시고 어떻게 개발하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이끄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관점이 되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지를 알아 가는 과정이 예수님 닮아가기 교육의 일환이다. 즉 예수님의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배우면 성령 하나님이 성경의 모든 것을 재 해석하게 하신다. 그 해석을 말씀에 두고 세상에 적용시키어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이 거룩을 습관화시기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예배이다. 코람데오의 하나님을 매일 적용시키는 것이 예배이다. 사람이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세상 사물과 이 시대를 보는 시각을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해서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나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다. 그냥 우리보고 아들이 되라고 하신다. 당신 하나님과 똑 같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헌신을 하며 아들이 되어 구원 사역에 동참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기 위해 우리를 단련하는 과정을 갖는 것이다. 우선 부르심과 회심은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구도자로 만드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단계로 넘어가게 하신다. 이 단계는 믿음으로 자라서 비전과 관심을 가지는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단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자기를 죽이는 해석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순종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한다. 완전하게 순정하는 단계가 바로 예수님의 관점이 일치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완전하게 동화된 것 과 같다.그렇게 자라게 할려면 예수님의 관점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관점이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이것은 노력이 아니라 존재적 관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 형성이다.
호세아 6:1-6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그리스도인 영성 형성의 단계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아침에 있는 구름이며 이슬처럼 사라지는 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 되는 것과 같다. 매일 말씀으로 연단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러한 훈련은 내 입에 말로 그들을 죽였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를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옛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이 죽어야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영성을 거꾸로 받는 것이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다. 옛 사람을 고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관점이 아닌 거꾸로 예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목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게 하신다. 이 영성훈련은 진정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우리안에 배워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성경을 통해 성령 관점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야 한다.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기간은 우선 32주를 기본으로 하여 많은 시간을 가지고 많은 관점의 경험을 통해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처음 32주는 전도 코칭 교재를 교육한다. 대상은 청소년과 청년들, 부모님들과 성경 교사, 교회 사역 자, 모든 교회 구성원, 구역 식구들이 전도 코칭 교재 4권으로 1권에 8주씩 32주를 진행하면 된다. 청소년과 청년들 또한 이 과정을 듣고 똑 같은 코칭 과정을 거쳐서 친구들인 다른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또는 전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코칭을 진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경 교사들도 이 교육을 듣고 같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분반 수업인 거꾸로 성경을 통해 가르쳤으면 한다. 하나님은 전도의 사명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었다.
다음 32주는 성경 교사 양육과정으로 부모님과 청소년과 청년, 성경 교사, 사역 자, 직분 자,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길 원하는 사람이 대상이다. 부모님이 성경 교사가 되는 것을 주로 하며 성경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과 부모님의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중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진행한다. 이렇게 32주는 성령 관점 관계 원리 교재를 통해 성경 교사가 되는 양육 코스를 받으면 된다. 이 코스는 성경 교사, 사역 자, 직분 자, 모든 자녀를 가진 어른들도 들었으면 한다. 특히 부모님과 청소년과 청년들이 이 코스를 함께 진행하여 좀 더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부모님의 도움으로 인터넷 중독과 스마트폰 중독에서 생명을 얻었으면 한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의 교재가 총 4권이므로 4주에 1권씩 진행하면 된다.
두 코스 32주의 과정을 통해 부모가 청소년과 청년과 함께 이 양육 코스와 전도 코스를 같이 받으면 부모님은 자녀들과 같이 믿음의 여행이 시작되고 꿈을 꾸며 청소년과 청년들은 비전을 가지며 직업에 대한 생각을 부모님과 같이 공유하게 되어 부모님과 관계가 회복될 것이다. 특히 전도 코스를 부모님과 같이 받은 자녀는 다른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것이다. 부모님들 또한 이 과정을 거치면 다른 어른 들도 이 코칭 방법을 써서 전도를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7일 단위로 시간을 주로 만들었다. 우리가 주단 위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든 것을 기준으로 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해석하자는 뜻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 기간 동안에 교역자가 참석하며 교역자의 역할은 성경의 배경과 성경의 역사를 가르치는 역할 만 하면 된다. 시중에는 수 많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역사가 쉽게 나온 책이 많다. 추천으로는 국제 제자 영성훈련원의 구약의 파노라마가 괜찮은 교재가 될 것이다. 절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이러한 역사를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야 한다. 참고만 하면 된다. 성령 관점을 통해 당신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배경 속에서 성경의 인물의 관점을 보기 위해 이러한 참고 서류는 필요하며 그것을 교역자가 전문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면 된다. 선지서나 시편, 잠언 등은 모두다 하나의 흐름으로 보고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의 관점으로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묵상을 진행하면 되는 것이다.
인원은 12명 단위로 4명의 3 개 소 그룹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혼자 하여도 좋지만 이왕이면 교육의 특징을 살리려면 다수를 통해서 해도 소 그룹을 유지만 하면 각각이 받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안되어 전체 비밀 원리 교육을 혼자 하여도 상관이 없다. 모든 성경의 비밀 원리는 각자의 것이 기 때문에 많은 인원을 해도 상관이 없고 각자의 성령의 은혜만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가 인원은 교역자의 인솔에 의해 시간을 진행하고 일주일에 2일을 교육을 받는 것으로 한다. 만약 혼자 여기에 나온 시간과 계획에 따라 해도 상관이 없다. 다만 교제를 통한 부분이 빠지는 것 만 감수 하면 된다. 시간은 하루에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알맞으며 총 일주일 7시간 정도를 교육을 진행하면 좋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란 호칭이 별도로 진행하여야 한다.
이제 교육하는 사람들 모두다 제자라 생각하는 관점이 호칭에도 있어야 된다. 옛날 초대교회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즉 모두다 예수님의 영이 임재된 사람들이다. 김 제자님, 박 제자님이라 불러야 한다. 이러한 호칭 속에서 당신의 성령은 예수님과 연결되는 모습으로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먼저 처음 4주는 청소년과 청년들과 부모님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먼저 부모님들이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익숙한 청소년과 청년을 어떻게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특히 부모님들이 어떻게 성경 교사가 될지에 대한 많은 서로 토의하고 부모님들이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였으면 한다. 각자의 소개를 통해 벽을 허물고 각자의 성경을 바라보는 눈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어떻게 되어 있고 신앙 생활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 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관점과 아들의 관점과 가족의 관점을 간단하게 이해되는 순서로 서로 허심탄회하게 나누었으면 한다. 이 시간은 가족 관계에서 아픔이 있을 때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그 가족의 관점을 치유하고 나중에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이 바라보는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 원리 대로 신약에서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주는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성령 관점 관계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에 대해 같은 목표를 가져야 된다.
두 번째 다음 4주부터 16주까지는 성령 관점 양육 교재 2권부터 3권 4권을 같이 연속으로 시작하여 연결되는 과정으로 성령 관점 관계 기본 해석 적용 원리를 하였으면 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3개의 과정 합친 16주는 성경 관점 관계 원리를 교육하고 예수님의 관점을 거꾸로 제자 영성훈련으로 하는 연속 주간으로 한다. 이 과정의 목표는 예수님 닮기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 닮기 교육은 하나님의 성격과 예수님의 성격을 알아 당신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당신이 예수님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세상을 바라보며 천국을 가지며 영혼 구원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려면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양육 교재 2권으로 시작하여 성경을 4주에서 8주까지 예수님의 영인 성령 하나님의 성격을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각 성경 교재에 나오는 질문을 7R의 방법론으로 빠른 시간을 통해 성경을 찾아 내고 비전 선언문을 작성하였으면 한다. 오직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격이 나오면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 하나님의 성격과 예수님의 성격을 목록화하여 서로 그룹 안에서 토의를 하고 발표를 하며 그것을 인지하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꼭 만들어야 할 것이 있다. 당신의 제자 비전 선언문을 만들고 당신의 목적과 꿈을 만들어라 되도록이면 불가능한 하나님의 일을 써라. 하나님의 전지 전능을 믿어라. 엘리야가 단에 물을 붓듯이 당신은 세상에 불가능한 것을 세상의 법칙으로 이해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말하라.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다면 당신 삶의 목적과 꿈은 실현된다. 반드시 꿈을 적어 내야 한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실현되는 꿈을 적어 내야 한다. 사람은 달란트와 취미를 구분을 못한다. 누구나 취미를 가진다. 그러나 달란트는 틀리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특별한 재능인 것이다. 누구나 따라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성령과 만나면 활활 불타오르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며 꿈을 꾼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성경은 당신의 미래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당신이 예수님이 되는 것이다.
5주에서 8주 4주 동안 성경의 인물 중에 5명을 뽑아 어떻게 꿈을 이루었는지 그 성경의 인물이 되어 꿈을 꾸는 것에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상세하게 적었으면 한다. 어떻게 이것을 이룰 것인가 자세한 숫자를 제시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것보다 더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제한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숫자를 이야기하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보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즉 이 숫자는 하나님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어떤 믿음이 있느냐 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숫자 보다는 당연히 많은 숫자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의 관점이 되어 우리가 꿈을 말할 때 우리 자신에게 당신은 무엇을 해 주겠는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은 제한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의 아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라. 꿈을 실현하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러려면 정확한 꿈을 꾸고 본서에 나와 있는 데로 꿈과 비전과 목표를 적어라. 그리고 그 꿈이 하나님의 일이라 믿어라. 그러면 그 꿈은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다.
매일 꿈을 꾸고 당신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묵상을 하여라. 묵상은 참 나를 내려놓는 작업이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도구다. 그리스도 인이 매일 묵상을 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이며 묵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꿈을 말씀하신다. 성령 관점 관계 원리 관점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묵상이 굉장히 중요하다.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하는 동안 꼭 잊지 말고 연습하여야 될 것이 묵상을 하는 것이다. 단 10분이라도 좋은 어떤 시간에 아무것도 방해 받지 않게 묵상을 하여야 한다. 기도와 함께 당신이 어떠한 성경을 보더라도 당신의 묵상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점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영혼이 소화를 시키는 과정이다. 성경을 읽고 난 후에 당신의 영혼은 묵상을 통하여 소화를 하고 성령의 통로로 당신이 원하는 꿈을 꾸며 세상을 이기게 될 것이다.
9주에서 12주 4주 동안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에게 당신의 꿈을 이야기 할 때 이미 당신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성경을 전반부부터 읽으면서 세상을 해석하고 기도로 말씀을 나에게 해석하는 일을 하였으면 한다. 해석 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성경 전반을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고 당신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령님의 성격을 알아내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읽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 가도 된다. 역사적인 순서를 통해 진행하는 것은 오직 인솔 교역자가 판단에 따라 얼마나 빠른 시간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스케줄을 만들면 된다. 굳이 역사적 순서를 따라 하지 안 하도 괜찮다. 스데반과 바울처럼 성경의 해석의 스토리를 발표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도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해석하는 스토리에 넣었으면 한다.
양육 교재 3권의 성령 관점 관계의 해석원리하는 원리와 4권의 성령 관점 관계의 적용원리 원리를 당신이 보는 하나님의 관점 리스트와 예수님의 관점 해석 리스트를 적용의 관점에서 이유를 들어서 만들면 된다. 중반부 9주에서 12주까지는 좀더 자세한 관점의 해석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을 서로가 성경의 각 부분을 각자가 나누어 자세하게 하고 다음의 적용의 관점으로 배웠으면 한다. 특정한 성경의 부분을 각 그룹에서 틀리게 한 후 각 그룹에서 만든 해석과 적용의 관점의 설명서를 서로 토의하고 발표를 하였으면 한다.
마지막 12주부터 16주 4주간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꿈과 재능 성령 하나님이 당신에게 나타나신 능력을 적용하고 서로 공유하는 시간을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생들과 같이 나누었으면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예수님이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지혜를 어떤 이에게는 지식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어떤 이에게는 해석을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주신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
그리고 탕자의 회복 원리 7R을 통해 좀 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는지 증거를 가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의 관계에서 무엇을 회복할 것인지 선택하고 성경에서 적용하면 더 많은 특색이 달란트를 통해 생길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직업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날 것이다. 성가를 부르고 선교사로 해외로 나가고 직업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당신은 예수님이 되어 여러 인생에 한날 한날을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된다. 이것은 다른 인생이다. 당신이 모두 가진 것을 바꾸어도 값을 수 없는 은혜이다. 당신은 존귀한 존재이며 이 시간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성령님을 당신에게 표현을 할 것이다. 그것을 따라 하면 된다.
처음 필자는 성령 체험은 너무나 드라마틱하였다. 내 의지가 전혀 없이 교회로 향했다. 평신도 부흥 집회였는 데 전혀 갈 의지가 없이 교회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인지하였다. 하나님이 말 안듣고 고집부리는 양을 억지로 끌고 교회에 앉히신 것이다.
그리고 부흥 강사가 앞으로 예수를 주로 모실 사람을 일어서라고 하였을 때 필자는 일어났다. 그 때 뜨거운 것이 필자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죄지었던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속에서 흘러갔다. 눈물이 강을 이루었다. 무엇인가 내 안에 뜨거운 것이 들어온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옛날의 죄들이 영상으로 스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었다.
이것이 성령의 세례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필자의 나이 서른 세살의 나이이다.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지 믿음을 의지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후에 그 세례의 현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자리로 느껴진다. 교회의 맨 뒷좌석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뜨거운 성령 체험을 잊을 수 없다. 얼마 정도 후에 교회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경 교사로써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가르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는 날이면 마치 깨끗한 시냇물이 내마음속으로 들어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흘려보내는 것과 같았다. 많은 시간 동안 성경 교사를 하면서 실제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지혜 대로 성경 교사를 시작한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해 매일 무엇인가를 하라 하시는 것 같았다.
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수 많은 시간 하나님이 부어준 은혜를 받았다. 제자 영성 훈련과 많은 신학대학에서 교리를 배우고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켜 냈는 지도 공부를 하였다. 그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많은 글과 일을 통해 얻은 기록을 글로 남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글을 하나님께서는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까지 하게 하셨다. 2009년에 한권의 신앙과 이민관련 책을 출판하였다. 첫 번 책은 이민과 신앙 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나그네 같은 삶으로 어떻게 이민생활을 하는 지 직업적인 체험의 내용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현재 실제 이민 관련 서적이지만 복음 서적으로 분류되고 있다. 친구 가정의 교회에서 구역 예배시간에 이 책을 읽고 소감을 공유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누군가 전철에서 필자의 책을 보고 있다고 친척이 전화를 할 정도였다. 뉴질랜드에서 이 책을 읽고 이민 왔던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또 한 권의 책 더 출판하면서 책의 영향력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점점 더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은혜를 알면서 감사로 살게 되었다. 점점 더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고 교재를 만들어 보면서 성경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조금씩 사명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터넷이 무엇인가를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실제 많은 성경의 어려운 용어들과 비유들이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익숙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 성령님이 필자 안에서 여러 지혜를 주시었다. 그리고 주신 지혜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는데 아이들은 너무나 고마워 했다. 이제 성경을 가르치는 지혜와 계시를 다른 모든 부모님과 성경 교사들에게 알리고 싶어졌다. 이것을 고민하던 중에 출판하였던 책 때문에 지역 신문사에서 연재 기고 요청이 왔었다. 그 고민을 신문 연재로 내기 시작했다.
이 신문 기고 연재는 교회가 어떻게 다음 세대가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될지에 대한 연재였다. 연재를 쓰면서 필자는 고민은 수 많은 영적인 질문이 생기었다. 그전에 세상에 수 많은 도시를 비지니스와 선교 여행하면서 만난 청소년과 청년들을 어떻게 성경과 복음을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전할 것인 가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적은 글이 답이 되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그 시간에 임재한 성령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알리 시길 바라 시었다. 그러는 동안 필자는 성경 교사를 하면서 직접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령 관점 관계 영성 훈련을 가르치어 봤다. 거의 10년동안 청소년과 청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듣고 깨우치고 믿음의 반석이 세워지는 것을 경험 하였다. 믿음이 없는 아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부모님을 교회에 모시는 것을 보았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들었다. 전혀 주님을 믿지 않던 청소년과 청년들이 “주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증거하는 것을 필자의 귀로 들었다.
이런 증거를 들을 때마다 청소년과 청년의 마음에 성령 하나님이 있어 성령의 감화를 받는 것을 느끼었다. 말씀으로 온 예수님을 성령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생명으로 자라남을 알았다. 단순히 감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많은 성경 교사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믿음을 세우게 하고 세상에 많은 복음을 들었지만 자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 때마다 기도하면 성령 하나님은 소망을 부어 줬다. 세상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경험케 하여 잃어 버린 영혼을 한 마리 양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같은 곳에 수 많은 지식과 풍조 때문에 혼탁한 세상과 바벨론 같은 문화에 방치되고 있다. 이들에게 어떻게 믿음의 성벽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하는 지 알려주고 싶었다. 단지 이 목적으로 이글을 적었을 뿐이다. 이 교재들은 플랫폼을 통해 성경 교사들과 부모님들이 같이 만들어 갈 것이다.
마태복음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저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 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부모님과 함께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에서 자녀들의 믿음의 성벽 세우기 시리즈-
청소년과 청년들의 구원을 위해 부모님과 사역자, 성경교사와 함께 만들어가는믿음의 성벽 세우기 시리즈
이 책 교재 시리즈는 기성 세대와 소통이 단절된 다음세대를 위해 만들었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인터넷, 게임, 스마트폰 중독에 빠져 귀는 영적인 것에 둔해져 있고 그들의 눈은 영적인 것에 보지 못하고 있는 세대가 되었다. 이 책은 스마트 폰 중독이 얼마나 안 좋은 가를 알리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오게 하고 복음으로 고침을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들을 인터넷과 스마트 폰의 중독에서 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통해 복음과 성경을 어떻게 전하는 지 알아보는 책이다.
20년 이상의 IT 경험과 15년동안의 성경 교사, 간사, 선교사로써 경험을 살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인터넷을 통해 전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특히 이 교재 시리즈는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부모님과 사역자가 같이 읽었으면 한다. 그리고 특히 부모님과 청소년과 청년들 같은 현장에서 서로간의 다른 점과 공유 점을 찾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공유하는 교육시간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 이유는 부모님들과 성경 교사 같은 지금 세대가 다음 세대가 가지는 문화적인 차이를 알아야 한다. 지금 세대가 다음 세대를 알려면 왜 스마트폰과 인터넷 SNS에 어떤 중독의 문제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문화적인 소통으로 좀 더 접근할 수 있다. 다음 세대와 소통을 하려면 다음 세대가 쓰는 인터넷의 기본 구조를 알고 거기에 맞도록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이것을 지금 세대인 부모님도 같이 하여 같이 복음으로 승리를 해야 한다.
지금 까지는 부모님들이 성경 교사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맡기면서 성경 교사는 단순하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 하고 부모님들은 지켜 보기만 하였다. 마치 학교나 학원에서 선생님들이 가르치면 당연히 성경을 배우면 되겠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정말 세상 지식의 전달하는 것처럼 가르치면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만든 것이어서 청소년과 청년들과 청년들에게 영의 생명을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성경을 보면서 그 안에서 성령 하나님이 운행하도록 가르쳐야 된다. 그러려면 성령 관점으로 인생의 삶과 연결되고 비전과 세상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교사들은 한정된 시간에 가르치고 그리고 학년이 올라가면 다른 성경 교사들이 가르친다. 그러므로 부모님과 성경 교사들은 같이 연속적인 성령 관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회복되는 지를 질문하는 코칭의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님들이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한다. 이 교재들은 주로 부모님들이 성경 교사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교재이다. 자녀들을 영적으로 살리고 생명을 주려면 부모님들이 교회의 성경 교사와 같이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의 코칭 방법으로 성경을 연속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청년이 되어 믿음을 잃어버린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사역 자나 성경 교사들이나 교회는 이 과정을 만들어 부모님과 청년들이 같이 배울 수 있도록 하여 좀더 많은 질문과 코칭이 청소년과 청년들의 삶 속으로 연결되어 부모님들이 같이 공유되도록 해야 한다.
다음 세대인 젊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령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되게 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강이 흐르도록 서로 연결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중독 때문에 인터넷을 쓰지 말고 스마트폰을 쓰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는 스마트 폰은 몸의 일부처럼 되어 있다. 예수님을 만진 혈루 병 여인이 완치를 받듯이 청소년과 청년에 연결된 중독의 저주가 예수님과 연결되면 회복으로 일어나게 해야 한다. 마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서 나오는 생명의 강이 청소년과 청년들의 마음속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부모님들은 반드시 청소년과 청년들이 쓰는 스마트 폰에 복음을 연결 시켜 그들이 받는 스마트 폰 중독의 저주가 생명으로 회복하도록 해야 된다.
그렇게 하려면 부모님들과 성경교사들은 좀 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예수님이 바라 보는 세상의 관점으로 알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관점은 비유를 들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었다. 마찬가지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을 통해 어떻게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비유되는 지를 좀 더 알아야 한다. 그 비유를 통해 세상이 주는 스마트폰의 중독을 복음으로 막아서 싸우게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 말씀의 도구를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심어주고 성벽을 쌓아 주어야 한다. 복음으로 믿음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스마트 폰을 쓰는 시간보다 예배와 기도의 시간이 집중된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가정 예배와 교회의 거꾸로 성경 반에서 친구들끼리 말씀을 나눌 것이다. 또한 그들은 스마트폰을 쓰는 목적이 복음을 알리는 전도의 용도로 쓰게 되는 것이다. 스마트 폰으로 다른 형태의 개인화 주소를 통해 성경 말씀을 공유하고 성장하게 할 것이다. 또 부모님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 말씀을 녹음 하게하여 자녀들과 같이 들음으로써 믿음의 성벽을 굳게 해주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의 믿음의 성벽은 믿음이 청소년과 청년에게 개인적인 부름으로 응답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하도록 인생의 질문과 답이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면 더 성장하게 해야 된다. 청소년과 청년의 밭이 인생의 질문과 답에서 단단해 질 때 생명의 씨앗이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지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4-2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 한 성령으로 행할 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 하지 말지니라
이 책은 다음세대에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스마트 폰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좀 더 성격적인 믿음의 질문으로 어떻게 전해지는 알아보았다. 하나님이 주신 스마트 폰과 디지털 자원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예수님처럼 어떤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지 생각해야 한다. 책 시리즈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현재 익숙한 자원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성령으로 계신다면 무엇을 어떻게 비유를 했을까 성령의 관점으로 연구하였다. 이 책은 질문과 답을 가지는 문답서로 만들어 좀 더 이해를 쉽게 하였다. 아래의 질문을 답하는 형태로 이 책을 만들었다.
질문) 어떻게 하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게 할 것인가?
질문) 지금의 마음이 완악하 여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어떤 비유로 쉽게 예수님 성경 말씀을 이해 시킬 것인가?
질문)지금 스마트폰을 쓰는 다음세대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도록 할 것인가?
질문) 어떤 성경 인물로 비유할 것인가? 탕자와 사마리인은 이 세대에 누구를 비유하는가?
질문) 성경말씀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어떻게 통독하게 하며 고침을 받게 할 것인가?
질문) 성경에 나와 있는 비유는 과연 현 세대에 누구에게 적용할 것인가?
질문)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완악한 젊은 세대가 예수님의 비전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는가?
질문)청소년과 청년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연결되었을 때 지금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가.
질문) 젊은이들에게 다윗의 초막같은 교회는 무엇인가?
질문) 어떻게 하면 지금의 교회가 다음세대를 끊이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이 책 시리즈에서는 이런 모든 질문을 성경 교사로써 고민하였다. 위의 모든 질문에 답을 하려면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같이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믿음에는 세상을 바라 보는 눈과 귀가 듣고 보는 세계관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지금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복음에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세계관은 복음의 원칙에 무엇인가 기본 줄기가 있음을 알았다. 바로 성령 관점 관계 원리였다. 코칭의 질문을 통해 통해 성령 하나님이 믿음을 가지게 하며 성령님이 주신 마음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요한 17:21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소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상대를 중심으로 둔다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중심으로 두고 연합한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버지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성령님이 계시며 예수님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신 모습이 바로 삼위 일체의 모습이다. 각각의 삼위 하나님은 동등한 위로 계시 지만 상대를 중심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일체의 하나님으로 연합하여 존재 한다.
코칭은 질문으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우리 인간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인생에 변화를 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좋은 질문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게 하며 좋은 응답은 상대를 중심으로 두게 된다. 이런 코칭 방법을 통해 성경을 읽게 하며 예수님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듣고 보고 읽을 수 있다. 코칭 하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청소년과 청년들이 구원의 확신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정확하게 조준 되어야 한다. 그 믿음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관점으로 읽고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완악 하여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지식과 정보로만 듣고 보고 이해 하려고 한다. 이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된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믿는 것이다. 영으로 오신 하나님을 육의 감정과 지식으로 믿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것과 삶의 분리가 일어나고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말씀을 머리의 지식으로 연결될 뿐 그 말씀이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오직 한길은 오직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힘으로 가능함을 성령이 주인이 되어 삶의 변화와 회개를 일으키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청소년과 청년들이 스마트 폰 중독을 이길려면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해 성경을 읽게 하며 예수님의 관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과 회복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관계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회복이 되면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관점 관계의 기본 원리이다.
고린도 후서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질문) 예수님이 이 시대에 계시었다면 성경의 비유로 무엇을 가르치 실까?
질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우리 마음에 어떻게 비추실 까?
청소년과 청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성경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질문하고 응답하도록 한다. 그 응답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영적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의 빛이 내면에 들어 온다. 그 당시에 필자는 성령 관점 관계 코칭 교재 시리즈를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내면에서 많은 응답의 빛이 내려오는 것을 느끼었다. 어두운데 빛이 비치시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가 조금씩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하나님의 영광은 사명이 되어 성령하나님이 조금씩 알게 하시었다. 이 영광의 빛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비추고 싶었다.
이 코칭 교재 시리즈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데 있다. 지금은 청소년과 청년들은 거의 어둠 속에 있다. 마치 복음의 소통 도구가 단절되어가고 있는 것과 같다. 지금의 청소년과 청년 복음화 율이 4%도 안된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다음 세대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지금 세대와 다음세대에 소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가 지금 가장 많이 소통하는 도구가 스마트폰을 통한 SNS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복음을 전달하고 소통하는 도구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소통의 도구로 복음의 빛을 비춰줘야 한다. 현실적으로 부모님이나 성경 교사가 할 일은 말씀을 전달 하는 소통의 도구로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성경 말씀 파일을 심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하나님께서 주신 인터넷의 자원을 통해 소통과 공유 참여 정신인 복음을 다음 세대에 물려 주어야 한다.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청소년과 청년을 통해 세상에 펼칠 꿈과 목표와 비전을 만들도록 되어 있다. 성령 관점 관계 코칭 방법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의 비전 선언문으로 만들어 간직하고 실행하는 다음 세대가 되었으면 한다. 다음 세대는 우리의 희망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음세대에 소통하지만 다툼이 되는 것도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되어 버렸다. 바울이 복음 때문에 다툼이 되는 것을 보고 그 다툼을 듣는 사람에 어찌 되었던 복음이 전달 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 듯 여기에 하나님의 자원인 복음이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듯 12권의 책 시리즈가 복음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관점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성경 교사를 하면서 알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해 예수님이 스마트 폰 시대에 계시었다면 성경 말씀을 지식이 아닌 생명을 구하도록 어떻게 가르치시었을 까 고민하였다. 질문과 응답의 코칭 방법으로 예수님의 피와 보혈의 은혜를 어떻게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모든 질문은 응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관점의 이해를 가져 온다.
이렇듯 오직 성경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읽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점으로 읽고 듣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주제로 하였다. 이 책 시리즈는 성령 관점 관계 원리와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디지털 교육을 중심으로 하여 부모님 사역 자, 성경 교사들을 교육시키고 이 방법을 청소년과 청년에게 적용하게 하여 영광의 빛으로 안내하는 책이다. 영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청소년과 청년들에 안에 있는 성령으로 받을 수 있도록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생명과 빛으로 안내하는 시리즈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인터넷과 스마트 폰 세상에서 오직 성경을 읽고 듣는 방법에 진리가 어떻게 생명으로 들어오는 지를 질문과 응답을 통해서 알릴 뿐이다. 또 오직 성경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생명으로 인도하면서 생활에서 실재가 되게 적용하게 하는 책이다. 이 방법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 세대가 좀 더 성경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청소년과 청년들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성경을 어떻게 전달할지를 적었다. 다음세대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령 하나님의 임재로 예수님의 복음을 더욱 더 알리는데 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사탄은 스마트 폰은 게임과 포르노 사이트 중독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 사탄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포르노 사이트 중독과 게임 중독으로 자기 스스로 정죄하게 하고 있다. 주님이 사탄과 맞서서 그들을 부르고 보호하라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제 가는 이 글들이 번역되고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전도 될 것이라 꿈을 꾸시면서 적은 글이다.
질문)이 세대에서 예수님이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어떻게 도움이 되도록 가르치 시길 원하실 까?
질문)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통해 성경을 전달하는 디지털 세대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과연 무엇인가?
다음 세대는 컴퓨터와 IT(Information Technology)가 익숙한 세대이다. 특히 스마트 폰과 인터넷 게임에 익숙한 세대이다. 청소년과 청년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고 인터넷으로 게임을 한다. 누구나 채팅을 할 수 있으며 이멜이나 텍스트를 삶의 일부로 살아간다. 지금의 어른 세대는 많은 사람들과 집에 있는 전화로 통화하고 종이로 신문을 보았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스마트 폰 텍스트로 안부를 전하고 스마트폰을 통해 뉴스를 본다. 지금 기성 세대와 다음 세대는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자원을 주시었다. 미래의 다음 세대는 좀 더 다양한 형태의 스마트 폰과 SNS, AI, IOT, 인터넷 등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는 모든 관계가 디지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관계도 다음 세대는 디지털이나 SNS를 통해 이루어 가고 있다.
다음 세대에서 복음을 통해 구원과 회복이 일어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모든 관계는 소통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관계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회복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다음 세대에 주고 소통하게 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옛 날 방식의 종이 같은 형태가 아닌 디지털 형태로 변환해주어야 한다. 디지털로 변화된 매체가 SNS 이며 이미 다음세대가 여기에서 소통을 이루고 있다. 결국 복음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려면 그들과 같이 메타버스나 SNS 형태로 주어야 다음 세대가 소통이 된다.
그런데 이 세대에 주어진 스마트 폰, 디지털과 SNS 자원을 잘못 사용한다. 하나님의 복음없이 무작위로 음란한 정보와 가짜 정보로 도배를 한다.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청소년들의 디지털 채널에 심어야 한다. 대제사장과 군중들이 예수님을 몰라 보듯이 많은 다음 세대의 눈에는 예수님을 종교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시었는 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나에게 하신 구원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죄에 빠진 나를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며 부활 하시고 다시 올것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 신앙이 창조 신앙, 임마누엘 신앙, 십자가 신앙, 부활 신앙, 재림 신앙이 연합되어 사도 신경을 고백하게 한다. 또한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받쳐 주는 것이다.
이런 복음의 중요성을 모르고 스마트폰의 모든 것에 생명이 없는 듯한 정보를 주고받는 다. 이 세대에 주어진 디지털과 스마트폰 자원을 하나님이 주셨을 때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빛을 비추어 거기에 영혼의 생명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마음에 비추셨다. 예수님의 얼굴을 구하는 모든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복음 소통의 도구로 쓰시기를 원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디지털 스마트 폰을 통해 어떻게 아이들에게 믿음을 줄 것인가
성경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다. 결국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믿음을 줄려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바라는 것의 실상을 다른 말로 하면 비전과 꿈을 갖게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믿음은 예수님 실재가 생명으로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실재가 생명이 되어 예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자녀 관계가 돼서 세상을 향한 비전이 되어야 한다. 성경을 통해 성령하나님이 내재하여 비전을 갖게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야 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는 보이지 않는 증거를 가지게 한다. 만약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령이 주시지 않은 비전과 관점은 욕심이 되고 욕망이 될 수 있다. 그 만큼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세상에 대한 관점과 비전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령 관점을 위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 공부를 어떻게 시켜야 할까? 성경을 좀더 효과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어떻게 기존의 방법과 다르게 가르칠까?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관점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생님의 입장에서 청소년과 청년을 가르치는 것을 청소년과 청년들이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의 이동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지는 관점을 연습 시켜야 한다. 원래 성경 교사 선생님들이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거꾸로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 교사 선생님을 가르치도록 관점을 이동시켜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관점을 통해 성경의 관점이 어떻게 이동되는 지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관점이 이동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 지금 내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관점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증거로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을 거꾸로 성경 코칭 형태의 거꾸로 영성 제자 훈련이라고 한다.
거꾸로 성경 코칭 형태의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은 바로 청소년과 청년들이 성경의 문제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선생님과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시간이 된다. 지금까지 성경 교사는 지식을 넣어 주는 형태로 성경을 가르치었다. 마치 밥을 먹여 주듯이 숟가락으로 성경 지식을 주입식으로 넣어 주었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 지식을 머리의 지식으로 만 알게 된다. 이것은 믿음으로 될 수가 없다. 성경은 관점으로 관계를 알기 때문에 이렇게 가르치면 지식으로 끝나고 지혜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지식으로 많이 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중요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증거가 예수님이 성 도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면서 관점으로 보일 때 진정한 믿음이 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성경에서 찾고 증거가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찾고 노력하면서 예수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 이렇게 해야만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진정한 예수님의 관점으로 생명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성경 코칭 형태의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관점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 회복을 느끼는 청소년과 청년이 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거꾸로 성경 코칭 형태의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은 많은 인원이 필요 없다. 우선 거꾸로 성경은 5명정도 된 분반으로 나누어 선생님 가이드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 지식은 어떻게 전해야 하는 가? 성경을 읽지 않는 성경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성경을 읽게 하면서 검증된 성경 지식을 전해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미 수 많은 검증된 성경에 대한 지식이 검증된 교회의 사역 자들을 통해 많이 나와 있다. 이런 것을 성경 교재를 선택하여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서 무시로 배우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경 교사가 할 일은 미리 성경 본문과 이에 연결된 검증된 성경의 지식을 찾아보고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미리 읽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집에서 성경을 보도록 본문 말씀을 보내고 그와 관련된 검증된 성경 지식의 링크된 디지털 주소를 보내어 집에 성경 본문과 관련 비디오를 보게 하는 것이 먼저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은 이때 많은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 유튜브나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성경에 도움이 되는 컨텐츠 링크를 확인해야 한다. 지금의 디지털은 성경에 대한 수 많은 정보를 품고 있기 때문에 좋은 성경 지식 재료가 널려 있다. 성경 교사들은 사역자의 확인을 받은 청소년과 청년들의 스마트폰 채팅에 미리 주소를 보내 그것을 보고 오도록 하면 된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그 내용을 링크로 스마트폰 채팅 란에 시간에 상관없이 볼 수 있도록 미리 보내면 된다. 그 다음에는 성경 교사들이 지식이 되는 많은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주로 성경 교사들은 질문과 질문에 관한 지식을 좀더 다양한 관점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보게 하면 된다.
그리고 거꾸로 성경 코칭 형태의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 시간에는 청소년과 청년들끼리 자기들의 소통과 체험으로 선생님을 가르치는 내용을 만들게 하면 된다. 이때 선생님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참여 하면서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는 형태로 가이드 하면 된다. 선생님은 그 거꾸로 성경 시간에 말을 많이 해서는 안된다. 청소년과 청년들끼리 성경에 관점 질문과 문답을 서로 발표하며 체험하 도록 성경을 읽고 듣게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본 청소년과 청년들이 거꾸로 영성 제자훈련 시간에 나왔던 일정한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 진정한 자기의 믿음이 되도록 정리하면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에서 서로 체험하고 소통하게 하면 된다. 실제로 필자는 거꾸로 성경 시간에 많은 아이들이 성경을 찾고 스스로 성령 관점의 길을 알아내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밥을 먹여 준 것이 아니라 밥을 먹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점점 더 시간이 지나서 청소년과 청년들은 선생님과 부모님의 관점이 되어 알려주는 입장으로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예로 전체 성경을 한장으로 정리하여 선생님과 부모님 친구들에게 가르치도록 만들어 보게 하였다. 우선 성경이 어떤 한 것인지 전체 숲으로 볼 수 있도록 많은 좋은 내용의 성경에 관한 인터넷 비디오 링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성경을 정리한 비디오를 직접 그룹별로 만들어 보고 직접 발표까지 하게 되었다. 거꾸로 성경 코칭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그러한 지식을 지혜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가르친 것이다. 만들어지 성경 스토리 보드를 직접 비디오로 만들어 일정 시간 후에 발표하도록 유도하였다.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그 때 진정한 성경의 흐름을 알았다. 이런 시간을 통해 전체 성경이 흐르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리하게 되었고 많은 은혜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임했다.
Allbuilder 온라인 모바일 교육 플랫폼 : 성령 관점 관계 원리
거꾸로 성경 교사 성장 양육 시리즈 = 부모님, 성경교사, 청소년과 청년
1권. 예수님 관점으로 본 거꾸로 영성 형성 제자 훈련
2권. 예수님 관점으로 만드는 비전과 꿈
3권.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원리.
4권. 예수님이 관점으로 세상을 적용하는 원리
Allinonechurch 모바일 다음 세대 전도 플랫폼:
성경 교사 전도 교재 시리즈 청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영혼의 질문을 통한 전도 양육 문답서 시리즈
1권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들-
부제: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들이 사는 이유로 답한다
2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부제 예수님의 질문이 생명으로 인도한다.
3권. 이신칭의
4권. 탁란
스토리 시리즈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스토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1권 곰개미와 무사 개미
2권 뻐꾸기는 왜 밤새 우는 가
3권 거지왕과 왕자
4권 Space Bible
이 교재는 성경 교사를 양육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동안 신문에 연재 되었던 내용과 수 많은 영성 훈련, 십년의 성경 교사 교재, 간사, 신학 대, 전도사, 세계 선교와 비지니스 여행을 하면서 세계 청소년과 청년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적었던 글을 다시 모아 교재로 만들게 되었다. 전 세계 청소년과 청년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교회가 성경 교사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도 고민하였다.
지금까지는 성경 교사가 돌려면 그저 제자 영성훈련만 마치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 교사가 된 후에 수 많은 아이들과 청소년과 청년들 청년들에게 가르침에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더욱이 성경중심으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기존에 주입식으로는 영적인 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느꼈다. 수 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영적인 교육은 거꾸로 성경 같은 질문과 코칭의 방법으로 됨을 알게 되었다. 그러려면 성경 교사는 영적인 코칭의 방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가르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성경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직접 경험한다면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영적인 코칭이 가능함을 알게되었다. 결국 성경 교사가 될 려면 이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면 성경 교사로써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런 교육의 방법을 생각하면서 교재도 수 많은 시간동안 어떤 교재가 성경교사들에게 청소년과 청년들에 좋은 가 너무나 고민을 많이 하였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은 교재가 때마다 바뀌고 또한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져 지금의 스마트 폰 세대가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교재는 그져 중간에 빈칸에 정답을 기입하고 그 시간에 영적인 것을 가르치지 못하고 그저 시간 때우기 식의 교재가 많았다.
한국이 청소년과 청년 복음화율이 떨어진 것은 많은 요인 있지만 결국 교회가 청소년과 청년들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 큰 요인중에 하나이다. 문화적으로 아이들은 철저하게 이중적인 세계관을 세상에서 진화론을 배우고 교회에서 성경적인 세계관을 배우게 된다. 그런 아이들에게 그져 빈칸에 정답을 기입하는 교재로 아이들의 영혼을 꺠울 수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 교재 시리즈 8권의 책들은 점점 더 예수님의 관점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적게 하시었다. 시간이 흘러 신문연재에 내지 못한 질문과 응답으로 방대하게 내용을 다시 각색하고 좀더 쉽게 만들게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에 적었던 하나님이 주신 청소년과 청년 교육과 전도의 은혜를 이 세대에 부모님과 사역 자, 성도, 교사를 위한 8 권의 책으로 4권씩 양육과 전도 교재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성경 교사 양육 시리즈 4권은 부모님과 사역 자, 성경 교사들이 같이 교육을 받았으면 한다. 여기에는 인터넷과 스마트 폰 환경에 노출되어 청소년과 청년, 청년들에게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는 지 방법을 알려준다. 이 교재를 통해 백만명의 성경 교사들이 배출했으면 한다. 부모님들이 성경 교사가 되고 청년들이 성경 교사가 돼서 청년과 청소년과 청년들 다음세대를 가르치길 바란다. 온라인을 통해 가르치기도 하고 오프라인을 통해 만나 성경교사로써 그들이 성령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표현하였으면 한다. 우선 처음에는 교회 공동체내에서 교육이 진행되게 한다. 각각의 기독교 교파를 중심으로 하다가 초교파적인 성경 교사 플랫폼과 네트워크로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지원하고 성경 교사를 배출하여 온라인으로 가르치도록 유도했으면 한다.
성경을 지혜와 계시로 읽는 방법과 원리를 통해 청년 청소년과 청년과 초신자들에게 가르치는 성경 교사를 배출하였으면 한다. 이 과정을 이수하면 성경 교사의 자격증이 만들어 질 것이다. 모든 성경이 주는 아름다운 숲을 보게 될 것이며 성경을 어떻게 가르칠지 사역 자, 부모님, 청년들이 더욱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의 밀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필요하듯 성경 교사는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매일 옛 사람을 죽이고 예수님 안에 새사람으로 살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청소년과 청년과 청년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 교사의 사역들이 각 교회마다 그 뿌려진 씨앗들로 다음 세대가 다시 살아 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다음세대 청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령 관점 관계 원리를 통해 생명으로 양육되도록 교재를 만들었다.
성경 교사 양육시스리즈의 첫번째 책은 지금 이 순간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중독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을 통해 믿음의 성벽을 어떻게 쌓을 것인가 적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스마트폰 중독에 고민하고 있다. 첫 번 째 책은 스마트폰 중독의 현상과 그것을 해결하는 솔루션이 무엇이 있는지 적었다. 솔루션은 오직 예수님이 스마트폰 중독을 터치해야 한다. 마치 옛날 혈루 병의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만지고 병이 치료 되듯이 예수님의 복음이 스마트 폰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의 목적은 성령 하나님이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의 영과 같이 임재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비전과 목표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비전을 가지면 청소년과 청년들은 하루에 10분씩 성경을 읽는 시간을 내게 된다. 성경 말씀 전체를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도록 성령 하나님이 이끌게 하면 된다.
성경 교사 양육 시리즈 두 번째 책은 성경 교사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목표를 보게 하였다. 그러려면 성경 교사는 성경 전체에 대한 내용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 지 전체를 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마치 전체 성경 말씀을 숲으로 보고 숲에 있는 길을 알려 주는 데 있다.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 원리로 보는 비전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성경을 통해 청소년과 청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비전과 꿈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성령 관점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의 의가 들어오면 아버지 하나님이 각 자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적게 된다.
성경 교사 양육 시리즈 세 번째 책은 성경 교사가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받은 성령의 은혜로 각 나무 뿌리에서 줄기로 찾아가게 한다. 성경을 뿌리에서 기본 줄기로 찾아가서 성경의 가지 성령 관점의 원리로 보면서 세상을 해석하게 한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뿌리 성령 관점의 기본 줄기에서부터 가지로 이어지는 나무처럼 성령이 해 주시는 말씀을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는 지 순서 없이 적었다.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 해석 원리라고 한다. 이를 통해 세상이 성령 관점 관계 원리에서 성령님의 눈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해석되게 하며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세상의 유혹에서 믿음의 능력으로 승리를 갖게 되는 지 적었다. 청소년과 청년이 가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성령 관점으로 해석되면 점점 더 믿음이 견고 해진다. 이렇게 성령 관점 관계 해석 원리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믿음의 성벽으로 세워지고 세상에서 어떠한 고난이 와도 무너지지 않게 된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지는 이중적인 세계관을 좀 더 영적으로 해석하게 하여 진화론적이나 과학적인 세계관을 가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믿음의 성벽이 쌓아지도록 하였다.
성경 교사 양육 시리즈 네 번째 책은 성경 교사가 성경 각 가지에서 얻은 해석된 지혜가 적용되어 청소년과 청년들이나 청년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는 지 적었다. 예수님의 관점이 성령의 임재와 같이 혼연일체가 되어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질 직업이나 가치관으로 적용되게 하였다. 이것을 청소년과 청년 부가 있는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성령의 관점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적용하는 원리가 있다. 이것을 성령 관점 관계 적용원리라고 한다. 또 이것을 7R 탕자의 관계 회복원리라고 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성령의 관점으로 적용하여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게 한다. 마치 집 나간 탕자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 것과 같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꿈과 비전이 어떻게 세상에 적용되는지 구체적으로 적용사례를 만들어 IT와 접목시키어 만들어 보았다.
이렇게 성경 교사가 양육이 되면 이것을 토대로 직접 성경 교사가 청소년과 청년과 청년들 가르칠 있도록 전도 시리즈는 4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부모님, 청년, 사역 자들이 지금 다음 세대에 맞는 성경교사로써 양육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양육된 성경 교사들이 직접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기 위한 코칭 교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전도 시리즈 교재라고 한다. 이 전도 코칭 시리즈 교재를 통한 다음 세대 전도 교재시리즈를 만든 것은 믿음의 선순환이 부모님들의 믿음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일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전도 시리즈 교재는 부모님이나 성경 교사, 사역 자들이 양육시리즈를 공부한 후에 전도 시리즈를 통해 아이들을 어디서나 질문과 응답으로 서로 코칭 하면서 가르치도록 만들어져 있다. 양육된 성경 교사들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어떻게 믿음을 전도할 것인가를 영혼의 질문과 답으로 가르칠 내용이 많다. 그 전도 시리즈는 이런 부모님과 사역 자들 성경 교사들이 양육시리즈를 끝내고 가르치는 계획과 코칭의 방법 과정을 만든 후에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을 다음세대에게 가르치고 전도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믿음이 생긴 청소년과 청년들이 자라서 다시 성경 교사가 될 것이다. 성경 교사 양육 과정과 성경 교사가 청소년과 청년과 청년 전도 과정은 믿음을 다시 순환시키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런 과정이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 지며 하나님이 전적으로 시작하 실 것이다
전도 스토리 시리즈는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반감만 가진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스토리 이야기로 접근하게 하여 복음으로 쉽게 접근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아직 완성하지 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수 많은 성경 교사들의 경험과 스토리를 담을 생각이다. 그들이 가르친 스토리나 사례를 중심으로 만들어 질 것이다. 마치 성경 교사 행전으로 만들어 질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성경 교사 양육할 때 스토리를 통한 접근을 어떻게 하는지 교육이 될 것이며 청소년과 청년 전도 교재에도 소개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이런 복음이 가진 능력을 좀더 계속 청소년과 청년의 가르치기 위한 이야기 중심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다. 스토리를 통하여 복음이 주는 메시지를 좀 더 강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성경 교사 양육 과정과 주로 성경에 기반하여 되도록 이면 쉽게 복음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 시리즈는 앞으로 영화 등으로 만들기를 바란다.
전도 시리즈 첫 번째 책인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들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들이 내가 사는 이유를 알게 한다.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믿음의 증거로 답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나는 누구 인가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내가 죄인이 됨을 알게 한다. 내가 죄임 됨을 알 때 어떻게 예수님의 피와 살이 깨끗게 하는 지 적었다. 그리고 어떻게 성경 말씀을 통해 영적 양식이 되게 하는 지 성경에서 믿음의 증거를 찾는 가를 적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증거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실상이 되며 그 증거가 성경에 나왔고 실상이 보이지 않는 영적 증거로 남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성령 관점 관계 원리에서 성경이 주는 계시를 좀더 성경의 증거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도 시리즈 두 번 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책이다.-이 책의 핵심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가 영혼의 질문 사는 이유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인생의 근본적인 영혼의 질문에서 나온 답을 성경과 함께 같이 답을 찾도록 만들었다. 성경 말씀 전체를 성령 관점 관계 원리에서 가장 먼저 물어 보는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다. 이 질문은 뿌리가 되고 나무가 되어 영혼의 질문에 답을 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가진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을 어떻게 개인적인 구주로 모실 것이냐 생각하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이 믿는 믿음이 아니라 청소년과 청년 개인이 인격적으로 구세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정말로 중요한 복음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전도 시리즈 세번 째 이신칭의는 성경의 숲에서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용서되고 의롭게 되는 지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 관점 관계에서 성화되고 회복되어 나오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코칭 하는 데 깊은 의미가 있다. 성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힘들어 하는 것이 칭의이다. 칭의를 바로 알아야 성화가 용서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안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 청소년과 청년들을 영혼 구원이라는 명제가 이루어진다.
전도 시리즈 네 번째 책인 탁란은 성경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탁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제시하였다. 그 다음세대 희망의 성벽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죄가 들어와 청소년과 청년들이 구분을 못하고 중독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든지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간다. 점점 어린 나이부터 잘못된 가치관으로 포르노 사이트에 중독된다. 마치 중독되어 가는 것은 죄에 구속된 것과 같다. 사탄이 하나님에 반하여 만든 중독된 것을 탁란이라고 하며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것인지 성경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도록 하였다.
이 두개의 과정은 부모님, 청소년과 청년, 사역자, 청년, 성경 교사등 이 주체가 되어 총 40주 동안 하게 될 것이며 각 권마다 순서적으로 5주씩 성경 교사를 양육하는 코스로 만들어 지고 전도 코칭 시리즈 4권도 마쳐 질 것이다. 이렇게 8권을 통하여 40주가 완성되면 교육 일정이 마쳐진다. 만약 교회에 방학을 포함하여 진다면 총 1년을 하여도 상관없다. 이 과정을 마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사역자가 인정하는 성령 관점 성경 교사 자격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성령 관점 성경 교사가 되면 전도 시리즈를 통해 질문과 양육의 코칭 코스를 같이 진행하게 되며 청소년과 청년들이 믿음의 양육을 할 수 있는 코스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토리 시리즈 4권은 세상 속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이 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어 앞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많은 성경 교사들이 스토리를 만들면 여기에 올려서 출간할 예정이다. 성경 교사를 하 다보면 많은 성령님이 주신 아이디어가 생기고 스토리가 생긴다. 이런 것들을 모아서 같이 출판할 예정이다. 현재는 스토리 시리즈를 통한 많은 작업이 필요하여 진행 중에 있다. 영화 만화 연극 등 주로 청소년과 청년들이 좋아하는 형태로 만들어 질 것이다. 특히 곰 개미와 무사 개미 뻐꾸기 이야기는 청소년과 청년들을 가르치는 진화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 주려 한다. 다윈이 쓴 책 종의 기원에서는 개미가 종을 부리는 것과 뻐꾸기가 몰래 알을 숨기는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이는 도저히 진화론으로 설명하기 힘든 미스터리라고 직접 썼기 때문에 이 스토리 시리즈를 읽고 종의 기원이나 진화론이 허구임을 알았으면 한다.
12권의 교재 시리즈를 쓰는 수 많은 시간 동안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기도를 드리고 인내와 끈기를 가지었지만 어떤 때는 포기할 까 생각하였다. 그것보다도 이 책 시리즈를 쓰는 동안 영적 질문에 부족이 많은 지혜가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법으로 응답을 주시고 다시 하게 하시었다. 그 수 많은 고난 중에서도 천국에서 온 어느 집사님의 편지 때문에 마음을 다시 잡게 된 두번의 사건을 소개할 까 한다.
12권의 교재와 Allbuilder라는 사역 플랫폼을 만드는 동안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반복되는 계시와 은혜 또 더 많은 고난과 회복의 연속이 있었다. 수 많은 고난 중에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해 성령 관점 관계 원리 책시리즈를 쓰고 많은 동역자를 만나고 청소년과 청년 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사역 플랫폼인 인터넷과 스마트 폰에 적합한 시스템을 개발 중에 있었다. 때론 건강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포기 할까 고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12권의 책 시리즈를 마무리도 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 시키면서 이끌고 계시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우연히 컴퓨터에서 집사님의 옛날 메일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필자는 계속 울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마치 이 편지는 천국에서 온 편지 같았다. 그 때 편지를 받을 때는 그 전에 필자가 너무나 많은 열정 속에 주님의 일을 비전으로 가지고 열심히 전 세계를 돌아 다닌 시기 였다. 그로부터 긴 세월 동안 많은 고난과 기다림의 연속으로 그 동안 필자가 가진 비전과 열정은 식어가고 있었다. 이젠 건강 때문에 포기하려고 하면서 그 열정이 식어갈 때쯤 위의 편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우연히 이멜 검색을 하던 중에 이 집사님의 이메일 편지를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이 편지를 읽는 순간 필자가 너무 힘들어서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 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래의 편지는 정확히 2012월 4월 필자가 주님의 일을 위해 전세계 선교와 비지니스 여행을 하던 중에 뉴질랜드에서 온 편지이다. 그 때도 너무나 힘들었지만 복음과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많았던 시절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이슬람 지역을 중심으로 비지니스와 선교사역을 떠날 때였다. 그 지역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고 싶어 비지니스와 선교 여행을 하는 시절이었다. 일부러 말레 시아 쿠알라룸프 어느 대학교 내 사원 옆에 호텔에서 묵었었다. 그 나라 청년을 위해 기도를 드리려고 일부러 그 호텔에서 묵었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게 되었다. 호텔 옆에 있는 무슬림 사원에서 아침을 알리는 기도 소리 때문에 깨면서 기도로 새벽을 눈물로 보낸 세월도 있었다. 이 땅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하길 처절하게 이슬람 사원의 기도 소리와 같이 기도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느끼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보호 하심과 은혜는 이국 땅에서 여지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 와중에 뉴질랜드에서 집사님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그 때 편지를 읽는 필자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많은 동역자들이 있음을 알고 힘든 과정을 이겨내기 시작했다.
“샬롬, 주의 평강으로 문안합니다. 여기는 가을이 있는 것인지, 벌써 겨울이 오려고 하는지 밤에는 제법 쌀쌀한데 한국은 봄이겠죠. 한 지구 안에서 반대의 계절을 살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해요. 어떻게 지내세요. 모두 힘들게 일하고 마음도 산란한 일이 많은데 제 제안에 따라 잘 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가족의 기도제목을 나누며 같이 기도하고 있어요. 앞이 꽉 막힌 홍해 바다 가운데 길이 내신 하나님을 믿기에 간구합니다.
분명히 하시는 하나님의 청소년과 청년 교육사업 가운데 풀려 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 뻥 뚫리는 기적의 순간과 같은 일을 내시 리라 믿기에 그 믿음으로 어려워도 이겨내는 평강의 시간들을 갖으시기 바래요
우리는 어려운 순간 순간마다 그것이 절망이요 죽음 같은 것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 짐은 분명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 허락하지 않으신 분이 확실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내며 예수님의 고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며 현재의 내 고통들을 비교해 봅니다. 나는 내 스스로 때문에 고통 당함이 많은데 예수님은 전적으로 구원을 주시기 위해 당하는 고통이니 비교 자체가 안되네요. 예전에 나누었던 주님의 청소년과 청년 선교사업을 위한 비전에 응원을 보내며 지쳐 죽을 것 같은 모습 일지라도 42.195km를 완주한 영광의
마라 토너가 되시리라 확신하며 멀리서 힘을 싫어 보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 그 보다 더한 고난이 찾아 왔다. 이런 편지로 마음의 위로를 주신 집사님이 돌아간 사건이었다. 2015년 필자의 생일날에 갑자기 뇌출혈로 교회에서 쓰러지셨다. 그 분은 그 날밤에 세상을 떠나고 천국으로 가시었다. 그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분과 전도여행을 같이 하며 깊은 숲 속에서 차가 고장나서 달밤에서 볕 빛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같이 보았다. 그 분은 매일 힘든 여정에서도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코 노래를 부르시었다.
그 이후에도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 긴 마라톤을 포기 하지 않고 플랫폼을 통해 12권째 교재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12 권의 교재 스토리 시리즈는 모든 성경 교사, 부모님들이 계속 내용을 수정하여 플랫폼을 통해 완성할 것이다. 현재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집사님의 옛날 편지를 통해 필자는 힘을 얻었다. 마치 이 편지는 마치 지금 천국에서 온 편지 같았다. 하나님은 이것조차 내가 지쳐 포기 하고 싶은 순간에 이것을 계획하신 것 같았다. 마지막 말인 멀리서 응원을 보낸다는 말에 나는 감정이 무너져서 엉엉 울고 말았다. 이분은 실제로 지금 멀리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게 하시며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그네 같은 인생의 여정을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